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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107화 (107/154)

107화 다시 만난 귀족영애(2)

밤새 나뒹굴었던 침대를 정리하는 휘진, 그 뒤로는 아슌푸틀이 완벽하게 빼어 입은 예복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한시가 급해 최대한 빠르게 움직였기에 불과 삼일 남짓에 슐레스비 황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휘진, 내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네.”

“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경거망동하지 말게나.”

“알고 있어. 내가 그 정도로 바보 일까봐?”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휘진의 손목을 꽉 붙잡은 대공은 휘진의 눈을 직시하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여기는 북해가 아니라네. 날 잡아 먹고 싶어 안달이 난 귀족만 여럿이야.”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권력자들은 권력을 잡은 순간 옹졸해지지. 그들은 손에 담긴 것이 그릇을 넘쳐난 순간 추악한 액체가 되어 악취를 뿌린다네. 고작해야 몰락 한 백작가의 여식이 대공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한 걸세.”

“꼬우면 지들도 공적을 세우던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네.”

난감한 듯이 쓴 웃음을 지은 아슌푸틀의 뒤로 휘진은 캐리어를 들고 승강장에 발을 디뎠다.

역에서 내린 휘진과 아슌푸틀을 반겨준 것은 모든 무장을 끝낸 중앙 심문회의 기사들이었다.

오후 햇살에 번뜩이는 금속의 반사광이 눈이 아프도록 위협적이다.

“예우를 갖춰 모시도록.”

말은 예우를 갖추라고 하지만 오랏줄만 없을 뿐이지 죄인을 다루는 것이나 다름없다.

명색이 슈펜하우져의 공작이라는 미들 네임을 가지고 있는 아슌푸틀을 중무장한 기사 둘이 마차로 태운 것이다.

검을 천으로 싸서 그 모습을 감춘다던가, 하다못해 극존칭조차도 사용하지 않는다.

아슌푸틀은 아무 말 없이 순순히 휘진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벌써부터 불만스러워진 휘진이지만 일단은 말을 아꼈다.

만약 혼자였다면 깽판을 치고도 남았겠지만 아슌푸틀은 지금 역모의 혐의를 갖고 소환된 상태이다.

굳이 사건을 벌려 상황을 나쁘게 만들 필욘 없으리라.

대공과 휘진을 태운 마차는 삼엄한 경계 속에서 황궁의 안으로 향했다.

“여기부턴 혼자 가셔야 합니다.”

황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화려한 응접실에 도착한 휘진과 아슌푸틀.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은 본인을 중앙심문회 수석기사라고 소개한 몰트케라는 남자였다.

갑주까지 합친다면 키가 2M는 되는 거구에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살벌하다.

“그는 나의 기사라네.”

“알고 있습니다.”

베아트레아의 말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휘젓는 몰트케. 그의 지시에 따라 두 명의 병사가 휘진의 양 팔을 구속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휘진은 아슌푸틀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고 휘진은 그녀의 지시대로 병사들에게 끌려 나갔다.

휘진이 방을 나섬과 동시에 몰트케는 건틀렛을 벗고 아슌푸틀에게 다가왔다.

“입궁하시기 전 보안검색을 하겠습니다.”

“….!!!”

아슌푸틀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몰트케는 우악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일은 상대가 여성이라면 여기사가 맡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검문을 하는 과정에서 온몸 곳곳을 더듬어야 하는데 그 자체가 무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폭거는 그녀가 지금 처한 상황이 어떤지를 아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다리와 허리춤을 거쳐 가슴으로 올라가려던 때 아슌푸틀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 이상 손을 대고 싶다면 눈을 들어 이 몸이 누구인지 똑바로 보는 게 좋을 게야.”

은빛 서리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는 아슌푸틀의 목소리에 몰트케의 움직임도 멈칫했다.

제 아무리 황태자의 직명이라지만 이 이상의 불화를 만드는 것은 그에게도 이로운 일은 아니었다.

새파란 보석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치정자의 위엄과 권위가 서려있었다.

“정해진 절차에 따랐을 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사죄를.”

“제멋대로 몸을 더듬어 놓고 사죄라?”

“불만이 있으시다면 태자께 상고하시지요. 베아트레아 대공, 당신은 지금 역모의 죄를 추궁받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굳이 보태어 말을 돌린 몰트케는 휘하의 병사들에게 그녀를 독실로 옮길 것을 명령했다.

“1차 심문회는 내일 정오부터입니다. 그전까진 별실에서 기거해 주십시오.”

“알겠네.”

죄인을 대하는 것 같은 모욕을 받으며 그녀는 자신을 이끌려던 병사들의 손을 매몰차게 내치고는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          ◈          ◈

“이러면 나가린데.”

졸지에 성 밖으로 쫓겨난 휘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무리 그래도 황궁 내의 방 하나 정도는 내줄 줄로만 알았는데 이대로 황궁 밖으로 쫓아버릴 줄이야.

이 바닥의 정치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휘진이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처사였다.

명색이 대공이다.

공작 중에서도 특별히 높은 위치를 지니고 있는, 슐레스비에서 오직 3명만이 가진 작위.

그런 베아트레아 대공님을 그런 식으로 홀대하고 게다가 유일한 호위인 자신마저 내쫓다니.

이래서야 쫄랑쫄랑 따라온 의미가 없다.

대공님이랑 해피해피 섹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힘이 되기 위해서였는데.

아무리 시간정지라는 능력을 갖고 있더라도 이렇게 멀리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시간 정지를 하고 아까 그 띠꺼운 몰트케라는 녀석을 죽여 버리고 싶지만 뜻대로 한들 대공에게 피해만 갈 뿐이다.

만약 일이 꼬여서 대공이 정말로 역적으로 몰린다면 어떻게 할 건데?

황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휘진이라도 거부감이 든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대공님이 곤경에 처해서 사형 판결이라도 받는다면 그때 몰래 구출해 와도 되는 노릇이다.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겠지.

그렇다면 남은 일은 하나다.

휘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중세인가 싶을 정도로 발전한 신천지.

황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깔려 있는 광장과 가도에는 어여쁜 여편네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걷고 있다.

“촌놈이 도시에 왔으면 할 일은 딱 하나지.”

애써 대공을 염려하는 마음을 밀어 놓은 휘진은 휘파람을 불며 거리를 누볐다.

그러던 와중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다.

“응?”

“윽…”

설마에 설마하니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아나스타샤였다.

빵이 가득 든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있는 아나스타샤.

여배우 같던 멋진 의상을 입고 있던 그녀는 여느 아낙처럼 머리 수건을 두른 채 평범한 드레스 차림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전부 감춰지는 것은 아니었다.

백번 양보해도 검소하게 사는 부잣집 따님으로 보이는 고귀한 아우라가 줄줄 흘러 넘쳤으니까.

“당신이 왜 여기 있어?”

“니가 왜 여깃냐?”

당혹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아나스타샤와 환희로 가득한 휘진의 목소리.

루블 왕국에서 도망친다는 말은 들었는데 설마 슐레스비 왕국의 중앙으로 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이차저차해서 지금 갈 곳이 없는데. 집에서 식사 한 번 대접해줄래? 미카엘은 잘 있지?”

“내가 왜?”

곤혹스러운 표정은 순식간에 쌍심지를 치켜세운 표독스러운 것이 되었다.

아나스타샤에게 있어서는 최대치의 적개감 표출이었지만 휘진에겐 그다지 무서운 것이 못된다.

“밀입국자 신고가 몇 번이더라…”

“아, 시발 진짜…”

“어허, 귀족 아씨께서 그런 못된 말 쓰심 안 됩니다.”

하여간 운도 없는 친구다.

휘진은 거칠게 발을 끌며 걷는 아나스타샤의 뒤를 쫓아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없으니까 주접 떨지 말고 들어가.”

황궁에서 30여분 거리 떨어진 거리에 고급 주택가.

휘진이 미카엘에게 넘겨준 금화가 꽤나 값어치가 있던 모양인지 생각보다 훨씬 구색을 갖춘 집이다.

궁궐 같던 원래 니콜라 가문의 저택에 비하면 사용인 숙소보다 못한 크기이지만 2층짜리 석조 건물이 어디야.

한국이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전원주택이다.

훌륭한 재질의 목탁과 소파, 관용식물로 잘 꾸며진 거실.

호화롭진 않아도 단란한 가정의 소확행이 묻어나오는 듯 했다.

아나스타샤는 부엌에 빵 봉지를 던져두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커피를 내왔다.

밖에서 입던 옷을 전혀 갈아입지 않은 것을 보니 MAX의 경계 태세이다.

“그새 결혼 했어?”

“그래. 대단하진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데 어쩌겠어?”

휘진의 질문에 아나스타샤는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감추며 답했다.

결혼한 상태로 과거 대놓고 섹파였던 상대를 만났으니 어색해 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들어나 보자.”

처음 만났을 때 격렬한 거부 반응과 달리 아나스타샤는 꽤나 순순히 근황을 털어 놓았다.

부친을 구한 뒤 사정이 마땅치 않아 따로 살고 있다는 것, 미카엘이 뱃일을 시작했다는 것, 자신도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빵 굽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

“그래도 명색이 후작 영애였는데 좀 그렇겠네.”

“아니, 오히려 홀가분해. 영애의 몸가짐이니 뭐니 골치 아픈 것도 없이 이렇게 평화롭게 숨어 사는 것도. 빵을 굽는 것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도. 불과 얼마 전까진 상상도 못했던 행복이야. 이것만큼은 당신한테 고마워.”

솔직히 몸을 대가로 받으며 어마어마하게 괴롭혔던 여자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니 머쓱하다.

근데 이야기가 이렇게 훈훈하게 가버리면 ‘크큭, 약점을 잡고 있으니까 순순히 다리를 벌려라!’같은 전개가 힘들어지는데…

“그러니까 부디 이 평화를 깨지 말아줘. 손님으로서 대접하라면 얼마든지 할게.”

“그럼 저 빵도 네가 구운 거야?”

“응? 아, 응…”

어울리지 않게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는 아나스타샤.

사실 나이대로 보나 서로의 관계로 보나 가장 친구 같은 것은 아나스타샤다.

오랜만에 여사친이랑 대화하는 기분에 싱숭생숭하다고 해야 하나.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 모양은 안 좋은데 맛은 시중에서 파는 거랑 비슷해. 먹을래?”

“커피랑 어울리는 걸로 하나 부탁할게.”

“조금만 기다려.”

여전히 기품이 묻어나오는 걸음 거리로 호두파이를 조각내온 아나스타샤는 조심스럽게 앞에 앉았다.

“그래서 난 왜 찾아온 거야?”

“찾았다기보다는 그냥 너가 여기 있었지. 나는 수행비서로 온 거야. 근데 궁에서 쫓겨나서 갈 데가 없었고. 여관 찾던 중에 공짜 모텔 찾은 거지…으앗 뜨거!”

“아 진짜, 뭐해. 바보마냥.”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중 그만 커피를 허벅지에 쏟고 말았다.

아나스타샤는 카펫에 얼룩지면 어쩔 거냐며 툴툴대더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카펫을 닦기 시작했다.

보통은 이러면 사람 먼저 닦지 않나?

말로는 고맙다고 하지만 진짜 은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해 준만큼 받아먹기도 했고 그 점에 대해 딱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흐음…”

허리를 숙이고 걸레질을 하는 아나스타샤의 훌륭한 가슴골이 헐렁한 드레스 너머로 비친다.

검은색의 브래지어는 겉옷과는 달리 딱 봐도 최상품.

귀족아가씨가 타협할 수 있었던 건 겉옷까지였나 보다.

그 장관을 음미하던 휘진은 저도 모르게 아나스타샤의 어깨에 쓱 손을 얹었다.

열심히 자국을 닦던 그녀의 어깨가 굳는다.

“나도 네 평화를 깨기는 싫어. 근데 세상은 기브 앤 테이크. 받는 만큼 줘야 하는 거 알지?”

음흉한 미소가 절로 번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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