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다시 만난 귀족영애(3)
“이러지마 정말.”
아나스타샤는 황급하게 옷을 여미며 뒷걸음질 쳤다.
눈에는 경계의 기색이 아른거린다. 하지만 휘진은 별로 사정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제 와서 정의로운 척하기도 그렇고 적당히 그답게 좋을 대로 쓰레기 짓을 하는 게 훨씬 편하다.
“왜 그래? 어차피 미카엘이랑 보다는 나랑 훨씬 많이 했을 것 아니야.”
루블 왕국에서 갇혀있던 몇 개월간 유흥거리라고는 아나스타샤와의 비밀 섹스 정도였기 때문에 단순히 교합 수만으로 따지자면 가장 많이 살을 섞었을지도 모른다.
“나… 결혼했어. 이제 당신이랑은 하면 안 되는 거야.”
“하면 안 되는 거니까 더 하고 싶은 거지.”주춤주춤 물러나며 애원하는 아나스타샤의 모습에 휘진은 의아했다.
지금쯤이면 커피 잔으로 머리를 내려찍으려고 할 타이밍이라 방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오호라.’
지금의 아나스타샤는 그때와는 다르다.
남은 것은 더럽혀질 몸뚱이 뿐.
앞으로 피폐해져갈 나날에 가을철 모기처럼 독이 바싹 올랐던 그녀는, 최근에 느꼈던 소소한 행복들에 의해 부드러워졌다.
유약해졌다.
불과 며칠의 평화로운 생활이 그녀를 여기까지 감화시킨 것이다.
“앉아.”
“싫어.”
“셋 샐게?”
“…개새끼.”
긴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손에 몰래 들었던 컵을 내려놓고 휘진의 옆에 앉았다.
그나저나 커피 잔 손에 들긴 했었구나.
아직 완전히 약해졌다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늘 미카엘도 안온다면서 뭐 어때?”
“당신은 여전히 구제 불능의 쓰레기구나.”
“이제 알았어?”
휘진은 아나스타샤의 동그랗게 말린 머리를 풀었다.
묶여있던 머리가 풀려나며 그 안에 돌돌 감춰져 있던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예전처럼 최고급 향수 냄새가 섞이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녀의 체취를 음미할 수 있었다.
“어차피 넌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해. 대신 약속할게. 이번 몇 번만 어울려주고 나면 완전히 너희에겐 손을 때기로.”
“그리고.”
유유자적 자신의 어깨에 코를 킁킁거리고 있는 휘진에게 아나스타샤가 단호히 덧붙였다.
“돈 더 내놔.”
사실 돈이라면 아껴 쓴다는 전제하에 죽을 때까지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미카엘이 뱃일을 하는 것도 쓸데없는 이목을 피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
아나스타샤가 돈을 요구한 것은 이대로 휘진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이 분했기 때문이다.
“자, 이거면 돼?”
이런 건 폼이 중요하다.
자신의 가진 무력과 재력이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조금 더 고분고분 해 지겠지.
즉시 시간 정지 능력을 활용해 각종 금품을 털어온 휘진은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놓았다.
짤그락거리며 너부러지는 가죽 주머니의 안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보석들과 골드바가 한 가득 담겨 있다.
아나스타샤는 그 연금복권 꾸러미로 손을 뻗으려 했다.
“어허.”
하지만 휘진은 보란 듯이 주머니를 다시 가로채가며 손바닥에서 위아래로 던진다.
“미카엘이 돌아오기까지 3일 이랬나? 계약 조건은 내 모든 성적 유희에 어울려 줄 것. 맹세한다면 이 주머니와 너희의 평생 안전권을 보장해 줄게.”
“어차피 방법은 이것 밖에 없는 거잖아?”
“잘 알고 있네.”
최대한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는 아나스타샤.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라고 생각한 휘진은 아나스타샤를 진정시키고 나머지 커피를 마셨다.
분노와 굴욕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아나스타샤는 아까부터 입술을 잘근거리며 이쪽을 노려보는 중이다.
“우선 밥 좀 줄래?”
◈ ◈ ◈
한참을 투덜거렸던 아나스타샤지만 휘진의 요구를 묵살했다간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
그의 지독함은 루블 왕국 때부터 잘 알고 있었기에 지하 저장고에서 채소와 생선을 꺼내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녀 고향의 전통음식인 까샤(Каша).
농어나 연어 등의 생선을 하얗고 담백하게 우려내는 아주 간단한 요리이기 때문에 그녀가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간단하게 샤워를 끝나 친 휘진은 바지만 입은 상태로 머리를 털며 나왔다.
“바닥에 머리카락 떨어지면 안 되니까 조심해 줄래?”
소리로 알았는지 아나스타샤는 여전히 요리에 열중한 채 휘진에게 경고한다.
물론 휘진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그걸 깨달았는지 그녀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행여나 못 치운 게 남으면 그이가 의심할 거야.”
“뭐 어때? 같은 검은 색인데 대충 네 거라고 퉁 쳐.”
“나는 그렇게 형편없는 머릿결이 아니니깐.”
바람피우는 남녀 간에는 이런 대화를 하는 걸까.
또 다시 휘진의 손아귀에 떨어진 충격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인지 예전과 같은 퉁명스러움을 보이는 아나스타샤.
그나저나 방생을 약속한건 맞다만 다른 남자를 ‘그이’라고 하는 호칭이 심히 거슬렸다.
“그런데 아나스타샤는 너무 길지 않아? 애칭 같은 거 없어?”
“내 애칭을 왜 당신이 부르려고?”
“효율 측면에서 구리잖아. 5글자나 되기도 하고.”
괴상하리만치 길쭉한 오이를 손질하던 아나스타샤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못마땅함과 마지못함이 섞여있지만 의외로 순순히 애칭을 가르쳐 주었다.
불법 입국자로 살아온 지금은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평안과 안위가 보전되었던 예전과 다르다.
그 간극은 그녀에게 타협이라는 어른의 필수품을 선물해주었다.
“아샤라고 불러.”
“그럼 아샤. 모처럼 내가 손님으로 왔는데 그런 식으로 요리하는 건 예의에서 어긋난다고 생각하는데?”
“또 뭔데.”
이 남자의 귀찮음은 익히 알고 있는 아나스타샤다. 24시간 발정이 나있는데다가 그 어이없을 정도의 성벽을 집요하리만치 강요한다는 점도.
그리고 지금처럼 끈적거리는 목소리로 말할 때는 반드시 성적인 무언가를 시키려 들 때다.
또 어떤 터무니없는 요구가 나올까? 제 아무리 강단 있는 그녀라 하더라도 완전히 신경을 끌 수는 없었다.
휘진은 아나스타샤의 뒤쪽에 바싹 붙어서 엉덩이를 제 물건처럼 쓰다듬었다.
여전히 관능적인 감촉이 묵직하게 무게감을 자랑한다.
아나스타샤는 이를 잘근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샤의 육체 구석구석까지 제일 잘 알고 있는 나잖아? 이런 겉치레가 무슨 의미겠어?”
“식사 준비하라면서?”
아나스타샤는 갑작스러운 추파에 모멸이 가득 찬 시선을 던졌다.
과거(라고하기에는 최근이지만)를 묻어 둔 채 미카엘과 화목한 생활을 꾸려나가던 아나스타샤에게 아무것도 아닌 듯이 엄습하는 휘진의 손길은 자신이 미카엘에게 말하지 못한 찜찜한 부분을 고스란히 드러내려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 당장 하자는 게 아니라 옷 벗고 요리하라고. 앞치마는 둘러 기름 튀면 아프니까. 난 널 애피타이저 삼아서 저기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후, 그래 당신이 그렇지 뭐.”
“여기 보고.”
가당찮은 주문을 ‘오늘 계란 프라이는 반숙으로 해줘’같은 일상대화의 느낌으로 하는 이 남자.
거기엔 이미 익숙해져있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유달리 서글펐다.
답답한 한숨을 쉬면서도 순순히 옷을 벗는 아나스타샤.
드레스는 벗어 개어 놓고 꺼림칙하다는 듯이 브라의 후크로 손을 옮기는 아나스타샤.
출렁하며 육덕진 중량감이 갑갑한 방어구에서 해방되는 장대한 관경.
가슴을 둘러싸고 있었던 와이어에 의해 눌려있는 살 자국까지 무척이나 선정적이다.
눈을 딱 감고 팬티마저 벗어던진 아나스타샤는 황급하게 순백의 앞치마로 앞을 가렸다.
앞치마는 통상 의복으로 사용하려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허점은 무수히 많다.
앞은 얼추 가려져도 옆과 뒤는 완전히 알몸.
게다가 아나스타샤는 대지의 여신처럼 풍족한 유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엉성한 위쪽 천으로 옆 가슴이 삐져나오기까지 한다.
“자, 이제 만족해?”
“응 개 꼴려.”
수치심이 죄다 안면으로 몰려버렸는지 손으로 팔랑팔랑 부채질을 하며 태연한 척 대답한다.
휘진은 의자를 끌고 와 그녀의 요리하는 뒤태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서 있는데도 안정적인 하트 모양을 그리는 순산형의 골반.
그와는 대조되게 길게 뻗은 다리는 적당할 정도의 살집만 붙어 절절한 여성미를 자랑한다.
작게 작게 사이드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엉덩이가 살랑살랑 유혹을 하는 듯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은 하지만 역시 부끄러운 듯 아까보다 훨씬 동작이 굳은 아나스타샤.
휘진은 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원래는 식사까지는 얌전히 놔둘 생각이었는데 참새는 방앗간을 지나쳐도 휘진은 벗은 여자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미카엘에게는 미안하게 됐네. 이런 맛 나는 몸을 내가 먼저 독식해서 어쩌나?”
“그 사람 이름 함부로 꺼내지마.”
“네가 뭘 어쩔 건데?”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이죽거릴 생각이었는데 당장이라도 칼로 찌를 기세로 아나스타샤의 거부반응이 나타난다.
이 정도에 쫄 거면 애초에 시작도 못했다.
“조신한 척 행동해도 요부 같이 궁댕이 흔들면서 요리하는 게. 너도 내 생각 안 났어?”
“당신을 어떻게 죽일지만… 꺄악!!!”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아나스타샤의 노출된 궁둥이에 휘진의 손바닥 스매슁이 작렬했다.
으음, 찰지구나.
농담이 아니라 정말 이렇게 찰지게 달라붙는 살결은 처음이다.
아나스타샤는 깜짝 놀란 상태로 엉덩이를 부여잡고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약점 잡힌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욕 한바가지는 쏟아줄 태세였다.
“밥은 됐어 아까 빵도 먹었겠다. 그대로 침실로 안내해.”
“…”
“알고 있지? 나는 너희를 사회적으로 죽일 수도 있고, 진짜로 죽이고 아무렇지 않게 인생을 즐길 수도 있어.”
제 분을 못이긴 것인지 빨개진 눈망울을 한 채 원한을 쏟아내는 두 눈.
휘진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악역이 된 느낌이다.
협박이 무섭긴 무서운지 반항을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물론 휘진은 둘 중 어느 것도 할 생각이 없다.
미카엘에겐 어느 정도 부채의식이 있기도 하고 아나스타샤는 죽이기엔 너무너무 아까운 미인이니까.
아나스타샤는 슬리퍼를 직직 끌며 2층에 있는 부부 침실로 안내했다.
계단을 올라갈 때 오른쪽 볼기짝에 손바닥 모양의 붉은 자국이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매우 먹음직스러웠다.
부부 침실의 근사한 목재 문 앞에 섰을 때 아나스타샤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다른 곳으로 해줘. 부탁할게.”
단순한 부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휘진은 알 수 있었다.
이 부탁은 온갖 굴욕과 부조리함을 인내한 그녀가 최후의 자존심마저 굽히며 하는 ‘부탁’이다.
이런 악한에게 저자세로 기어야 한 다는 것이 아나스타샤의 높은 긍지에 스크래치를 남기는 것이리라. 목소리가 누그러진 지금도 그 입술만큼은 꽉 깨물고 있다.
“여기가 아니라면 마당에서야. 골라 봐.”
철제 울타리로 둘러진 마당에 나가게 된다면 주변 이웃들은 물론 주변 행인들에게까지도 처참히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리라.
도리가 없다 생각한 아나스타샤는 한숨과 함께 문을 비틀어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