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정의(5)
하늘이 일그러진다.
베아트레아 아슌푸틀의 구도자로서의 권능은 ‘세계의 문’.
자기 자신의 마력을 좌표삼아 초차원(超次元)의 통로를 만들어내는 규정 외의 마법.
본래 완전한 아신이 아닌 아슌푸틀이 삼계 마법을 온전히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집약된 마력은 그것을 강제로 가능케 한다.
문을 열어 초청한 것은 펠릭스의 영지에서 관함식을 하던 그의 함대.
공군함들의 그림자가 하나 둘 씩 현두를 내세워 공간을 뛰어 넘은 채로 현현한다.
도합 25척에 이르는 공군함대의 마력노심소리가 땅을 뒤흔들며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것은 나의 정의가 아니다.”
그 포문이 향하는 곳은 지상, 방금 전까지도 남의 비극을 비웃으며 깔깔거리던 기생충무리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하고 제 몸 하나 건사하려는 지상은 이미 아비규환이다.
“이것은 너희의 정의다.”
호를 그리며 하늘로 치솟았던 아슌푸틀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리 그어진다.
“너희는 약자를 짓밟다가 강자에게 짓밟혀 죽는 거다.”
이 세계에 새로운 정의를 세우기 위한.
압도적인 무력을 지닌, 압도적인 폭력이 하늘에서 땅 끝을 가로지른다.
어째서 공군함이 대체 불가능한 파괴병기로 분류되어 공포의 대상이 되는가?
비행선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이 고작인 공군함의 포격이 지상을 향했을 때 휘진은 이해할 수 있었다.
25가닥의 마포, 그것은 단순히 집합된 마력의 파동 따위가 아니었다.
충분한 물리력과 열을 동반한 이세계의 ‘병기’.
새하얀 열선이 일제히 불을 뿜자, 대지가 갈라진다, 갈라진 땅 틈에선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다시 한 번 솟구친다.
우매한 인간에게 내리는 신의 천벌처럼, 마력의 파동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녀린 육신을 찢어발겼다.
벨 공작과 황태자의 측근들은 입을 벌린 채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했다.
통상적으로 공선은 ‘대처 가능한 충분히 느린 병기’이다.
육안으로도 마력 탐지로도 얼마든지 맞대응이 가능하며, 대공 포탑이라도 있을 때엔 사실상 한두 번 주고받는 원거리 포격전 이후에는 공세종말점은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느냐가 중점인 지구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베아트레아 대공가 갑자기 불러들인 공군함대를 보고도 그들의 사고는 정지될 수밖에 없었다.
황실에 언제나 수도 군이 주둔한다고는 하지만 당장에 즉각 운용할 수 있는 함선은 5척 정도.
그마저도 완전 전투태세를 갖추고 응전하기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애초에 공중전이란 그런 느긋한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한 순간의 도마 위의 생선으로 전락한 그들은 덜덜 떨며 아슌푸틀을 바라보았다.
여신 같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모습은 전화(戰火)를 등지고 냉엄한 심판자의 모습으로 그들을 오시하고 있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바짝 마른 목에서 쉰 소리를 내며 황태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싸움은 이미 졌다.
남은 것은 이미 져버린 싸움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챙겨 달아나는 일뿐.
“네놈들에게 바라는 것 따위. 털끝만큼도 없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기는 많았다.
이런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 역시 무수히 많았다.
아슌푸틀의 수신호에 또 한 번 마력을 집결시킨 마력활강주포는 천천히 그 포신을 황태자에게 향한다.
베아트레아 대공과 황태자 사이의 거리는 마포의 포격에 충분히 휘말릴 만한 데인저 클로즈이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럴 순 없…!!”
주먹을 쥔 채 몸을 부들부들 발광하다 아슌푸틀에게 달려 들려던 황태자의 몸뚱이를 거목의 굵기 같은 빛의 기둥이 집어삼킨다.
-콰아아앙!!!!
순식간에 일어난 흙먼지가 팽창한 대기의 폭거에 의해 이지러졌다.
아신도 간신히 막을 만한 일격을 일반인이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황태자를 비롯해 벨 공작과 솜즈 후작, 여러 유세 귀족역시 후폭풍에 휘말려 그 운명을 함께했다.
◈ ◈ ◈
베아트레아 대공의 쿠데타는 손쉽게 그리고 빠르게 매듭지어졌다.
대륙 깊숙하게 자리 잡은지라 대부분의 군대를 수도의 외곽 측에 둘러 무력의 진공상태가 된 황궁은 급작스럽게 등장한 그녀의 비밀 병기에 전혀 대항하지 못했다.
병든 황제의 목숨을 인질로 삼은 베아트레아 대공은 주둔군을 해산시키고 그를 구금한 뒤, 옥새를 받아내고 황위를 이어받았다.
문벌 귀족도 아닌 그녀에게, 더욱이나 2000명이 넘어가는 귀족을 학살한 그녀에게 황위를 이을 권리 따위는 없었지만 아무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텅 빈 하늘에서 공군함대를 불러온 그녀의 능력이 통상적으로 대처 불가능한 ‘반칙’이라는 것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귀족도 자신의 영지 위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불벼락을 맞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빛나던 황조의 핏줄은 하루아침에 틀어지고 갑작스레 늘어나버린 귀족들의 장례식에 장의사들만큼은 쾌재를 불렀다.
베아트레아는 펠릭스가 준비해둔 사병들을 통해 주요기관을 장악했으며, 친 황제파 귀족들을 빠르게 잘라나갔다.
무서운 속도로 휘몰아치는 숙청의 피바람에도 귀족들은 전혀 대항하지 않았다.
거부할 수 없는 사신의 낫이 자신의 목을 스쳐가길 기도하며 목을 움츠리거나 해외로 도피할 뿐.
그녀가 보여준 군사적 퍼포먼스는 본디 잔혹한 선혈이 튀어야할 쿠데타가 놀랍도록 차갑고 고요히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었다.
여러 곳곳에서 그녀의 위용을 전해들은 군부는 섣부른 대항을 자제한 채 침묵했으며, 고여 있던 세상에 환멸을 느낀 몇몇 젊은 장성들은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베아트레아에게 투신했다.
젊고 유망하며 나름대로의 권세를 지니던 신예 귀족들은 그녀의 힘을 점점 불려나갔다.
귀족들의 사정이 어떠하든 평민들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황제가 죽고, 황조가 무너지고, 유력 귀족들이 대거 죽어나갔음에도 그들이 체감한 것은 거의 없었다.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실렸을 때야 온 술집이 무너지도록 베아트레아 대공에 대해 떠들어댔지만 국가적 인프라와 체제가 큰 소음을 내지 않고 고스란히 인계되는 모습을 본 뒤로는 그들의 삶에 몰두했다.
그리고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베아트레아 아슌푸틀은 여황제로 등극했다.
지난 220년간 슐레스비 제국을 주무르던 로얄 패밀리의 역사가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 ◈ ◈
황제가 칙명을 선포할 때 의례 사용되던 황궁의 예식단은, 천공으로 향하는 계단을 연상시켰다.
벽을 허물고, 전보다 훨씬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게 된 광장에서 일장의 연설을 끝낸 아슌푸틀은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황제 폐하 여기 시원한 물수건이 있사옵니다.”
복도에 새로이 그녀의 옆을 지키게 된 충신들이 도열한 가운데 휘진은 여전히 어색한 말투와 몸짓으로 아슌푸틀에게 물수건을 건넸다.
“….”
냉엄한 황제의 위엄을 선보이던 아슌푸틀의 얼굴이 미묘하게 틀어져간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휘진은 알 수 있었다.
저건 그녀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표정이다.
한 차례 입술을 꾹 깨문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는 휘진에게 말했다.
“근위대장, 보고를 받을 것이 있으니 당장 집무실에 들게.”
대공님이었던 시절보다 훨씬 절도 있고 반듯한 목소리가 휘진의 귓가를 즐겁게 울린다.
저런 목소리를 내도 귀엽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껴안아주고 싶다.
군 경험으로 거수경례만큼은 자신 있는 휘진은 아슌푸틀의 뒤를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등짝을 맞았다.
“남들 앞에서 경망스럽게 무슨 일인가!”
“아얏! 아야! 아슌푸틀 잠깐만 뼈 맞았어! 폐하! 폐하!”
그다지 아프지도 않은 등짝 스매시에 두 팔을 들어 올려 열렬한 리액션을 해주는 휘진.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씩씩 거리던 아슌푸틀은 자신이 생각해도 웃겼는지 이내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요 며칠간 대화할 시간도 없어서 얼마나 쓸쓸했는지 알아?”
“나도 마찬가지라네.”
재판에서의 대 변란 이후 아슌푸틀은 한숨도 자지 않았다.
올바른 세계를 꿈꾸던 소녀가 이제는 한 제국의 여황제가 되었다.
순전히 그녀의 힘으로 쌓아올린 이 위업에 의해 구도자였던 아슌푸틀은 아신으로 거듭났다.
즉, 그녀 역시 타타라와 같은 영체를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
수면도 식사도 필요하지 않은 몸을 얻은 즉시 아슌푸틀은 벌집을 쑤신 듯 혼란스러운 제국을 정비해나가야만 했다.
비록 실질적인 휴식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나 20년 넘게 인간이었던 정신은 쉽게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정신적 피로가 지끈 지끈 머리를 쑤셔온다.
아신이 된 그녀가 두통 따위 느낄 리가 없는데도.
어쩌면 이것은 죄과(罪科)에 대한 벌인지도 모른다.
무방비하게 집무실 한 구석 침소에 몸을 던지는 아슌푸틀.
푹신한 솜의 감촉에 피로에 찌들었던 표정이 간신히 누그러진다.
“뭐하나? 어서 오게.”
우두커니 서 있는 휘진을 재촉하는 그녀의 손길에 휘진은 마찬가지로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던 거야? 난 아슌푸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 줄 알고 깜짝 놀랐어.”
“여자에게는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이 여럿 있는 법이네.”
휘진의 옷자락을 꾸욱 꾸욱 잡아당기며 장난을 치는 아슌푸틀.
하얀 고양이 같다.
이 모습이 아까 예식단에서 새로운 시대를 선포하는 여황제의 모습과 어디가 겹치는 걸까?
주변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고 행동하는 아슌푸틀이 자신에게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광이다.
무심코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무렵 휘진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장면.
돋보기로 개미를 태워죽이듯이 수많은 귀족을 학살하던 베아트레아의 공군함대.
접 그녀의 손에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분명 그녀가 계획하고 실행한 일이다.
아무리 흑화를 끝낸 휘진이라지만 전쟁터를 방불케 하던 그 장면은 뿌리 깊이 그의 마음에 남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포화소리, 충격파에 날아간 사체가 형편없이 나뒹구는 소리, 그 한가운데서 오연히 눈을 빛내며 자신만의 정의를 증명하던 아슌푸틀의 모습까지.
그때 휘진은 희미한 윤곽 밖에 잡을 수 없던 한 가지 사실에 대해 확신했다.
아슌푸틀과 자신은 너무나도 다른 인종이다.
자신이 원하는 정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고작 자신 같은 소시민과 눈높이가 같을 리가 없다.
애써 그 사실을 모른 척한 뒤 이렇게 마주한 지금도 사실은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다.
답지 않게 수심 가득한 휘진의 시야에 쏙 하고 아슌푸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대가 알고 있던 나와, 처형장에서의 나는 모두 같은 베아트레아 아슌푸틀이라네.”
놀랍도록 영특한 그녀는 휘진의 심경변화를 빠르게 눈치 챘다.
살짝 누그러진 섬세한 눈매에는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옅은 염려가 깃든다.
기밀을 최우선 사항으로 했기에 휘진에게조차 비밀로 한 이 작전이 자칫 그에겐 불신의 증표로 느껴질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해서 미안하네. 그대를 믿지 못했던 것은 아니야.”
“잘 풀렸으면 됐지. 내가 그런 걸로 꽁할까봐.”
아슌푸틀은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 휘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슌푸틀 특유의 진한 장미 향기가 머리가 사락거릴 때마다 풍겨져온다.
워낙 장발인 탓에 무릎까지 칭칭 감기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앙큼한 매력에서는 절대로 도망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의 배에 볼을 비비며 아슌푸틀은 천천히 운을 띠웠다.
“그대의 마음을 이해하네. 이제부터라도 내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네. 그대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째 굉장히 찔린다.
“내가 힘들고 지칠 때, 언제나 내 옆에서 날 지탱하고 안아주게.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부탁하는 유일하고도 귀중한 책무라네.”
음.
울림조차 쑥스러운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응석을 부리는 아슌푸틀.
마음이 뜨거워짐과 동시에 풀 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