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정의(2)
대공은 몰트케의 안내를 받아 사문회장에 발을 들였다.
사문회에 참석해 온 솜즈 후작도, 벨 공작도, 하트펠크 상급대장도 본인의 직무가 있는 입장이다.
그런 그들이 하루 종일 아슌푸틀의 심문에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
각자의 일정 때문에 오늘 사문회장에서 아슌푸틀이 마주하게 된 이는 벨 공작뿐이었다.
은테 안경을 쓰고 뻐끔뻐끔 담배를 피던 벨 공작은 손짓으로 아슌푸틀의 자리를 안내했다.
“댓바람부터 유난이군.”
“식사는 하셨소?”
“일 없네.”
공연히 건네는 말에 대충 대답한 아슌푸틀은 그와 마주한 의자에 앉았다.
등을 제대로 기댈 수도 없게 만들어진 딱딱한 나무의자는 앉아 있는 것만으로 피로가 누적되는 기분이 든다.
“그럼 곧바로 시작하겠소.”
테이블 위에 서류를 정리해가며 입을 여는 벨 공작이지만 아슌푸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서류 위에는 어제와 똑같은 자료가 정리되어있을 것이고, 벨 공작은 의미 없는 질문을 끝없이 던지며 자신의 정신을 살살 긁어낼 것이다.
“할 말이 있네.”
벨 공작은 황태자와 가장 가까운 인물.
사실상 이 사문회를 진행하고 관리하는 것도 모두 그의 손에 달린 일이다.
따라서 아슌푸틀은 무의미한 문답을 그만두고자 벨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의미심장함이 묻어나왔는지 벨 공작도 별다른 만류 없이 아슌푸틀을 바라보았다.
“말하시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공과 이 몸 둘뿐이지. 황태자께서는 이 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전하께선 슐레스비 제국의 안녕과 안보를 위해 언제나 멸사봉공하시는 분이오. 대공의 저의를 모르겠소.”
그녀는 테이블을 손톱으로 두들기며 벨 공작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뻔한 수작을 부리며 모르는 척 할 텐가? 이래서야 끝이 없네. 내 발언이 이곳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싶네.”
벨 공작은 그 속내를 살피듯이 둥그런 안경너머로 아슌푸틀을 유심히 지켜봤다.
적어도 6개월 정도는 계속해야 된다고 생각했던 헛짓거리가 생각보다 빠르게 대공의 초조함을 유도한 것일까?
그녀의 정치적 기반인 슈펜하우져가 난리가 나고, 아슌푸틀은 북해의 유력 가문들로부터 신임을 잃었다.
별 다른 대책이 없는 이 상황에서 초조해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나가라.”
벨 공작이 박수를 치며 말하자 구석에서 사문회를 기록 중이던 서기가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며 밖으로 나섰다.
이로서 완전히 둘이 된 두 사람.
“말해주게. 그대들이 원하는 답과 내가 양보할 수 있는 답, 그 절충안을 찾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일 테니.”
이런 정치적인 눈치싸움에서 먼저 고개를 숙이고 화평을 제안하는 것은 초조함을 드러내는 반증이다.
즉, 다소 손해를 보는 제안에도 한 발 더 양보하겠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깔려있다.
“황태자께서는 충성의 증표를 원하시오. 그간 북해는 슐레스비 제국의 비호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방만을 누려왔소.”
루블 왕국과의 전쟁에서 북해를 방패막이 삼더니 전쟁이 끝나고 나니 북해를 방치하다시피 한 중앙의 귀족들이 할 말은 아니었다.
당장 3대 가문이었던 엠버 카친만 해도 전쟁 중 중앙의 지시로 무리할 정도로 채광시설을 확장했다. 허무하게도 곧 휴전이 선언되었고 카친은 그 많은 설비를 지원 하나 없이 고스란히 유지 보수해야만 했다.
수많은 북해의 가문들이 다들 비슷한 처지였다. 중앙의 무리한 요구에 희생되었지만 그 어떤 보상이나 보호도 받지 못했다.
아슌푸틀이 대공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그들의 자멸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찡그려지는 아슌푸틀의 표정을 보며 이미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벨 공작은 뻐기는 말투로 하나씩 황태자의 명령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하나, 슈펜하우져의 독자적인 주폐 ‘백금화 개혁안’을 완전 철폐하고 백지화하시오. 제국에 화폐는 두 가지나 필요하지 않소. 오히려 인가받지 않은 여러 종류의 화폐는 북해의 장기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불필요하오.”
“그 점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네. 그대 역시 알고 있겠지?”
“위폐 건이라면 알고 있소. 그러나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조 역시 필요하오.”
아무런 의사표현 없이 가만히 있는 아슌푸틀을 보며 벨 공작은 소소한 승리감에 젖어 두 번째 조항을 말하기 시작했다.
“둘, 슈펜하우져에 편제된 공군함대를 해산하고 그 지휘권을 중앙 제국의 하트펠크 상급대장에게 위임하시오. 앞으로 귀공의 영토는 체계적인 군사관리 하에 슐레스비 제국의 전초기지로 거듭날 것이오. 이는 비단 슈펜하우져의 전투력을 보강하는 것 뿐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혐의를 쓰고 있는 귀공의 혹시 모를 반기(反旗)를 감시하기 위함이오.”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횡포중의 횡포이다.
아무리 슈펜하우져가 제국령이라 해도 사병의 해산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벨 공작은 마지막 하나의 조항을 내세운다.
이것으로 베아트레아 대공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독립권은 무산되고 사실상 제국 중앙에 복속된다.
“셋,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를 슈펜하우져의 총무경으로 임명하시오. 앞으로 북해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행사는 중앙과의 협의를 거쳐 이루어질 것이오.”
벨 공작의 말을 쉽게 하자면,‘나는 네 팔다리를 자르고 밥도 내가 주고 싶은 만큼 줄 테니까 알아서 기어라’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조항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아슌푸틀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없게 된다.
그녀의 위상은 북해를 아우르는 실세에서 그저 성내에 예쁘게 장식되어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인형정도로 격하될 것이다.
물론 벨 공작도 그녀가 이런 터무니없는 조건들을 전부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리한 요구를 해 놓아야, 중간을 찾아도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법.
그는 베아트레아 대공의 얼굴이 수치로 일그러질 것을 기대하며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아슌푸틀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고요한 가운데 박력이 흘러나온다.
“터무니없다, 생각하시오?”
“그대라면 이러한 조항을 받아들일 수 있겠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소?”
그렇다 이것은 선택이 아닌 강요다.
그녀가 아무리 저항하려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려했다 한들 언젠가는 받아들였어야하는 일이었다.
아슌푸틀에게 아무런 대책이 없었더라면.
“그대들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권력? 재력?”
“따로 말할 필요가 있겠소? 제국을 향한 올곧은 단충(丹忠)이오.”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역겨운 벨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슌푸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쩐지 비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갈한다.
“자백하고 싶네.”
“뭐라 하셨소?”
다시 고개를 치켜들고 청묘한 하늘색 눈을 번뜩이는 아슌푸틀은 한 치의 위축됨도 없이 말을 이어갔다.
“슐레스비 제국의 개국과 함께 섰던 정의와 신념은 죽었네. 헝겊같이 껍데기만 남은 제국을 차지하는 자들은 지푸라기 아래 기생하는 좀 벌레들뿐이지.”
“그게 무슨…?”
“나의 조국이야 말로 가장 자랑스럽다 서슴없이 말할 수 있던 영광의 시기들이 끝나버렸네. 성군(成君)이 있었고, 성웅(聖雄)이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말을 삼가시오! 베아트레아 대공!”
묵은 것을 벗겨내듯이 아슌푸틀은 그간 속에서 끓어오르던 원념을 고스란히 벨 공작에게 토해내고 있었다.
“위정자의 탈을 쓴 천박한 도당(徒黨)들이 그들을 위한 법을 세우고 그들을 위한 정의를 세운 채 열변을 토하는군. 보라! 이토록 위대한 도리가 이곳에 섰노라! 자랑스럽도다! 모든 질서와 규율이 평등한 저울 아래 공정하노라!”
숨 쉴 틈도 없이 쏘아붙이는 아슌푸틀의 기세에 벨 공작은 반쯤 질린 얼굴로 수염을 푸들거렸다.
기실 그녀는 자폭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평정을 잃고 그가 쳐 놓은 덫에 고스란히 걸려든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그 열의와 위압감에 벨 공작은 한 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비겁자이며 역시 무수한 생명을 앗아간 약탈자일세. 그럼에도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 알고 있네.”
“몰트케! 이 자를 당장 체포하게!”
“비틀린 세상을 바로잡고 정이의 역사를 새로이 써내려가는 것. 그것이 나의 의무이자 짊어져야할 과업이네.”
문이 열리며 혼란스러운 표정의 몰트케가 들어와 아슌푸틀의 양팔을 붙들었다.
“찬탈(簒奪)을 죄악이라 생각하나? 끝없이 답습되어가며 깊어지는 욕망의 고리야 말로 더욱 깊은 원죄(原罪)일세. 그대들이 파먹고 살던 시체가 끝내 불타 사라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도록 하게나.”
“당장 끌어내어 지하에 가둬라. 이틀 뒤 곧바로 재판에 들어갈 것이다.”
발버둥 없이 순순히 끌려 나가는 아슌푸틀을 바라보며 벨 공작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황태자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 ◈ ◈
이른 아침부터 방 앞에 대기하고 있던 벨 공작으로부터 보고받은 황태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모를 시인했다고?”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전개에 황태자는 나지막이 신음하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곧바로 크리스털 글라스에 주홍빛 술과 얼음을 채운다.
본래 황태자는 베아트레아의 권력을 남김없이 빼앗고 비참한 꼭두각시로 살아가게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난 3년간 더욱 아름다워진 그녀를 보게 되자 생각을 바꾸었다.
그 아름다움은 마냥 망가지게 두기 아깝다.
자신의 옆에 놓고, 온정을 구걸하게 해야 그녀를 향해 쌓아왔던 콤플렉스와 열등감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데 베아트레아의 자폭 발언은 상정 외였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언제나 이득을 강구하는 전형적인 정치가이다.
근데 어째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틀 뒤에 재판을 열기로 했나?”
“그렇습니다. 전하.”
아무리 황태자라도 역모와 조국을 배반한 베아트레아 대공을 사면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궁중의 법규는 한 개인이 손쉽게 바꾸어 낼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작위와 재산을 몰수될 것이며,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는 가족까지 찾아내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꼭 손에 넣고 싶었던 유리 장식이 눈앞에서 박살나는 기분이다.
그것도 힘 조절을 잘못해서 말이다.
“재판장에 최대한 많은 귀족들을 방청객으로 들이게.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한 본보기라도 보여주어야지.”
약간의 낙담을 감춘 채 황태자는 명령을 내렸다.
자신의 눈에 엇나갈 경우, 대공이라도 얄짤 없이 숙청의 칼날이 떨어진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
아무래도 이번 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 이것뿐인 모양이다.
“돌아가 보게.”
“네.”
공작이 방을 나서자 유리가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