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121화 (121/154)

121화 피학 속에 피는 꽃(4)

분명 되도 않는 논리로 이겨먹으려 들거나 협박을 할 줄 알았던 휘진은 무척이나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 것이다.

“나도 실제로 해보는 건 처음이라 좋을 줄 알았는데. 그냥 불쾌하기만 하네.”

“뭐…뭐…”

뭐야?

갑자기 이렇게 사과를 해버리자 당혹하는 아나스타샤.

더듬거리는 말은 완성되지 못하고 고장 난 라디오처럼 더듬거린다.

이런 선택지는 애초에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많이 무서웠어? 아샤.”

휘진은 우두커니 서 있는 아나스타샤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끌어 안아주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상냥하게 뒷머리를 쓸어준다.

갑자기 이런 온도차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원망과 투정보다, 가장 먼저 마음 끄트머리를 비집고 나온 감정은 다름 아닌 설움과 안도였다.

“나빴어! 정말 불안했단 말이야.”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리는 아나스타샤를 휘진은 다정하게 위로하며 천천히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저 육욕에 찌든 탐욕어린 관심이 아닌 푸근함.

목덜미를 천천히 핥아가는 혓바닥의 감촉에 아나스타샤는 작게 탄식은 내뱉었다.

낯선 것에 대한 불안감과 수치심, 거기서 받은 극한의 스트레스가 휘진의 사과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나스타샤가 멍청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흔하디흔한 기대치 위반 효과였다.

테러범들에게 붙잡힌 인질범들이 테러범들이 베푼 사소한 온정을 기억해 그들을 적극 변호하는 것처럼.

철면피에 파렴치한으로만 알고 있었던 휘진이 건넨 따스한 위로와 사과는 아나스타샤의 마음을 덧없이 흔들었다.

휘진이 의도한 것도 이것이었다.

군대에서 휘진을 유달리 싫어하던 선임이, 여자 친구에게 차여 크나큰 상심에 빠져있는 자신에게 물려주었던 디스 한 까치.

저도 모르게 선임을 껴안고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던 기억이 있다.

뭐,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이세계라도 다 비슷한 것이니 말이다.

몇 번이나 연거푸 들이킨 도수 높은 술이 그녀의 명석한 판단을 흐린 것은 덤이었다.

예상대로 아나스타샤는 옷을 벗기는 휘진의 손길에도 잠자코 동조했다. 특히 어깨끈을 풀 때는 적극적으로 팔을 들어주기도 할 정도로.

“아샤, 먼저 씻을래?”

“응.”

진한 키스가 끝나고 어느새 알몸으로 변한 아나스타샤.

빨갛게 부은 두 눈 위에 가볍게 키스하자 싫은 듯이 몸서리친다.

겉으로는 그렇다 쳐도 느슨하게 풀린 입꼬리는 이미 그녀가 휘진의 술수에 휘말렸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휘진은 아나스타샤의 뒤를 쫓아 욕실로 들어갔다.

◈          ◈          ◈

오늘 저녁의 사문회까지 끝낸 아슌푸틀은 비로소 그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구전이다.

좀처럼 자신이 허점을 드러내지 않는 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니 정신적 피로를 누적시켜 실언을 유도하는 것이다.

머리가 굉장히 좋고 그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는 아슌푸틀로서는 그들의 작태에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시간을 끌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것인지 몸소 보여줄 예정이기에.

북해 남부에 심어 두었던 충신 펠릭스로부터 관함식(觀艦式)에 대한 보고를 받고 원격 편지를 내려놓은 아슌푸틀은 피로에 살짝 끝이 까진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하음…”

원래는 이럴 때 술이 있어야 할 터인데.

항상 인간의 한계치에 가까운 업무량을 짊어지느라 만성 두통을 앓고 있는 아슌푸틀은, 자신의 유일한 특효약을 들여 올 수 없다는 것이 마지막까지 한탄스러웠다.

고작해야 술인데 말이다.

도수 높은 술을 가져다 준다한들 여기에 불이라도 지르겠는가?

펠릭스와 한 쌍을 이루는 편지를 내려놓은 아슌푸틀은 잠시 고민하더니 또 다른 원격 편지 한 장을 꺼냈다.

그녀가 객실에 밀반입한 원격편지는 총 세 쌍.

하나는 펠릭스.

하나는 북해의 내무경 겸 타타라.

마지막 하나는 휘진과 연락하기 위한 것이다.

고운 가죽 커버에 명함처럼 꽂혀있는 빳빳한 종이를 매만지며 아슌푸틀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보고 싶구나.”

망연히 중얼거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듣는 귀가 없나 주위를 살피는 아슌푸틀.

연심(戀心)이라는 것은 마치 불꽃과 같아서 혼자서 불쑥 불쑥 마음을 뚫고 저 혼자 타오르곤 했다.

오늘 낮 그와 맞닿았던 입술이 괜스레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아슌푸틀은 아이처럼 침대에 엎드려 발을 동동 굴렀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던 것일까?

본격적인 성교도 아니고 입으로 그의 물건을 먼저 탐하다니.

베개의 얼굴 하관을 묻은 아슌푸틀의 콧김이 새어나온다.

어느새 팬티를 젖히고 들어간 두 손가락은 슬릿 사이로 툭 튀어나온 콩알을 조심스럽게 돌리고 있었다.

한숨을 흉내 내며 달아오른 숨결이 베개를 미지근하게 덥힌다.

한참을 꼼지락 거리던 아슌푸틀은 이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빼내었다.

“이게 무슨 꼴인지…”

사랑은 사람을 둔하게 만든다 했던가.

작금의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지도 못한 채 풋풋한 봄바람에 휘둘리는 예전의 자신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의해 죽었고, 또 죽어나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그를 떠올리며 자위나 하려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눈앞에는 한 장의 편지가 있다.

아주 조금 그에게 기대는 것 정도는 허락해도 되지 않는 걸까?

아슌푸틀은 특수한 잉크를 내장한 펜을 손에 쥐고 편지지를 응시했다.

원격편지는 귀족들의 전유물이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아주 비싼 값을 자랑한다.

이런 비싼 물품을 순전히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는 사적인 일에 사용하는 것이 조금은 걸렸지만 아슌푸틀은 이내 글을 써내려갔다.

[그대는 뭐하고 있는가?]

펜촉이 종이를 긁어내는 소리와 함께 유려한 글씨가 새겨졌다가 가라앉는다.

공연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은근한 긴장감에 편지지를 노려보고 있던 와중 삐뚤빼뚤한 휘진의 글씨가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그는 상당한 악필이었다.

[너 생각]

“후후.”

아슌푸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려진다.

온갖 책략이 어린 문책에는 철저한 무표정을 유지하지만, 이런 휘진의 장난스러운 답장에는 절로 표정이 밝아진다.

실로 만점인 답변에 뿌듯해하며 아슌푸틀은 또 다시 무언가를 사각사각 써내려갔다.

[혼자 있기에 지루하지는 않은가?]

거의 바로 왔던 답변에 비하면 이번엔 답장이 또 느렸다.

[아슌푸틀 생각하고 있으면 참을 만해. 무슨 일이야?]

[별 일 없네. 언제나 연락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지 확인 차 연락했다네]

[에이,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한거구먼]

[그 또한 사실이라네]

여지없이 정곡을 찔러오는 휘진의 애교에 아슌푸틀도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생각하며 자위를 하려 했는데 여기까지는 말해 줄 필요 없겠지.

아슌푸틀은 쑥스러운 미소를 감추며 휘진과의 문자 삼매경에 빠져갔다.

◈          ◈          ◈

“조금만 힘내면 될 것 같은데?”

“하으으으읏…!!!”

태연하게 아슌푸틀과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휘진은 아나스타샤를 또 한 번 조교 중이었다.

상냥하게 그녀를 씻기며 성욕을 자극하다가 다시 능욕코스에 돌입한 상태.

발정 상태가 되어버린 아나스타샤는 휘진의 발치에 쭈그려 앉은 채, 가랑이를 앞으로 벌려 보인 자세로 스스로의 클리토리스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 목적은 반지를 되찾기 위한 것.

갑자기 상냥해진 휘진의 태도에 머뭇거리며 앞구멍 플러그를 제거해 줄 것을 요청하던 아나스타샤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이제… 정말 힘 못주겠어… 당신이 빼줘…하읏…”

호리병 모양의 향수 공병을 보지의 힘만으로 빼낼 것.

마치 알을 낳는 암탉처럼 앞구멍을 움찔거리는 아나스타샤는 자신이 얼마나 천박한 자태를 보이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일면식도 없는 남자들에게 천박한 몰골을 보인 직후라 수치 플레이에 대해 내성이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없어. 아샤의 절정 보지의 힘은 공병 정도는 충분히 밀어낼 수 있을 걸?”

자신의 치태가 적절하게 배치된 스마트 폰에 고스란히 촬영되는 것도 모른 채.

아나스타샤는 어떻게든 공병을 빼내기 위해 절정을 향해 달려 나갔다.

“하으으그그그극…♡♡♡”

애매하게 주저앉은 백 브릿지 자세를 유지하던 아나스타샤의 허리가 활처럼 펴진다.

그 겨를에 애액과 정액에 퉁퉁 불어터진 보지가 휘진을 향하는 것은 덤이다.

생각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정액 마개 역할을 수행중인 공병이 빠질 듯 말 듯 움찔거리는 모습이 상당히 선정적이었다.

반지를 빼내는 것이 목적인지, 아니면 쾌락을 탐하는 것이 목적인지.

당최 모르게 되어버린 아나스타샤는 빳빳하게 굳어버린 허벅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는 애써 부정하는 듯 했지만 그녀의 신체는 이미 극도의 발정상태였다.

평민 벨보이의 정액을 입으로 받아내고, 음란한 모습의 비소를 공공장소에서 드러내는 것만으로 비참할 정도의 성욕을 느껴 버렸다.

아까부터 질 내부가 너무나도 간지러워서 지금 당장이라도 눈앞에 남자에게 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에는 간혹 눈길만 줄 뿐.

종이에 무엇인가를 써내려가며 거의 무관심한 태도를 일관했다.

역설적인 것은 그런 그의 태도에 자신의 신체가 흥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프라이드가 조각조각이 날 때마다 이 육체는 좀 더 그를 원한다.

조금 더 괴롭혀 주었으면 싶다.

조금 더 굴욕을 주었으면 싶다.

어딘가 망가져버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의 파멸적인 상상이었다.

“당신이… 매일 하던 것처럼 빨리 쑤셔주면 되잖아앗…!!!”

“그것도 제대로 못 빼는 허벌 보지는 내가 사용하기엔 조금 아까운 것 같아서 말이야. 빨리 안한다면 또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 빼달라고 할거야.”

“하우우우웃…♡♡♡”

다른 사람의 앞에서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보지를 벌리고 공병을 빼내게 한다니.

그 천박한 상상만으로 아나스타샤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쾌락을 느꼈다.

이런 것 무언가 잘못되어있다.

어디서부터 되돌리면 좋을지 이젠 짐작조차 가지 않을 정도로.

“할게… 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러지마… 부탁할게…”

안타까운 애원의 목소리가 욕실에 반사되어 아나스타샤의 귓가를 파고든다.

스스로 듣기에도 시럽처럼 농염히 끈적거리는 그 목소리는 이미 성적으로 협박당하는 피해자의 것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신에게 떨어질 모멸의 꿀물을 기다리며 살랑살랑 교태를 부리는 성노예의 것이다.

“이게 네 솔직한 모습이었구나? 지금까지 참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와, 언제 봐도 젖탱이가 무슨 젖소 같네.”

“흐으으윽!!!”

휘진은 드디어 종이를 내려놓고 아나스타샤의 가슴을 뺨을 치듯 찰싹찰싹 두드렸다.

평소라면 이토록 모욕적인 언사에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성적인 모욕이 끝내 자신에게 상쾌한 해방감을 안겨준다는 것을 깨달은 아나스타샤는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위를 계속해갔다.

“네 본 모습은 귀족 출신의 현모양처 따위가 아니야.”

휘진이 내린 바지를 내리자 우뚝 솟아오른 휘진 주니어.

욕실의 조명을 역광으로 둔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유독 매섭게 보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