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결락(3)
슈펜하우져 급행열차에서 휘진은 초조한 마음으로 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슌푸틀과 함께는 아닌지라 저번과 같은 호화 객실 열차는 아니었다.
그래도 그녀의 배려로 다른 객실과 분리된 1인실을 얻을 수 있었던 휘진.
비행기로 치면 퍼스트 클래스정도 되려나?
머리맡에 있는 종을 울리면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승무원이 고급진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휘진은 그 샴페인을 병째로 빼앗아 혼자 병나발을 부는 중이었다.
베로니카를 통과해 북해에 접어든 열차 속에서 휘진은 며칠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슌푸틀의 대응은 수상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를 제외하면 언제나 휘진에게 올곧은 시선을 보내오던 아슌푸틀이 망설였다.
거짓말을 했다.
문제는 도대체 왜?
그리고 어디서부터 거짓말이고 어디부터 진실인 것인가.
별거 아닌 것처럼 넘길 수도 있었다.
그녀가 대단한 비책을 준비하고 있고, 그 비책의 기밀성을 우선시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면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독한 악취가 난다.
자신이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짙은 어둠이 있다는 것을 휘진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휘진은 종이 몇 장과 펜을 얻어 자신만이 알아 볼 수 있는 한글을 끄적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스스로 묻고 답하는 자문자답의 결과물.
명확한 답을 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위(自慰)를 위한 행동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아슌푸틀은 아리스의 납치 사실을 숨겼다.
왜?
첫째, 휘진이 지금처럼 섣부른 행동을 할까 두려워서.
이 부분은 이미 경험이 있다.
그녀가 펠릭스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가 깽판을 치려할 때 아리스를 통해 잠재운 것은 대공의 지시였으니까.
못 미더운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니 이러한 처사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었다.
둘째, 정치적 이유로 아리스를 잘라내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다.
일견 슐레스비 제국은 빠르게 안정화되고 있었지만, 휘진도 바보는 아니었다.
정권교체에 있어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아마 자신이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삐걱거림이 곳곳에서 튀어오를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하다.
그런 와중에 더 큰 불화를 만들고 싶지 않아하는 아슌푸틀이 아리스를 방치하고 통치의 내실을 다지는 것을 우선시했다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가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껏 휘진이 생각해왔던 아슌푸틀은 그 누구보다 정의에 대해 고뇌하고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슌푸틀은 소년만화에나 나오는 불살(不殺)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의를 관철하고 쿠데타를 성공시키기 위해 2000명이 넘는 무저항의 귀족들에게 포격을 퍼부었다.
히로인 버프를 적용해 좋게 포장해주어도 그것은 학살이다.
아무리 제국의 정치판이 썩은 쓰레기통이라도 그 중엔 소신을 갖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던 좋은 귀족도 있었을 것이다.
휘진도 떠올릴 수 있는 것을 아슌푸틀이 몰랐을 리 없다.
그녀는 그 정도의 각오를 다진 것이다.
설령 제 손을 온갖 피로 물들이는 일이 있더라도 비틀린 것들을 바로잡기로.
조용히 고개를 내젓는다.
그녀와의 신뢰를 혼자 삽질하다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다.
“믿을게. 아슌푸틀.”
누구에게 라고 할 것 없이 중얼거린 휘진은 다시 시선을 어둠의 저편으로 던졌다.
◈ ◈ ◈
슈펜하우져에 도착하자마자 휘진은 타타라를 찾았다.
마음에 넘실거리는 걱정 탓에 밤잠을 설쳤기에 컨디션은 최악이었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다.
3일 전 의식불명이었다는 것은 지금은 슈슈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지도 모른다.
휘진은 인간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는 로맨티스트는 아니었지만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슈슈를 지탱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기에.
오랜만에 경비병을 만나 가벼운 인사를 건넨 휘진은 곧장 타타라의 연구동으로 향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연구동에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산만하게 혼재되어있던 실험기구와 서류의 퇴적물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는 것이다.
채 보수 공사가 끝나지 않은 타타라의 연구동은 외벽 곳곳이 손상되어있었고 바닥엔 커다란 크레이터들이 흉하게 노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타타라! 슈슈는 어디 있어?”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할 틈도 없이 곧장 타타라에게 물었다.
변변한 인사도 없이 타타라는 휘진에게 답했다.
“상당히 상태가 호전되어서 네 방에 뉘여 두었어. 갑작스러운 재생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없지만 아마 곧 눈을 뜰 거야.”
“어떻게 된 건데? 상태는? 회복 못할 가능성은 없어?”
“흉수의 칼날에 복부를 깊숙이 찔렸어. 내장도 전부 헤집어져 있었고 내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져가고 있었지. 피닉스가 선물로 주었던 깃털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장례식이 끝났을 거야.”
휘진은 그제야 안도감에 눈을 지그시 감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피로를 느꼈다.
담배를 입에 문 휘진은 타타라가 등에 메고 있는 커다란 가방을 발견했다.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배낭을 등에 진 타타라는 마치 달팽이 같았다.
마음이 급해서 저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뭐야? 어디가?”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으니까. 이제 슬슬 떠나야지.”
“그 많던 짐을 다 거기에 넣은 거야?”
“아니? 여기에. 이건 공들인 시약들만 골라 담은거야.”
타타라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들겨 보았다.
그 많던 연구 자료를 전부 외워버렸다는 건가…
새삼 타타라의 괴물 같은 두뇌에 대해 재확인한 휘진이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타타라를 붙잡았다.
“어디로 가는데?”
“비밀.”
“혹시 루블 왕국으로 가려는 거야?”
혹시 아리스가 잡혀갔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일까?
막연한 기대를 해보는 휘진이었지만 타타라는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너는 정말 자기편의적으로만 생각하는 구나? 아리스를 구하러 가는 건 아니야. 애초에 베아트레아와의 약속은 그 아이가 아신이 되기까지였으니까.”
“벌써 알고 있었어?”
“아신끼리는 새로운 아신의 탄생을 감지할 수 있어. 게다가 계획대로였다면 여황제가 된 시점에서 아신이 되었겠지.”
계획, 계획, 그놈의 계획.
도대체가 무슨 놈의 계획이 그렇게 많기에 모두 자신에겐 비밀로 하는 것일까?
답답한 심정에 휘진은 거칠게 연기를 뿜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에게 군소리를 할 입장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타타라를 찾아온 것은 꼭 슈슈가 있는 곳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의 조력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도와줘.”
“거절할게.”
칼 같은 거절로 응대하는 타타라의 눈에는 예전과 같은 친근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선을 긋고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벌써 여기까지 마음이 정리되었다니… 참담함을 느낀 휘진은 조급하게 부탁했다.
“나 혼자로는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몰라. 시간정지 능력도 만능은 아니고, 난 정말 아리스를 구하고 싶어. 너와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잖아. 더는 귀찮게 안할 테니까 이번 한번만 눈감고 도와주라.”
“토렌스는 나도 이길 수 없어. 어차피 인연을 끊을 사이인데 목숨을 걸 의리가 어디 있겠어?”
어떤 원리인지 모르겠지만 토렌스의 마력의 창은 시간정지를 깨뜨렸다.
거기에 시간정지는 무제한으로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는 것도 두렵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아리스가 적의 손에 놀아나는 것이 두려웠다.
휘진은 무릎을 꿇고 타타라를 올려보며 말했다.
“부탁해. 네가 나를 위해 해준 게 정말 많다는 건 알아. 염치없지만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제발…”
알량한 자존심을 굽혀가며 무릎을 꿇은 휘진이지만 타타라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한번 쓰다듬을 뿐이었다.
“무릎을 굽혀서 모든 게 해결된다면 세상 참 쉽겠다. 그 동안 즐거웠어. 잘 지내.”
눈물겨운 감성팔이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휘진을 스쳐지나간 타타라는 생각났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간의 정이라는 패시브가 발동할 것일까? 일말의 기대감을 갖는 휘진이었지만 타타라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 다시 휘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슌푸틀이 아신이 되기 위해 달성한 위업이 무엇일거라고 생각해?”
“…여황제가 되는 것?”
“그건 첫 번째 조건에 불과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을 반복하는 금붕어를 보는 시선이었다.
연민과 쓴웃음이 섞여있는 표정을 지은 채 타타라는 경고했다.
“두 번째 조건은 스스로의 길을 관철하며 적대하는 인간 천명을 죽이는 것이야.”
“그게 어쨌다고.”
살짝 충격을 받긴 했지만 그다지 새로운 사실은 아니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봐왔던 휘진의 마음을 크게 흔들기에는 부족하다.
“네가 바라보고 사랑하는 아슌푸틀이 과연 아슌푸틀의 모든 것일까? 그런 위업을 부여받고 실제로 행동한 사람이, 여전히 인간을 구원하겠다 말하는 거야. 정말로 네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타타라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슌푸틀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민중을 위해 스스로의 몸을 불사 지른 성자(聖子)처럼 범인(凡人)과는 어딘가 어긋나 있는 사람이다.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휘진에게 다가선 타타라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망가. 아리스는 포기하고 네 메이드와 리리엘과 함께 동부 제도라도 숨어들어.”
“뭐?”
타타라의 말에서 휘진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루블 왕국에 가는 것을 만류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도망치라고?
“내가 왜 아슌푸틀에게서 도망쳐야 하는데?”
“나는 말할 수 없어. 그건 ‘계약’이야.”
아마도 심장을 엮는 계약을 말하는 것이다.
아슌푸틀과 타타라는 모종의 계약을 맺었고 타타라는 그것을 은밀히 피해가며 자신에게 일러주는 것이다.
“원래는 말해주지 않을 작정이었어. 그거 알아? 나이를 먹어갈수록 좋아하는 것들이 줄어들어. 성으로도, 훌륭한 만찬으로도 변할 수 있는 모래사장의 모래를 어른이 되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것처럼.”
“그게 무슨 상관인데.”
“수백 년을 넘게 살아오다보면 좋아하는 것들은 한손으로 꼽을 만큼 적어져버리게 되지. 참 슬프지 않아?”
휘진은 혼란스러웠다.
그 사랑스럽고 아슌푸틀이 자신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이기에 이런 말을 꺼내는 걸까.
도저히 모르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그녀의 환한 미소 이외에는 아무것도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너를 좋아하니까 해주는 마지막 충고야. 루블 왕국에는 절대로 가서는 안 돼.”
언제나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한 예견을 보여주었던 타타라.
자신 같은 모질이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주었던 아슌푸틀.
잠깐의 갈등 속에서 휘진은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온 타타라를 밀어냈다.
“나는 너보다 아슌푸틀을 믿고 있어.”
“그런가? 사랑은 인간의 눈을 어둡게 만들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거야.”
후련해진 표정을 지은 타타라는 이번엔 정말로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걸어갔다.
황량한 연구동에 타타라의 마지막 한 마디만이 지독하게 의미심장하게 굽이쳤다.
“내 충고가 기우이길 진심으로 빌게. 언젠가 인과의 교차로에서 다시 만나자.”
붙잡을 틈도 없이 그렇게 그녀는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