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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135화 (135/154)

135화 결락(4)

휘진으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들르는 슈펜하우져의 방에는 슈슈가 뉘여 있었다.

엄청나게 위중한 상태라는 말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건만.

다행히도 그런 휘진의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슈슈의 낯빛이 좋다. 다만 눈을 감고 잠든 채로 숨을 색색거리고 있을 뿐.

그 옆에는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 슈슈의 남동생이 있다. 밤낮으로 간호를 한 모양인지 퍽이나 지친 모습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휘진은 조용히 슈슈의 머리맡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 씨발새끼들.”

어떻게 이렇게 조그맣고 귀여운 여자아이 배에 칼빵을 놓을 수 있을까.

괴로워했을 슈슈를 생각하면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절대 순순히 넘어갈 생각 없다.

대공의 퀘스트에 의해 암살자 집단에 대해 꼬리를 잡은 적이 있다.

하지만 자신은 주지육림에 빠져 새로운 명령이 없다는 핑계하나로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리리엘이 그 중 한명에게 걸려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것은 전부 자신의 나태함이 불러온 참사이다.

피닉스와 타타라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아무것도 못한 채 슈슈를 잃고 말았을 것이다.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

“미안해 슈슈.”

휘진은 코를 쓱 삼키고는 단단히 칼자루를 쥐었다.

일단 루블 왕국 새끼들 조지기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시간정지 능력이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쓴 맛을 보여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대충 짐을 싼 휘진은 방문 앞에서 리리엘과 마주쳤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묘한 색깔의 시약들.

아마도 슈슈를 위해 준비된 것일 것이다.

“언제 돌아왔어요?”

리리엘은 침착치 못하게 두 귀를 쫑긋거리며 묻는다.

잠깐 무뚝뚝한 표정에서 굉장히 반가워하는 모습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니까 뭔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나 하나 좋다고 달려와 주는 녀석이 있긴 했었지.

“갑자기 뭐죠?”

휘진은 저도 모르게 리리엘을 끌어안았다.

심란했던 마음이 푸근한 향기와 감촉에 누그러드는 것이 느껴진다.

리리엘의 정수리에 느껴지는 여성의 체취와 뺨을 간질이는 두 귀가 눈물이 날 정도로 위안이 됐다.

깜짝 놀라 잠시 발버둥치는 듯했지만 얌전히 포옹을 받아준다.

“슈슈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스승님이 이젠 괜찮을 거라고 못 박으셨어요.”

“응. 고마워.”

“으으, 닭살 돋아. 당신 입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살고 볼 일이네요.”

몸을 한차례 떤 리리엘은 휘진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었다.

잠시 진정된 휘진은 리리엘의 방으로 향했다.

이것저것 해야 할 이야기도 있었고, 묻고 싶은 것도 있었고, 하여튼 하고 일이 많다.

손수 차를 내온 리리엘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풀썩 휘진의 옆에 앉았다.

“그래서, 왜 그렇게 쫓겨난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말해주실래요?”

“내 꼴이 그렇게 한심했어?”

“울고 있는 줄 알았어요.”

리리엘이 그런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태도는 다소 조심스러웠다.

짐작 가는 것이라 해봐야 슈슈가 겪은 일에 대한 자책감이려나.

그는 정작 중요한 것에 있어서는 잘 말해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리스가 루블 왕국에 잡혀갔데.”

“아리스 경이요?”

리리엘의 찻잔이 달그락거렸다.

다짜고짜 이런 쇼킹한 소식을 전달해 들을 줄이야.

리리엘은 미간을 좁히며 휘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슌푸틀은 그걸 알고 있던 것 같아. 그러고도 방관한 거지.”

“아슌푸틀이 누군데요?”

“베아트레아 아슌푸틀 대공이잖아. 지금 여황제지만.”

그 소문에 대해서는 리리엘도 들었다.

한동안 제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뒤흔들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쿠데타에 의한 황권 찬탈이라니…

베아트레아 대공과의 접점은 그렇게 많지 않은 리리엘이지만 그런 인상은 전혀 아니었으니 말이다.

왜 쿠데타라는 건 우락부락한 장군들의 전유물이 아니던가?

“왜죠?”

“그걸 모르겠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휘진을 보면서 리리엘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도달한 것은 휘진과 거의 같은 결론 뿐.

정치적인 안정을 우선시해 루블 왕국과의 소음이 날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라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은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요?”

“루블 왕국에 가려고. 아리스도 구해내야하고 슈슈를 저 꼴로 만든 씹새끼들도 조져야 되니까.”

이를 갈 듯이 중얼거리는 휘진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지만 리리엘에겐 약간 섬뜩하게 들렸다.

어딘지 모를 불길함이 솟구쳤기 때문이다.

“설마, 당신 혼자 가야하는 건가요?”

바로 이것.

베아트레아 대공이 아리스를 방치했다는 말은 다른 말로하자면 이 특공에 대해 별다른 지원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제 아무리 휘진이 강한 남자이고 능력이 있다 한들 적국에 잠입해 1급 포로를 빼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실제로 휘진은 비슷한 일을 했다가 루블 왕국에서 죽을 똥을 싸며 돌아왔던 전례가 있다.

“스승님, 스승님에게 부탁해보세요. 분명 도와주실 거예요. 지금이라면 아직 연구동에 있으실 텐데. 빨리요 금방 떠나신다고 했으니깐.”

“이미 퇴짜 맞았어.”

리리엘은 신음을 삼켰다.

짐작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나, 이렇게나 칼 같을 줄이야.

“그럼 저도 데려가 주세요.”

리리엘이 당찬 눈빛을 빛내며 휘진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아무도 도울 수 없다면 자신이 해야 한다.

타타라의 연금 수업을 받아 실력이 월등하게 향상된 자신이라면 이제껏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도움이 되리라.

“안 돼. 넌 여기 남아서 슈슈를 살펴줘. 혹시 모르잖아 그놈들이 또 올지.”

“무모해요! 루블 왕국은 이전까지와는 달라요. 지금까지야 북해가 어영부영한 태도로 응했으니까 반란 진압에 열중했을지 몰라도 내분도 거의 정리된 지금은 임전태세래요. 그런 곳에 혼자 잠입한다니…”

“어쩔 수가 없잖아.”

리리엘은 발을 동동 굴렀다.

자기가 막는다고 안갈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혼자 떠나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다음에 볼 땐 시체도 없는 장례식장에서 일지도 모른다.

“안 돼요. 절대 허락 못해요.”

“너한테 허락 받으려고 온 거 아니거든?”

“그렇다고 죽으러 간다는데 어떻게 안 말려요!”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리리엘의 목소리에 휘진은 오늘 처음으로 그녀를 마주봤다.

떨리는 주홍색 눈동자는 톡 건들면 터져버릴 것같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옷깃을 쥐고 있는 손끝이 바들바들 떨린다.

휘진은 불현듯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리리엘에게는 고백 아닌 고백도 받았었지.

전후 사정이야 어찌됐건 리리엘이 자신을 사모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했으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필사적으로 말려주다니 마음이 뭉클했다.

“왜? 나죽으면 너한테도 좋잖아. 이제 괴롭히는 사람도 없어질 텐데.”

-짝!

모진말로 그녀를 떼어내려 작정했을 때 눈앞이 번쩍했다.

리리엘은 한껏 뺨을 후려친 자세 그대로 악을 썼다.

“당신은 정말로 최악의 남자에요! 왜 그런 식으로 밖에 말을 못하는 거죠?”

“아오, 아프잖아.”

“제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끝끝내 이슬 같은 눈물을 떨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뺨 맞은 건 난데 너가 왜 우냐.”

“몰라요!”

그래도 아직은 이렇게 날 걱정해주는 사람이 남아있구나.

적어도 리리엘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감정을 보여준다.

착하고 좋은 녀석이다.

휘진은 리리엘의 손을 끌어 품에 안았다.

처음엔 저항을 하는 기색을 보이던 그녀는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대성통곡한다.

그녀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던 휘진이 먼저 입을 떼었다.

“야, 상식적으로 나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어떻게 사지(死地)에 데려 가냐.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정도 많이 들었는데.”

“좋아하는 사람을 어떻게 그런 곳에 가게 놔둬요…”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다시 힘을 되찾은 듯이 펄펄 날뛰는 리리엘의 귀가 쳐졌다가 펴졌다가 제멋대로이다.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타고 있는 모양인데.

휘진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날 위해서 진실어린 눈물을 흘려준다.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자 리리엘이 얌전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뭐라 뭐라 칭얼거리기는 하는데 잘 안 들려서 말이지.

“제가 아무리 가지 말라고 해도. 데려가 달라고 해도, 혼자 가버릴 거죠?”

“응, 미안한데. 너 데리고 갔는데 네가 죽어버리면 나는 뭐가 되냐. 진짜 개 쓰레기 무능력자로 돼버리고 일평생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40대쯤에 알코올중독으로 고독사할 거 아니야.”

“그게 뭐에요.”

휘진의 너스레에 리리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래, 내 양복에 코 찔찔 흘리는 것보다. 웃는 얼굴이 더 낫다.”

“콧물 안 흘렸거든요.”

“자, 여기 티슈.”

코는 안 흘렸다면서 티슈를 받아들고 팽 코를 푸는 리리엘.

코풀 때 귀가 펄럭거리는데 굉장히 재밌다.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리리엘은 다시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그녀도 충분히 알고 있겠지.

이게 마지막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평소 같은 내숭 없이 이렇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사히 돌아오면… 저랑 같이 살래요?”

“너 내가 무사히 돌아오는 게 싫은 거 아니냐?”

다짜고짜 사망플래그를 찍어버리려는 리리엘에게 식겁하며 말하는 휘진.

영화 같은데 보면 이런 대사를 듣는 주인공은 반드시 죽어버리잖아.

생각해보니까 이 녀석은 아슌푸틀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모른다.

이 대사는 그녀의 입장에선 쪽팔림을 무릅쓰고 간신히 용기를 낸 본심일 것이다.

“대답은 돌아와서 해줄게.”

가볍게 이마에 키스를 하고 멀어지려는 찰나 리리엘이 넥타이를 꽉 움켜쥐었다.

“거기 말고, 여기에 해줘요.”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는 리리엘.

지난 기간으로 예측해봤을 때 발정기도 아니면서 적극적인 태도이다.

가볍게 입술을 포개자 리리엘은 먼저 혀를 뻗으며 열렬하게 키스를 시도해왔다.

결코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역시 나쁜 사람도 아니다.

루블 왕국에서 그녀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걱정해서 죽을 지도 모르는 곳에 혼자 발을 뻗는다.

남자라면 이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평소라면 결코 공감할 수 없었던 남자들만의 로망에 처음으로 반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신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다못해 그의 체취라도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 리리엘은 농밀하고 짙게 혀를 섞어나갔다.

호흡이 가파르게 변해 살짝 떨어진 두 사람.

리리엘의 흘러내린 앞머리를 정돈해주며 휘진이 물었다.

“너 나 진짜 좋아하냐?”

정말, 정말 섬세하지 못한 사람.

이런 타이밍까지 이렇게 대답하기 부끄러운 질문을 해온다.

“대답은 돌아오면 해 드릴게요.”

서툴기 그지없는 거짓말을 입에 담으며 리리엘은 못 다한 말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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