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정의(4)
대공의 자백 이후 겨우 이틀의 시간만을 갖고 재판이 시작됨에도 중앙 유수 귀족들은 물론 변방에 명문가들까지 죄다 그녀의 마지막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시간 없고 바쁘다는 귀족나리들이 무거운 발걸음을 끌어 행차한 것은 비단 경국지색의 미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 아니었다.
황권의 교체를 눈앞에 둔 지금, 황제가 이 처형식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를 적대한 자들은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단순한 메시지.
베아트레아 대공과 슐레스비 4세가 정치적 대립관계였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황태자가 보여주려는 것은 하나, 대공마저 처형할 수 있는 자신의 확고한 권력기반을 이를 통한 과시하고 픈 것이다.
이런 자리에 섣부르게 빠졌다가 황태자의 눈 밖에 나는 것은 마땅찮은 일이다.
너무 거리가 멀어 물리적으로 올 수 없던 귀족가문들은 제각기 대리인까지 참석시키며 황태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때 영웅이라고 추앙 받았던 베아트레아 대공이 역모라니. 세상사 모르는 일이네요.”
“그 잘난 외모로 황제 폐하를 현혹시켰다지 않소? 응당 받아야 할 대가를 받는 것이지.”
“몰락한 변두리 귀족 주제에 황권의 찬탈을 도모하다니. 쯧쯧,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과연 소문처럼 아름다울까요?”
“듣기로는 천년을 산 은여우 같다고 하더이다.”
“흐음… 제 시녀 중에 아주 예쁜 은발을 가진 아이가 있는데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 상황극 한 번 해봐도 좋겠소. 허허허.”
“근데 대공이라 해봤자 북해의 촌뜨기이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믿고 역모를…”
“듣기로는 루블 왕국과 한 통속이라던데.”
…
“씨발년놈들 더럽게 짹짹거리네. 뚫리면 주둥이고 주둥이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알아.”
사방에서 시끄러울 정도로 떠들어대는 귀족들 사이에서 휘진은 경비병의 행색을 한 채 낮게 중얼거렸다.
워낙 작은 목소리이기도 했고, 경비병의 갑주에는 얼굴을 푹 가리는 철가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는 주변까지 새어나가진 않았다.
아슌푸틀에게 받은 원격편지.
헐레벌떡 시가로 나오자마자 모두들 이 쇼킹한 사건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것이 들려왔다. 그럴만도 한 것이, 거리에는 재판에 대한 벽보로 온통 도배가 되어 있었다.
곧바로 벽보를 입수한 휘진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재판 당일 시간정지 능력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오늘 황궁에 숨어들었다.
안 그래도 이 땡볕에 갑옷 안에서 익어가야 하는 것도 마땅찮다. 그런데 이곳을 입장하는 귀족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아슌푸틀을 깎아내릴 때마다 휘진은 가슴 속에 스멀스멀 타오르는 살의를 잠재워야만했다.
무엇하나 알지 못하면서 좋을 대로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는 작자들을 보고 있자니,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죄다 모가지를 꺾어주고 싶었다.
중앙에서 대공님에 대한 취급이 박하다는 것은 아리스에게 지나가듯이 전해들은 기억이 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기 때문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자신보다 잘나가는 사람이 추락하는 것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천박한 자태들을 보고 있자니 지구나 여기나 매한가지구나 싶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대공님은 제대로 된 것은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휘진은 초조한 맘을 다잡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이럴 사람은 아니다.
애초에 이 ‘재판’도 그녀의 지시 안에 언급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당장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휘진은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어이 거기, 오두방정 떨지 말고 가만히 있어!”
‘씹새끼가.’
지나가던 귀족에게 근무태도 지적을 받은 휘진은 겨우 평정심을 유지하며 광장의 한가운데에 놓인 재판장을 내려 보았다.
◈ ◈ ◈
전례 없는 규모의 방청객을 맞이하게 된 탓에 황실 내의 임시 재판소는 공연을 위한 광장에 설치되었다.
본래 사용하던 재판장에 이 인원을 밀어 넣었다간 순식간에 압사자가 속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군악대의 공연이나 열병식(閱兵式)등을 도맡아하는 광장인 만큼, 크기는 작은 성을 가뿐하게 넘어선다.
로마의 콜로세움과 비슷하게 계단식으로 나열된 좌석에는 온갖 귀족들이 제각기 허영을 뽐내며 슐레스비 최고위 귀족의 최후를 술안주 삼을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기사들에게 인도된 채 재판대로 걸어가던 아슌푸틀은 햇볕이 드리우기 시작하는 출구에 이르자 이곳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서로 속삭이는 소리마저 거대한 굉음으로 바뀌는 이 인파 속에서 제각기 좋을 대로 떠들어대는 그들의 목소리는 죄다 뭉개져 건물 벽을 내리쳤다.
귀를 먹먹하게 울리며 난반사되는 부정적인 감정의 집합은, 도리어 아슌푸틀의 마음에 절대로 굴하지 않는 의지를 세워주는 메아리가 된다.
그녀의 모습이 이 꼴사나운 연극의 관람객들에게 닿자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났다.
“….”
“….”
“….”
모두 말을 잃는다.
인간은 인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겪게 되면 숙연해지는 법이다.
여름의 뜨거운 햇살에 눈부시게 번뜩이는 베아트레아 대공의 은발.
멀리서도 확연히 알 수 있는 미(美)의 범람은 수많은 군중마저 집어 삼켰다.
수만 쌍의 시선이 전신 곳곳을 꿰뚫는 와중에도 그녀는 의연함을 잃지 않고 포승줄에 묶여 재판대 위에 올랐다.
재판대의 정면에 위치한 자리에는 이 법정을 빙자한 도살장을 주도할 벨 공작과 황태자의 측근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죄인 베아트레아 아슌푸틀은 자리에 바로 서라.”
벨 공작의 서늘한 목소리가 증폭기를 통해 광장을 가득 매웠다.
재판과 형장이 구별되는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다.
북해를 호령했던 대 귀족이 올라가기에 너무나도 초라한 나무 재판대의 옆에는 황량한 모습의 밧줄이 걸려있다.
베아트레아에게 사형이 선고됨과 동시에 형은 집행되고, 그녀의 시체는 며칠간 대롱대롱 매달려 황궁 모두에게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귀족에게 참수형이나 총살이 아닌, 교수형이란 불명예 중에 불명예다.
중세의 교수형은 목에 줄은 매고 높은 곳에 떨어뜨려 목안의 연수를 박살내는 롱 드롭 형식이 아니다.
다리에 추를 달고 도르래로 천천히 목을 들어 올리는 형태.
체중이 전부 목 부분에 걸리면서 전신에 격통이 들쑤신다.
경동맥, 경정맥이 압박에 의해 폐쇄되고 파열됨에 따라 온몸을 발버둥 치다가 오물을 흩뿌리며 죽어간다.
소복 같은 드레스를 걸친 아슌푸틀은 그것을 무심히 눈으로 훑고 당당하게 벨 공작 앞에 섰다.
총명함으로 빛나는 두 눈엔 이미 두려움이 없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인지도 모른다.
황태자는 그런 아슌푸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아쉬움에 잠겼다.
하다못해 역모만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저 몸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시체를 간하는 것은 취향에 없으니 앞으로 요원한 일이겠지만.
“죄인 베아트레아 아슌푸틀은 황제의 은덕을 입어 대 공작의 위치에 이르렀음에도, 감히 불구대천의 주적인 루블 왕국의 수괴 루블 토프키센과 협약하여, 조국인 슐레스비 제국을 등지고 반국가적인 변란을 꾀하였다. 따라서 베아트레아 아슌푸틀의 모든 작위를 박탈하고 교수형에 처하며 3일 후 그 몸을 불살라 더러운 죄악을 정죄할 것이다.”
멀리까지 똑똑히 들리도록 또박또박한 말투로 악센트를 주어가며 말하는 벨 공작.
변호사는커녕 변론의 기회조차 없는 일방적인 선고였다.
이미 그녀가 반역을 자백한 상태에서 더 길어질 말은 없다.
그녀의 팔을 끌고 간 몰트케는 그녀의 목에 밧줄을 걸며 아주 작게 말했다.
“절대로 마법을 행사하지 마십시오. 더욱 비참하게 죽어갈 뿐입니다.”
그로서는 그녀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온정이자 조언이었다.
이 밧줄은 공군함의 마스트를 지탱할 때도 사용되는 것이다.
어중간한 마법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기에 만약 그녀가 발버둥 친다면 교수대 아래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창으로 그녀의 몸을 난자할 것이다.
누구보다 아리따운 그녀가 날카로운 창날에 꿰뚫리면서도 비명하나 지르지 못한 채 몸을 비틀며 죽어가는 모습은 몰트케로선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것을 보고 싶어 이 자리에 참석한 변태 귀족도 무수히 많겠지만 말이다.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 몰트케는 입술을 꾹 물고는 몇 발 물러섰다.
“죄인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는가?”
벨 공작의 몰트케는 그녀의 앞에 확성기를 가져다댔다.
의도는 확실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여자일지라도 이런 상황이 되면 으레 꼴사나운 목숨 구걸을 하기 마련이다.
그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것도 확실한 본보기가 될 테니 말이다.
태연하게 남의 죽음을 구경하는 이들조차 오싹해 질정도로 죽음의 공포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것이 황태자의 소망이었다.
“너희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러나 아슌푸틀이 내뱉은 첫마디는 듣는 모두가 오한을 느낄 정도로 서리어린 목소리였다.
한 차례 술렁임이 잦아들자 아슌푸틀은 말을 이었다.
“너희가 쌓아놓은 울타리 안에서, 그 추악한 권력의 굴레 안에서 너희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 말은 끝없이 이어진다.
“너희가 쌓아올린 비대한 권력의 탑 아래 신음하고, 고통에 겨워하는 인민(人民)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그 시선을 돌려본 적이 있는가?”
그녀의 목소리는 결코 이들에게 닿지 못한다.
아슌푸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은 환멸이 났기 때문이다.
언제나 고리를 물어가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부조리한 이 세계의 시스템에, 그에 편승해 만족해버리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악의(惡意)에.
“비틀린 세상에 의문을 품고 단 한번이라도 그것을 바꾸기 위해 손에 쥔 것을 내려놓은 적이 있는가?”
“당장 죄인을 처형해라!”
당황하며 벨 공작은 서둘러 지시를 내렸다.
천천히 휘날리기 시작한 마력의 파동에 주변에 사열해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제 아무리 베아트레아 대공이 우수한 마법사라 한들, 이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명백히 무리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의 곁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그 옆에 창을 쥔 채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기사들을 찔러가는 한 남자가 우뚝 섰기 때문이다.
“대공님 말씀 새겨들어라. 뼈가 되고 살이 된다.”
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휘진이었다.
시간을 멈추는 그의 앞에서 모든 물리적인 공격은 무의미했다.
한 가닥 한다는 기사들 역시 세상의 순리를 뛰어넘는 움직임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바꾸겠다!”
휘진이 던져준 보라색 마정의 핵.
3000명의 영혼과 마력이 들어간 구슬이 현묘한 빛을 발하며 아슌푸틀에게 천천히 흘러들어갔다.
어느새 구현된 그녀의 신기 ‘유리구두’가 눈부신 광채를 세상을 향해 내뿜는다.
“고개를 들어 똑똑히 보아라.”
아슌푸틀의 발끝에서 시작된 물결 같은 일렁임이, 천지를 뒤엎고 하늘마저 침범한다.
순간이나마 공선함의 출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마력의 파동은 뜨거운 여름의 태양마저 휘감아 하늘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