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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133화 (133/154)

133화 결락(2)

베아트레아 아슌푸틀이 황제로 등위한 뒤, 근위대장이라는 근사한 역할이 붙었지만 실제로 그런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황실 직속 친위대장이라는 새로운 작위를 부여받은 몰트케였다.

몰트케를 처형하지 않고 작위를 준 것은 그가 유능했으며 최악의 귀족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휘하의 부하들을 이끌고 아슌푸틀의 신변을 보호했으며 각종 암살의 위협에도 직접 대처했다.

따라서 휘진이 하는 업무는 사실상 아슌푸틀의 기쁨조 역할 정도였다.

휘진은 이런 취급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였다.

녹봉도 5배 가까이 뛰었고 귀찮은 일을 떠맡지 않으니 어찌 보면 북해에서 보다 훨씬 윤택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

“휘진 경 안녕하신가?”

정원의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며 우아하게 귀족의 오후를 맞이하고 있던 휘진에게 말을 건 것은 트리니다드 펠릭스였다.

원래의 펠릭스는 실제로 한 번 죽었고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바티스텡의 환생이나 다름이 없지만 그걸 모르는 휘진의 얼굴은 왈칵 일그러졌다.

“야, 기생오라비. 너 잘 만났다.”

뒤끝이 굉장히 긴 휘진은 무도회에서 펠릭스에게 개쪽 당하고 쫓겨난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야 별것도 없는 식객 취급이었다만 지금은 위대하신 베아트레아 황제님의 근위대장.

북해에서 빌빌 거리는 펠릭스는 자신과 비빌 대상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기에 휘진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크윽!!!”

펠릭스의 명치에 니킥을 꽂아 넣고 그대로 뺨을 주먹으로 후렸다.

반항한다면 시간 정지도 가감 없이 사용할 생각이었건만 펠릭스는 뻔히 동작이 보이는 텔레폰 펀치에도 고스란히 얼굴을 내어주었다.

터져버린 입술을 붙잡는 펠릭스.

자세를 바로잡고도 반격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의아해진 것은 휘진이었다.

“뭐하냐? 내가 그런다고 봐줄 것 같아?”

“진정해봐. 그때는 사정이 있어서 그랬던 거지. 난 너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어.”

“난 존나 많거든? 아, 너 파혼됐다며? 어쩌냐 아쉬워서. 잘만하면 부마(駙馬)가 될 수도 있었는데.”

빈정거리는 휘진 앞에서도 펠릭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단숨에 김이 빠진 휘진.

저항하지 않는 상대에게 분풀이하는 것만큼 꼴사나운 것도 없다.

거칠게 그것을 낚아챈 휘진이 물었다.

“이게 뭔데?”

“내 영지에서 온 보고서야. 폐하께 전달해드렸으면 해서.”

“오호? 여황 폐하의 환심을 이런 식으로 사려는 거구나. 딱하다 딱해. 이건 내가 꼭,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제대로, 전달해줄게.”

“그럼 고맙지.”

펠릭스는 씨익 웃고는 멋쩍어하며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멍청한 녀석.

아슌푸틀이 이따위 보고서를 바친다고 해서 눈 하나 까딱할 것 같은가?

이미 이 몸에게 푹휘진은 빠져버렸는데 말이다.

이건 겨울이 될 때까지 보관하다가 불쏘시개로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휘진은 유유자적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휘진은 봉투를 열어 본다.

뭐 말은 그렇게 해도 만약 정말 전달해야할 주요 정보라면 제대로 전해줄 생각이었다.

이미 승리한 이상 패자에게 이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도 될 테니까.

무엇보다 진짜 중요한 정보를 중간에 가로챘다가는 아슌푸틀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녀가 진심으로 화내는 걸 본 적은 없지만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면 엄청나게 무서울 것 같거든.

“뭐야 시발.”

내용물을 확인한 휘진은 저도 모르게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고운 필체로 작성된 고급 양피지 3장.

거기에는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적혀 있었다.

[북해 침공 피해현황]

[쉬펜 아리스 납치]

빈틈을 틈탄 루블 왕국(추정)의 기습으로 슈펜하우져의 관리들과 사용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붉은 돌 왕국의 해방군에게 파견되었던 쉬펜 아리스가 임무도중 토렌스에 의해 납치되었다.

크게 나누자면 이 두 가지 내용.

필사적으로 지면을 찾던 휘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제발 없었으면 하면서도 서툴게 대륙 문자를 하나씩 읊조려가는 휘진은 피해자 명단에 적혀 있는 한 메이드의 이름을 보았다.

[슈슈]

[특이사항: 메이드의 신분이나 귀족 객실에서 동생과 함께 기거, 전 식객 휘진의 전담 메이드]

[용태: 의식불명]

“이 씨발…”

거칠게 종이를 벽에 내던진 휘진은 아슌푸틀에게 달려갔다.

◈          ◈          ◈

“아슌푸틀!”

거의 문을 부숴버릴 듯이 젖히고 등장한 휘진의 등장에 아슌푸틀은 그만 술잔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돌바닥에 부딪혀 조각조각 흩어지는 크리스털의 파편들.

아슌푸틀은 그것에 아랑곳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거칠게 숨을 내쉬는 휘진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 휘진에게 달려드는 아슌푸틀의 눈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이토록 흥분한 휘진을 처음보기 때문이었다.

“아리스가 납치되었어. 루블 왕국의 소행이래. 지금 당장 구하러 가야돼.”

“….”

갑작스러운 비보에도 아슌푸틀은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릴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 아니면 너무나도 놀라운 소식에 할 말을 잃고 궁리 중인 것인가.

머리가 피에 몰려 시야가 좁아진 휘진은 여러 가지 선택지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알고 있었어?”

그녀의 반응에 의아하게 되묻는 휘진.

잠깐 시선을 피하던 아슌푸틀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모르던 사실이네.”

“미안, 내가 너무 흥분해서. 아슌푸틀이 이걸 알고 있었으면 이렇게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지. 자, 그럼 이제 날 보내줘. 내가 아리스를 구출해 올 테니까.”

그녀의 태도가 애매하다는 것을 휘진은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맹신하고, 필사적으로 그녀를 재촉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불길한 징조를 애써 무시한 채 휘진은 이를 꽉 깨물었다.

“내 전속 메이드인 아이도, 흉수의 칼날에 당했데. 지금 의식불명이래. 확인해보고 싶어.”

“정말로 유감이구나.”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대답하는 아슌푸틀에겐 언제나 당당히 세상과 마주하던 기세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혼나는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다른 곳을 보려 든다.

도대체 왜?

“유감? 그게 다야? 빨리 명령해 달라고. 공선이든 열차든 뭐든 수배해서 날 보내줘.”

“휘진… 그대는 지금 감정의 파도에 휘청거리고 있네. 조금 진정…”

“이게 진정 되게 생겼어!”

아슌푸틀의 말을 끊고 버럭 큰 소리를 낸 휘진은 아차 싶었는지 자신의 머리를 쥐어 싸맸다.

이러려던 게 아니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휘진이 간곡히 말했다.

“감정적이든 뭐든 알게 뭐야. 지금 둘 다 위험한 상태인거잖아. 슈슈는 내가 당장 손이라도 잡아줘야겠고, 아리스는 구해올게. 약속해.”

언제나 자신만을 바라봐주던 상냥한 메이드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것만으로 이성을 잃을 이유는 충분한데, 아리스마저 적왕의 손에 넘어가있다.

아리스와의 대화를 통해 토프키센이 얼마나 미친놈인지 알고 있는 휘진은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가 엘프들에게 행하는 잔혹한 성고문은 자신과 같은 레벨 정도의 새디스트가 아니었다.

그 미친놈은 연쇄살인마나 다름없는 사이코패스이다.

“아리스는 포로 양도를 위한 외교적 절차를 밟고 있네.”

“그 새끼 그딴 거 신경 안 쓰는 놈이잖아. 지금도 무슨 짓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 거잖아.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나 역시 걱정스럽네. 지금 당장 그대를 슈펜하우져에 보내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야. 하지만 루블 왕국은…”

“부탁할게 아슌푸틀. 제발 나를 보내줘.”

그래.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불법 입국을 하다가 잡혀간 아리스는 그렇다 쳐도, 베아트레아의 근위대장으로 임명된 자신이 대뜸 적국에 비밀 작전을 수행하다 걸리게 된다면 반드시 약점이 되리라.

“나는 그대를 또 다시 사지에 밀어 넣고 싶지 않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부탁 아닌 부탁을 하는 아슌푸틀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비단 정치적 문제뿐 아니라 소중한 연인을 두 번 다시 잃고 싶지 않는 그녀의 마음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섹스만 머리에 찬 병신이라 어려운 문제는 모르겠어. 내가 거기에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왜 아슌푸틀이 나를 루블 왕국에 보내지 않으려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 그래도 부탁할게. 동료잖아. 지금 어떤 힘든 상황인지 알 수 없잖아.”

아무리 쓰레기라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휘진은 아슌푸틀의 어깨를 흔들며 소리쳤다.

반쯤은 실성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휘진은 여태 남의 여자를 빼앗는 건 어렵지 않은 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되자 아나스타샤와의 일이 떠오르며 미카엘에게 미안한 심정이 들 정도이다.

휘진은 자신의 가슴팍에 매달려있던 계급장을 떼어냈다.

“다녀올게. 꼭 아리스와 함께… 무사히.”

아슌푸틀을 마지막으로 꽉 끌어안은 휘진은 아리스에게 받은 검을 쥐어들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슌푸틀은 휘진이 나간 방에 홀로 남아 술잔을 채웠다.

멍하니 이마를 짓고 테이블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 끝에는 휘양찬란하게 장식된 휘진의 계급장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자신과 아리스의 인연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휘진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루블 왕국에 잠입하려든다.

예정대로의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저미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앞에 놓여있는 펠릭스와의 원격 편지에 떠올라있는 문구들.

[서류 전달 완료되었습니다]

[예정대로 북해로 곧장 향한 뒤 루블 왕국으로 밀입국할 듯합니다]

[예상 소요시간 10일]

[대책안 역시 순조롭게 진행 될 듯합니다]

아슌푸틀은 촉이 닳아있는 깃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까스로 한 문장의 글을 써내려갔다.

[수고했네]

수고?

무엇을 위한 수고인가?

자신의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의 문턱에 몰아넣는 것에 대한 수고인가?

친애해 마지않는 동료를 잔혹한 순교자의 길에 몰아넣는 것에 대한 수고인가?

알고 있다. 펠릭스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충실히 시행했을 뿐이다.

수 년 전부터 그랬고 앞으로 그 육신이 재가 되는 날까지 그리하겠지.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진다면 또 다른 육체를 얻어 영원히 아슌푸틀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바티스텡이 펠릭스가 되었던 것처럼.

아슌푸틀은 책상 아래 놓여있던 검은 책을 꺼내들었다.

3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은 이미 절반이 넘는 페이지가 그녀의 행보로 빼곡히 기록되어있다.

그것은 그녀가 직접 적어 내려간 스스로의 악업(惡業)의 자서전이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기를 써내려간 아슌푸틀은 잉크가 마르길 기다렸다가 조용히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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