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피학 속에 피는 꽃(1)
허리 움직임에 하얀 속살을 꿈틀거리며 괴로워하는 엘프 역시 강제로 다량의 마약이 주입되어 있었다.
동족의 목숨으로 협박을 하자 기꺼이 자신의 팔에 투명한 약물을 밀어 넣었다.
아마도 이 성교가 끝나면 이 엘프는 평범한 생활을 향유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 마약과 함께 했던 섹스가 머릿속에 맴돌며 그녀를 폐인으로 만들 테니 말이다.
“적당히 네가 알아서 해도 되잖아?”
“그녀는 이용할 가치가 충분한 포로입니다.”
“그렇지. 베아트레아 대공과 대화할 창구가 되어줄 테니까.”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였지만 토프키센은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문답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더욱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부터 네가 인간사에 그렇게 관심을 가졌어? 너는 그냥 집 지키는 개잖아.”
시조와의 약속을 고지식하게 지키며 언제나 루블 왕국의 수호신으로 군림했던 토렌스.
토프키센은 그런 그를 개에 비유했고, 토렌스는 딱히 그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블의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왕족 간의 서열싸움에는 끼어들지 않는다.
이 단순한 두 문장의 약속에 의해 이토록 긴 시간을 묶여 살았으니 말이다.
“설마 저 여기사가 마음에라도 드는 거야? 네게 안겨줄까?”
“명령이라면 따르겠지만…”
“농담이야 농담. 쉬펜 아리스는 베아트레아 대공의 오른팔이지.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꽤나 오랜 시간 함께했던 절친한 벗이기도 하고. 그런 그녀에게 필요 이상의 위해가 가해진다면 베아트레아는 격분할 거야.”
“그렇다면 왜 슈렐리아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단순히 대화의 시도라면 그녀의 소재를 루블 왕국이 확보하고 있다는 전언만으로 충분할 텐데.”
토렌스가 보기에 토프키센은 역사상 손꼽힐 광인이었다.
타인을 파멸시키고 분쇄해갈 때 흘러나오는 피와 같은 절망을 누구보다 깊게 탐닉하는 자.
사실 질문을 하는 이 순간까지도, 질문이 무의미하다고 반쯤은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베아트레아 대공이 포로 교환에 응한다면 내가 아리스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베아트레아는 협상에 대답을 해올 거야. 아리스에게 숨이 붙어있기만 하면 말이지. 반대로 만약 그녀가 이 대화 자체를 거부한다면, 어차피 무슨 짓을 해도 괜찮잖아? 전부 여흥이야, 여흥.”
엉성하고 허술한 논리이다.
이해타산보다는 감정적인 충동이 채찍질한 하책(下策)에 불과했다.
그러나 토프키센의 진정 무서운 점은 감정의 충동과 본능이 이루어낸 계획이 모두 상황 좋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에 있었다.
휫센 상단을 선동해 북해의 경제적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으며, 타타라의 암살이 보기 좋게 실패했다 한들, 어쨌든 슈펜하우져의 인재들의 목숨을 대거 앗아갔다.
거기에 때마침 중앙에 불려가게 된 대공까지.
모든 상황이 토프키센을 위해 준비된 것만 같았다.
“그래도 한동안은 선을 넘지 않게 주의시켜. 만에 하나라는 것은 언제나 있으니까.”
토렌스에게 짧은 주의을 남긴 토프키센은 암컷 엘프의 몸속에 정액을 싸질렀다.
몸을 퍼득 뛰며 쇳소리를 내던 엘프는 지나친 투약에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절명했다.
핏발이 잔뜩 선 눈이 뒤로 뒤집어진다.
“하여간 엘프 새끼들은 근성이 없어.”
기분 잡쳤다는 식으로 침대에서 엘프를 걷어차낸 토프키센은 마치 카펫을 밟듯이 그 시신의 위를 밟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다 아름다운 달빛을 보며 악상에 잠긴 작곡가처럼 황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탓에 추락사한 시체를 늘려가는 절벽 위의 꽃이야.”
세상에는 남자를 파멸로 몰고 가는 여자가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파멸적인 매력으로 주위를 홀리고 종국에는 상대방을 가장 비참한 최후로 몰아넣는 운명을 지닌 여자.
그런 사람을 손에 넣고 제 맘대로 굴린다면 과연 자신은 어떻게 될까?
토프키센은 그 답이 알고 싶었다.
토프키센은 운명론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베아트레아 대공을 떠올리자면 언제나 숙명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내가 가져야겠어.”
그간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해 왔던 토프키센이 처음으로 정성들여 망가뜨리고 싶은 장난감이었으니까.
◈ ◈ ◈
“아 거시기 졸라 아프다.”
화장실에서 피나는지 확인해 봤는데 다행히 유혈상태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원래였더라면 대공님을 보고 실컷 예열한 다음에 집에서 기다리는 아나스타샤에게 모든 울분을 풀어줄 계획이었다.
그러나 난데없는 로얄 사까시를 받은 지라 지금 당장은 성욕해소가 급하지 않다.
이대로 가기에도 심심해 휘진은 아나스타샤에게 줄 선물을 사 가기로 했다.
남은 이틀간 뻔한 루트로 갔다가는 루블 왕국 체류 시절 때처럼 원시인같이 섹스만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한다.
예전엔 그것만으로 감지덕지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역시 사람은 손에 든 게 많아지면 퀄리티를 추구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들린 곳은 창관이었다.
지리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길을 물어물어 가까스로 도착했다.
“와우.”
이세계에서 창관을 찾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 규모와 생각보다 적나라한 구조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북해에도 창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대로변에 떡하니 있지는 않았다.
어떻게 만든 것인지 궁금해지는 장밋빛 벽돌로 외곽을 장식한 건물에선 한 낮임에도 불구하고 새빨간 불빛들이 커튼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다.
문 앞에 서기만 해도 짙은 분 냄새와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옷걸이가 별로여서 그렇지 휘진이 입고 있는 양복은 북해 최고의 디자이너가 재단한 것이다.
지금껏 많은 손님을 상대해 온 도어맨은 한차례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휘진의 신분을 예측했다.
동부 제도의 귀족, 혹은 상인. 어쨌든 돈 많은 사람이다.
“여기 여자 말고도 살 게 있어?”
어차피 훔친 돈인 금화 한 장을 쥐어주며 말하자 도어맨은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는 입을 틀어막으며 손을 싹싹 비볐다.
“혹시 남자를 찾으시는 거라면…”
“아니 남자 말고. 옷을 좀 사고 싶어서.”
“옷이라 하심은… 방금 벗은 따끈따끈 한 스타킹 같은 거 말씀이십니까? 아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생긴 건 험악한 스킨헤드인데 뭘 좀 아는 친구다.
금화를 팁으로 준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보다.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창관에 들어가자 좁은 복도 사이사이에서 야시꾸리한 옷을 입고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한 창녀들이 휘진을 반겼다.
“신사님 함께 술 한 잔 어떠신가요?”
“대륙 남부에서만 전해져오는 춤을 보고 싶진 않으신가요?”
교태어린 요염한 목소리로 은근한 터치와 함께 유혹하는 여인들.
꽃밭이라는 게 이런 거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돈도 많겠다, 예전이었으면 ‘얘들 다 내 방으로 불러와!’라고 호기롭게 외쳤겠지만 이세계 탑 급 미녀들을 섭렵해온 휘진으로서는 무덤덤할 뿐이었다.
목적이 목적인 이상 휘진은 얼굴 몸매에 상관없이 여자를 골랐다.
“얘가 입는 옷 싹 다 벗겨서 포장 좀 해줘. 아 힐도 내놔.”
“어머, 성질도 급하셔라.”
수많은 동료들 중에 유일하게 간택 받은 아가씨는 자랑스럽게 빨간 원피스 자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왔다.
하지만 도어맨의 설명에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민다.
“여자 사러 왔으면서 간만 보고 가는 건 뭐람? 물건이 자신 없으신가?”
비싼 옷이라며 툴툴거리는 아가씨에게 손에 집히는 대로 금화를 쥐어주자 곧장 옷을 벗어 곱게 접어주었다.
갑자기 펼쳐진 스트립쇼에 꺄르륵 거리는 주변 창녀들의 목소리. 머리가 징징 울릴 정도이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마지막으로 팁을 찔러주자 도어맨은 조상님이라도 영접하듯 깍듯이 고개를 숙여 마차를 타는 휘진을 배웅했다.
◈ ◈ ◈
“아샤. 나 왔어.”
오후 6시.
저녁을 준비하는 것인지 부엌 쪽이 부산스럽다.
대꾸도 않는걸 보니 아직까지도 삐져있는 모양이었다.
“서방님이 부르면 나와서 인사해야지.”
“누가 누구 서방인데!”
빼액 소리를 지르며 아나스타샤는 불만스러운 걸음걸이로 쿵쿵 다가왔다.
미카엘이 돌아오기까지 일체 의복의 착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아나스타샤는 알몸이었다.
모델 워킹에 버금가는 걸음걸이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가슴은 언제 봐도 일품이다.
“잘 끼고 있나 볼까?”
휘진은 그런 아나스타샤의 분노를 묵살한 채 손을 뻗어 아나스타샤의 밑 부분을 만졌다.
매끈매끈해진 빽보지 사이에 삐쭉 고개를 내밀고 있는 향수 공병이 만져진다.
“말은 잘 듣고 있구먼.”
“…빨리 빼주기나 해.”
입술을 삐죽 내미는 아나스타샤에게 옷이 든 가방을 던져주었다.
방금 창녀가 벗은 따끈따끈한 방어구 풀셋이다.
“저녁 준비는 그만하고 최대한 예쁘게 차려입고 나와. 오늘은 밖에서 외식이니까.”
“지금?”
“그럼 미카엘 있을 때 갈까?”
“잠시만 기다려.”
휘진에게서 벗어난 아나스타샤는 방문을 닫고 자신의 배를 매만졌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도합 7번 사정 분량의 정액이 배 속에서 출렁거린다. 향수 공병은 생각보다 완벽하게 마개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변태적인 행위에도 인간은 적응하기 마련인 것일까? 아나스타샤는 문득 신기해졌다.
게다가 이 안엔 자신의 소중한 남편인 미카엘의 반지가 들어있다.
“지금 내가 뭘 하는 건지…”
처음엔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겪어본 바에 따르자면 그의 요구만 들어준다면 약속은 칼같이 지킬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 행위가 과격해지고 거칠어짐에 따라 아나스타샤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과연 예전과 똑같이 돌아갈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을 내려놓고 아나스타샤는 휘진이 건넨 원피스를 바라보았다.
“미친놈… 이딴 걸 어떻게 입으라고.”
포인세티아처럼 새빨간 원피스는 여름의 정열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색이다. 원단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노출도.
간신히 가슴을 가린 채 V자를 그리며 배꼽까지 떨어지는 앞트임 + 오픈 백 형식.
도대체 뭐라 명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옷이다.
목 뒤로 넘기는 어깨끈이 아니라면 걷는 것만으로 훌러덩 벗겨지고 말리라.
거기에 치맛자락은 무슨 속옷이라도 되는지 무릎 위를 훌쩍 넘겨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속옷이 그대로 보여 질것만 같았다.
“휴우…”
한숨을 쉰 아나스타샤.
거울을 보니 그 몰골은 더 처참했다.
원래의 옷 주인과 체격은 비슷하다지만 훨씬 훌륭한 미드를 갖고 있는 아나스타샤의 피지컬 탓에 가슴골은 물론 가슴 밑살까지 노출된다.
오랜만에 화장까지 풀 메이크업으로 맞춘 아나스타샤는 원피스와 한 쌍으로 보이는 붉은 힐을 신고 계단을 내려갔다.
“좋다.”
아나스타샤가 계단 위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보며 휘진은 기립박수를 쳤다.
“팬티 입고 나온 건 아니지?”
“입었는데?”
“응, 다시 벗어~”
아무 말 없이 깊은 빡침을 숨기며 주섬주섬 팬티를 벗는 아나스타샤.
이렇게 보니 역시 아나스타샤는 여배우 같은 미인이다.
아까 아가씨가 입었을 때는 그냥 창녀들의 코스튬 같았는데 그녀가 입으니까 바닥에 레드카펫이 깔린 것 같은 환영이 보인다.
“자 그럼 가보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