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다시 만난 귀족영애(1)
수많은 객실들의 문이 모두 열려있다.
복도와 계단에는 피 칠갑을 한 채 누워있는 호위병들이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다.
“아…아…”
손발이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슈슈는 벌벌 떨었다.
-또각 또각
그리고 슈슈는 보았다.
한 방문에서 기형적인 단도를 들고 나서는 여우 가면을 쓴 여인이 걸어 나오는 것을.
방금 한 생명을 앗아간 것으로 보이는 잿빛의 칼날은 칼날굽이가 휘어있다.
슈슈와 눈이 마주친 가면녀는 고개가 갸우뚱 했다.
그녀가 지급받은 살생부에는 저런 조그마한 소녀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온 객실은 귀족이 머무는 방.
성내에 존재하는 모든 귀족들을 죽이라는 청부를 받은 이상 저 소녀를 배제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허리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소녀의 앞에 가면녀는 뚜벅뚜벅 걸어가 섰다.
섬뜩한 피비린내가 풍겨온다. 슈슈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그녀의 앞에서 벌벌 떨었다.
“…우웃…”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푹 숙였던 슈슈는 멀어져가는 기척에 천천히 눈을 떴다.
한 걸음씩 멀어지던 가면녀의 몸이 마치 도깨비에 홀린 듯이 사라져버린다.
슈슈는 안도감을 느끼며 방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했다.
“어라…?”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상체와 하체의 동기화가 어긋나 버린 것처럼, 고장난 인형처럼 몸이 휘청거린다.
동시에 배 안에서 뜨겁게 솟구치는 통증에 슈슈는 자신의 손을 내려 보았다.
복강을 막았던 손아귀가 새빨갛다.
“쿨럭…”
목구멍에서 역류한 역한 토사물에 섞인 선혈.
입으로 쇠 맛을 느끼며 슈슈는 안간힘을 써 방문으로 천천히 기었다.
하다못해 방문이라도 닫아야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동생만큼은 이 위험에서…
슈슈는 직감했다.
자신의 생명의 불꽃이 봉합이 뜯어진 봉제 인형의 솜처럼 쉼 없이 빠져나가고 있음을.
아아, 주인님.
마지막으로 얼굴을 한 번은 보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만약 자신이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주인님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것만이 의문이었다.
슈슈의 경련하던 손끝이 천천히 그 움직임을 멎었다.
◈ ◈ ◈
리리엘은 벌써 셋이나 되는 암살자를 격퇴하고 성내를 순회 중이었다.
한명 한명이 무시할 수 없는 무력을 보유한 실력자들.
만약 타타라에게 수업을 받기 전이었다면 한명을 처치하는 것도 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하필 이런 때에.”
휘진이 성내에 있었더라면 이런 소란 따위는 별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투력을 가진 남자이니까.
이런 일 따위 옷에 붙은 진흙이라도 털 듯이 아무렇지 않게 해결해주었을 텐데.
“끄어어어…”
“봉인.”
리리엘이 만들어낸 유사의 파도에 휩쓸린 한 자객은 그대로 동상처럼 온몸이 굳었다.
몸 안으로 침투한 마력을 이용해 혈액을 석고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분명 귀족 가에서 자라온 온실안의 화초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악인에게는 죽음이라는 응분의 대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 가지를 통해 배워왔다.
“일단은 스승님께 가야 해.”
지금으로선 이 자객들을 확실하게 처치할 수 있는 것은 타타라 이외엔 생각이 나질 않는다.
몇 명인지도 모르는 적들을 상대로 한 명씩 싸우다가는 언제 포위당할지 모른다.
일 대 일이라면 승산이 적진 않지만 당장 두 명만 되어도 승패를 장담하지 못하는 것이 낙월의 암살대다.
리리엘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주홍의 트윈 테일을 휘날리며 연구동으로 달렸다.
◈ ◈ ◈
대장은 떨리는 눈으로 타타라를 바라보았다.
타타타 타타라가 자신의 의복을 제 손으로 모두 벗어던졌을 때, 그는‘몽마’라는 또 다른 별명에 걸맞게 그녀가 자신의 육체를 팔아 목숨을 구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곤 비웃었다.
확실히 아름답다.
인간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그 매끄러운 알몸이라면 어지간한 남자들은 모두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자들은 모든 직 간접적으로 타타라에게 원한이 있는 인간들이다.
그녀의 손에 가족을 잃었거나 미래를 잃어버린 자들.
혹은 선대로부터 은원이 있는 가문 등… 타타라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가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깟 알량한 미인계에 넘어갈 각오로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어느 정도 낙담했다.
기사록에 남을 정도로 영웅적인 일전을 기대했건만… 결국 전설의 허상은 한 껍질 벗겨놓고 보면 이토록 보잘 것 없구나 하고 남몰래 한탄했다.
“허둥대지 마라! 적은 고작 한명이다!”
그리고 타타라의 전신을 3M가 넘는 거대한 플레이트 갑옷이 감쌌을 때 대장은 자신의 멍청함을 욕했다.
저기에 있는 마녀는 세계의 공적(公敵)으로 수백 년을 살아남아온 괴물이다.
겨우 한 가지를 봉쇄했다고 안일해질 틈 따위는 허락하지 않는 인외의 지성체이다.
무섭게 휘둘러진 대검이 굳건하게 땅을 딛고 방패를 내밀던 기사를 그대로 짓눌러버린다.
거대한 갑각류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방패를 움푹하게 함몰시킨 대검은 기사의 목이 몸통에 박혀 들 정도의 여력을 남기고 있었다.
“어때? 이번에 내가 새로 발명한 ‘마력기동갑옷, 머신 타타라(ver1.1)’야!”
5톤을 가뿐하게 넘기는 그 체중은 거대한 클레이모어의 일격 일격을 교통사고 급으로 만들어준다.
실제로 타타라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넘긴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
“그물을 만들어라!”
후방에 20명의 마법 기사들의 집단 영창과 함께 거미줄처럼 촘촘한 마력의 그물이 기동갑옷을 둘러싼다.
일전 피닉스와의 전투에서도 활약했던 마법 그물.
공군함 사이를 정신없이 날아다니던 그 아신조차 몇 겹이나 되는 마법 그물에 의해 기동력을 봉쇄당하고 결국 마포에 의해 격추되었다.
하지만 금빛의 그물은 기동갑옷의 표면에 음각되어있던 마법식과 맞닿자 순식간에 바스러졌다.
동시에 그녀를 향해 날아가던 화염구 역시 계단에 바위치기라도 한 양 소멸해버린다.
“그런 자잘한 마법으론 이 머신 타타라를 막지 못해. 이래 뵈도 다섯 소절 이하의 영창은 모두 무효화시키는 음각을 새겼거든.”
“개 사기 아니야!”
한 번의 시도가 실패할 때마다 적어도 5명의 단원이 죽어나간다.
가볍게 걷어차는 기동갑옷의 발길질에 또 다시 전위를 담당하던 기사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외벽의 장식으로 변해버렸다.
역사를 다시 쓰리란 고양감은 압도적인 무력 앞에 절망감으로 변해간다.
겁에 질려 슬금슬금 무너진 대열 따위로는 타타라를 막아낼 수 없었다.
“타타라 빔!!!”
갑주의 흉갑에서 보랏빛의 마포가 주문을 외우던 후열을 덮쳤다.
방어주문이 무색하게 일순 잿더미로 화한 10명의 기사들은 단말마도 남기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대장은 이해했다.
저것은 단순한 거대한 갑옷이 아니다.
마포를 쏜다는 의미는 곧 그 정도의 마력 출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
저 거대한 갑주는 겨우 5M의 크기로 60M가 넘는 1급 함 비센과 동등한 화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후…후퇴…!!”
이 명령 역시 무의미하다.
조국은 이 비밀 명령을 하달하기에 앞서 그들의 모든 신원 정보를 제거했다.
지금 루블 왕국으로 돌아간다 한들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으며 고스란히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벌레보다 쉽게 짓눌려 죽는 것을 본 이상 대장은 그 이상의 명령을 생각할 수 없었다.
“후퇴해라… 커헉…!!!”
“그러게 마지막 이름 정도는 말해 줬으면 좋았잖아?”
거대한 갑주에 다리를 붙잡힌 대장.
타타라는 마치 젖은 걸레를 털 듯 그의 육신을 힘차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 ◈ ◈
“우욱…”
리리엘은 욕지기를 참으며 연구동을 천천히 살폈다.
거대한 물건에 짓눌리고 으깨진 시체들이 바닥 뿐 아니라 벽에까지 박혀 들어가 있다.
기사들의 전투 후라기보다는 거대한 산업재해에 휘말린 인부들 같은 모습.
아직 전쟁에 익숙하지 않은 리리엘은 그 참혹한 현장의 한 가운데서 타타라를 발견했다.
“스승님!”
“어? 우리 귀여운 리리엘 왔구나.”
“어떻게 된 건가요?”
새하얀 나신으로 엉망이 된 바닥을 걷고 있는 타타라, 살결에는 엉망진창으로 튀어있는 핏방울들이 선정적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테스트 결과를 기록 중이었어. 아무래도 갑주 사이에 방수 기능을 넣어야 할 것 같아. 피가 잔뜩 튀어버리네.”
“테스트인 건가요…”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겠어. 성 안에 숨어든 쥐새끼들을 잡아야 하거든.”
“네!”
대충 마력을 꼬아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만들어낸 타타라는 리리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또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마녀의 집에 발을 들인 자들에겐 응당한 처분이 주어져야 하는 법이다.
두 번 다시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특무대가 전부 전멸한 시점에서 낙월은 재빨리 철수했다.
어차피 돈을 받고 하는 일인 만큼 목숨을 걸고 피해를 최대화할 의리 따윈 없으니까.
그럼에도 그들이 남긴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재무경을 비롯한 주요 대신들이 모두 흑수의 칼날에 당했고 도합 5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주요 문서들이 대거 소실 및 분실되었기에 모든 행정 업무가 마비되는 후유증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운 좋게 밤늦게까지 외근을 하던 내무경만이 그 참사를 피해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타타라에게 보고를 끝낸 그는 끝내는 주름살 가득한 눈으로 눈물을 흘렸다.
평생 슈펜하우져를 일궈오고 지켜오던 동료들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고 성마저 복구하기 힘든 피해를 입었다.
눈물이 아니라 대성통곡을 하더라도 타타라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줄 마음이 있지만 내무경은 조용히 말했다.
“이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저는 관직에서 물러나려합니다.”
“푹 쉬도록 해. 나머지는 내가 정리해 볼 테니까.”
내무경이 나가고 타타라는 한숨을 쉬었다.
베아트레아와의 약조는 어디까지나 그녀를 간접적으로 서포트하는 것.
그리고 그녀를 지켜보는 것 이 둘 뿐이다.
사실 이 마당에 그녀가 귀찮은 일들을 떠맡을 이유는 없었다.
이 세상은 그저 유희의 일부이다.
감정적으로 너무 많은 접점이 생겨버린다면 그것은 언젠가 고통이 되어 타타라 자신을 옥죄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타타라는 조용히 마음을 정리했다.
아슌푸틀의 책략이 성공리에 끝나든, 아니면 한순간의 꿈으로 쇄락하든… 이제는 그녀와 인연을 정리해야 할 때다.
타타라는 조용히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름이 슈슈라고 했던가?
산소호흡기와 약물을 주입하는 링거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그녀는 사실상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의 남동생이 슈슈를 업고 도착했을 때 모든 생명 반응이 정지해 있었다.
동공의 빛반응은 물론 호흡과 심박도 멈추어 있던 것을 타타라가 가까스로 소생해낸 것이다.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해볼 수 있는 것은 해봐야지.”
제 아무리 그녀의 연금술과 마공학에 있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는 하나, 그것이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피닉스에게 받은 깃털이 아니었더라면 여기까지 할 수도 없었을 거야.”
“어째서 이런 참혹한 짓을 하는 걸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일 텐데.”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의 것을 빼앗는 운명을 타고나. 하루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잡아먹어야 하니까.”
“저도 이렇게 모르는 사이에 다른 누군가에게 소중한 사람을 무심코 빼앗은 건 아닐까요?”
시무룩해하는 리리엘의 얼굴에 타타라는 담배를 물며 답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렴. 네가 정해지지 않은 답을 찾으려드는 그 순간까지 너는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