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결락(1)
루블 왕국의 귀족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궁중 병원.
평범한 평민들은 1년 내내 일해도 하루조차 묵을 수 없는 VIP병실은 오후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나른함이 가득했다.
잘 정돈된 침대에 기대 앉아 있는 여성은 화려한 금발과 짙은 녹안을 지닌 아리스.
섬세한 손끝이 책을 넘길 때마다 팔랑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병실 내에 비치된 책들은 죄다 루블 왕국의 언어로 되어있었지만 3개 국어에 능통한 아리스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단은 감금되어있는 포로 신세라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이렇게 책이나 읽는 신세이다.
-똑똑
“좋은 오후.”
당장 무도회 한가운데서 춤을 춰도 좋을 화려한 복장을 갖춰 입은 토프키센이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입장했다.
아리스는 책을 덮은 채 조용히 고개를 숙여 적장에 대한 예우를 갖춘다.
“너무 따분하진 않아? 바깥 공기도 쐴 수 있게 해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서로의 입장이 입장인지라 말이야.”
“신경써주신 덕분에 불편함은 없습니다.”
아리스가 토프키센을 접하고 느낀 감상은 ‘생각했던 것과는 정말 다른 사람이다’라는 것이었다.
잔학한 성격과 광기로 자신을 적대하는 모든 것을 분쇄한다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토렌스와의 일전이후 의식불명이 된 자신을 의료 마법을 사용해 회복시키고 귀족 포로의 예우에 맞춰 대우했다.
비록 마각수라는 특수한 약물을 투입당해 마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아리스도 당장에 뭔가 난동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갑작스러운 두통에 아리스는 살짝 눈을 찡그렸다.
“아무것도 없으면 정말 황량할 것 같아서 이렇게 꽃이라도 준비했어.”
“감사합니다.”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손수 꽃병에 꽃을 끼워 넣는 토프키센은 왕의 품위보다는 능글능글한 카사노바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적국의 왕.
아무리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 해도 엄밀히 지성과 인격을 지닌 엘프를 학살한 학살자다.
이 이상 거리를 좁히는 것을 원치 않은 아리스는 최대한 무덤덤한 말투를 유지하며 토프키센을 살폈다.
무슨 연유에서 인지 토프키센은 거의 매일 이 병실에 들렀다.
자신이 베아트레아 대공의 오른팔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 빈도는 너무 잦다.
“역시 여기 오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
“무슨 말씀이시죠?”
“궁궐에는 시시탐탐 내 목을 노리는 개새끼들 밖에 없어서 말이지. 아리스 경이라면 적어도 갑자기 내 목을 베려 들진 않을 거잖아?”
아리스는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기에 말을 아꼈다.
토프키센의 지나칠 정도로 친근한 태도는 최악을 가정했던 아리스에게는 다행이었지만 어 의미로는 굉장히 곤혹스러웠다.
마치 친구라도 만들고 싶다는 듯 허물없이 대해오는 그의 행동에 어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으니 말이다.
“이번엔 말이지 남부에서 또 반란이 일어났지 뭐야. 일단 제 2함대를 출격시켜서 저지하기는 했는데…”
이런 식으로 토프키센은 하루에 한 번씩 온갖 국정에 대한 푸념을 털어 놓았다.
답답한 부분은 답답하다 말하고, 고민되는 부분이 있으면 솔직하게 조언을 구한다.
물론 제대로 대답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적국의 스파이일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이런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책략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러나 올곧고 충직해도 진심어린 태도로 상대해오는 상대에겐 약한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지나친 억압은 그에 상응하는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지금이라도 선정(善政)을 펼치시지요.”
“선정?”
“예, 전하께서 펼치시는 정책은 자극적이고 선동되기 쉽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홀로 남겨진 독재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공포와 멸시어린 시선 뿐. 반대로 전하가 먼저 선치를 베푸신다면 당장에야 손에서 흘러나가는 것이 있다한들 차후 대의에 있어 이익이 될 것입니다.”
아리스조차도 ‘너무 갔다’라는 생각이 들 법한 참견이었다.
그의 행동에 감화되어 마치 자신이 그의 충직한 신하라도 되는 듯이 조언을 해버리고 말았다.
루블 왕국의 스파이들에게 들었던 그의 행보에 반발심을 갖고 있던 아리스였던 지라 조건반사적인 정정이 튀어나간 것이다.
그녀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토프키센은 의자를 끌고와 그 앞에 털썩 앉았다.
“인간이라는 건 간악하지. 때문에 폭군이 될 필요가 있는 거야. 짓밟을 거면 복수를 다짐한 결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으깨놓아야 복수할 엄두를 내지 못해.”
“거기에 어떤 도의(道義)와 정의가 있습니까?”
“도의와 정의 따위 정치에선 사치지. 짐승 같은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선 그 보다 더한 맹수가 될 필요가 있다. 나를 겨눈 화살을 막아주는 것은 알량한 정의감이 아니라 내 앞에 우뚝 선 공포라는 이름의 방패야.”
아리스는 처음으로 그와 진지하게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언제나 궁금했었다.
루블 토프키센이라는 인간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이처럼 많은 죽음을 낳는가?
자신과 정 반대의 인간이 갖는 가치관은 아리스의 호기심과 더불어 반발심을 불러 일으켰다.
“다스리는 자를 짐승 취급하신다한들 짐승의 왕이 될 뿐입니다.”
아리스는 자신의 경솔한 발언을 즉각 후회했다.
그의 친근한 태도 때문에 긴장이 풀려 깜빡 잊고 있었지만 이곳은 적국의 수도이며,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은 눈앞에 이 젊은 청년이다.
만약 토프키센이 자신이 섬기는 군주라면 목숨을 건 충언 따위 골백번이고 했겠지만 그는 엄연히 적의 수장인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연극을 좋아해. 정의로운 용사와 사악한 용이 나오고 용에게 잡혀간 불쌍한 공주를 용사가 구출하는 내용 같은 거. 알지?”
“….”
“왜 인간들은 이런 뻔한 내용을 몇 백, 몇 천 번씩이나 비슷한 작품들로 써내려갈까?”
잠시 침묵을 지키던 토프키센은 유쾌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스의 턱을 잡고 눈을 맞추었다.
저주 받은 루비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알 수 없는 열의를 띠우며 번들거렸다.
“세상은 참 알기 어렵지. 좋은 놈 나쁜 놈이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아. 강도짓을 한 범죄자를 잡고 보면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가장(家長)이고, 지혜롭다 칭송받는 재상은 식민지에서는 온 마을을 굶주리게 하는 악귀의 수장이야.
적군 일천을 베어낸 기사는 용맹한 이름을 찬양받지만, 죽어간 천 명의 가족에게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일 뿐이지. 도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
토프키센은 꼼짝 못하고 굳어있는 아리스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고는 놓아주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나 연극에 열광하는 거지. 나쁜 놈 죽이고, 좋은 놈 잘되면 해피엔딩인 간편한 스토리는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해주거든.”
“하지만 엘프들을 학살하는 것은…”
“나는 극작가가 아니라, 일국의 군주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선악을 구별하는 게 아니라 내게 거스르는 모든 이들을 약탈하고 무너뜨리는 것.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게 내게 한 뼘의 영토라도 더 준다면 기꺼이 하루 종일 몰두하지.”
아리스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자신의 손에 든 것을 지키기 위해 폭정을 거듭하는 폭군.
그는 자신이 지켜봐왔던 슐레스비의 귀족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이 뻔하디 뻔한 욕망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어야 그들은 정신을 차릴 것인가?
“아무것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몇 번이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눈앞에 잘 익은 사과를 따는 것은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허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언뜻 무가치하고,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일이야 말로 인간만이 추구할 수 있는 것. 그 숭고한 이념을 그저 불필요한 불순물 정도로 생각한다면 인간으로 태어나 짐승으로 죽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절대 영도 만큼이나 차가워진 토프키센의 얼굴엔 아까와 같은 여유는 한 줌도 남아있지 않았다.
“…에게 깔려서 자지러지던 계집이 고상하기도 해라.”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지금 당장 칼을 빼들고 목을 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감정의 격류가 두꺼운 낯가죽아래 간신히 표류하고 있을 뿐.
한 마디씩 씹어 말하듯이 내뱉은 토프키센의 말을 아리스는 들을 수 없었다.
아리스의 질문에 토프키센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과연 아리스 경이 베아트레아 대공의 총애를 받는 이유를 알겠어. 다음 기회에 깊게 생각해볼게.”
“네. 그럼.”
손을 흔들며 나서는 토프키센에게 아리스는 묵례로 예를 표했다.
토프키센이 병실로 나서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토렌스가 따라붙었다.
아직도 온갖 암살 미수에 시달리는 토프키센은 언제나 자신의 호위로 토렌스를 두었기 때문이다.
위축되지는 않되 언제나 만전을 기한다.
쾌락을 탐하되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신조를 갖고 있는 토프키센에게 토렌스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오랜 세월 탓에 감정이 무뎌져 감상에 빠지지 않는 탓에 그는 언제나 적정선을 알려주었고,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무력을 가진 덕에 암살의 위험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왜곡(歪曲)이 잘 먹혀든 것 같아. 붉은 돌 왕국의 잔당 쪽은 어때?”
“공군함의 노심을 손에 넣은 뒤로는 함선의 양산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토프키센이 가지고 있는 힘은 마법이나, 삼계 마법 같은 것과는 완전히 종류가 달랐다.
마력 대신 정신력을 사용하며 현실을 왜곡하는 힘.
휘진이 지닌 정지 능력과 가장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 힘을 이용해 토프키센은 아리스의 기억 몇 가지를 왜곡시켰다.
슈렐리아의 성고문을 극진한 간호로, 토프키센의 취조를 정다운 담론으로, 그녀가 지니고 있던 온갖 불쾌한 감정들을 편안함으로.
아리스가 워낙 강한 정신력을 가진 탓에 몇 번이나 애를 먹어야 했지만 그 부분은 향정신성 약물을 통해 스무스하게 넘어갔다.
아리스가 토프키센에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던 것도 그 탓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토프키센은 포로에게 신사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본심을 털어놓는 소탈한 왕일 테니 말이다.
아리스에게 최대한 심리적 거리를 좁혀 다음 왜곡으로 베아트레아를 배신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물론 아리스에게는 배신을 한다는 자각조차 없을 테지만 말이다.
“이번엔 네가 일할 차례네. 며칠이면 되겠어?”
“2주면 충분합니다.”
“열흘 줄게. 1, 2, 8 함대를 이끌고 엘프 놈들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버려. 대공 포탑의 공사는?”
“언제나 임전 대기 상태로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놈들이 노브고르도에 나타나는 순간 일개 함대를 초토화할 화력이 덮칠 겁니다.”
무슨 꿍꿍이로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아리스를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할 생각이다.
완벽하게 왜곡이 끝난다면 그녀를 베아트레아 여황제에게 돌려보내고 밀정으로도 암살자로도 써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갑작스럽게 난이도가 올라가버린 베아트레아 대공과의 싸움도 그에겐 또 다른 여흥일 뿐이었다.
수많은 엘프 노예들이 기다리고 있는 침소로 향하며 토프키센은 휘파람을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