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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101화 (101/154)

101화 베로니카(1)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지, 홍두깨에 두드려 맞는 건지. 내무경의 급한 알림에 깨어난 휘진은 아직도 비몽사몽이었다.

침대 밑에 깔려 있던 리리엘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급한 대로 캐리어에 짐만 챙겨 나온 휘진은 선착장에서 달을 바라보며 서있는 아슌푸틀을 발견했다.

그 주변엔 기사들이 도열해 있고 흔히 말하는 방떡 장갑의 기함에 노심이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들려온다.

자갈이 깔려 있는 가도를 터덜터덜 걷자 옆에 있던 시녀 한명이 짐을 대신 들어주었다.

시녀에게 감사를 표할 기운도 없어 아슌푸틀에게만 기사의 예를 갖췄다.

“왔는가?”

딱 봐도 무리스런 미소로 응대한 아슌푸틀은 휘진과 함께 승강기로 이동했다.

“아닌 밤중에 미안하네. 워낙에 급한 사안이라 말이야. 나머지는 이동하며 말하기로 하지.”

“아닙니다. 대공님의 부탁인데, 제가 모른 척할 수는 없죠.”

아슌푸틀이라고 부를까 고민하다가 주변에 함께 탑승한 병사들을 신경 써 말을 길게 붙인 휘진.

갑판을 따라 브릿지 아래로 나있는 선루로 들어간 휘진과 아슌푸틀.

그 안에는 좁지만 구성 좋게 꾸며져 있는 객실이 하나 있었다.

“어? 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휘진은 아슌푸틀을 바래다주고 자신의 방으로 안내될 줄 알았건만, 넥타이를 휙 끌어당기는 아슌푸틀의 손길에 방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웁…!!!”

까치발을 든 채 휘진의 멱살을 휘어잡은 아슌푸틀은 마치 파병 나갔던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처럼 진하게 휘진에게 혀를 섞어갔다.

졸지에 벽에 몰리게 된 휘진이 당황하기도 전에 아슌푸틀은 마치 갈구하듯이 휘진에게 키스를 퍼붓는다.

처음엔 당황했던 휘진도 이내 능숙하게 아슌푸틀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를 받아들인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분위기 좋다.

한참이나 한탄인지 푸념인지를 키스로 해소하던 아슌푸틀의 입술이 멀어져갔다.

두 사람 사이에 늘어진 타액이 촛대의 조명을 받아 황금빛 실처럼 빛난다.

지척까지 다가왔던 은은한 장미향기가 멀어져가자 어쩐지 허전하다.

“갑자기 미안하네.”

“그러게 깜짝 놀랐어.”

“하지만 오늘은 너무 힘든 날이었어. 그대의 품이 필요했네.”

희미한 시선의 끝은 마룻바닥을 향해있다.

방황하고 마음을 마모 시키는 고민과 고민의 끝에 고른 것은, 언제나 자신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째서 나는 이런 선택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참고 있었던 눈물이 흐른다.

그의 앞에 서면 감정이 쉽게 들끓는다.

자신의 뒷모습을 모르는 그를 기만하며, 그저 상냥한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일까.

아슌푸틀은 구역질을 삼키면서도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직은 이걸로 된 거야.

언젠가는 반드시… 전해야만 할 테니까.

진심어린 여자의 눈물엔 약하기 그지없는 휘진은 그녀를 안아주는 것밖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          ◈

아슌푸틀과 휘진이 공선 위에 함께 머물렀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3시간 정도.

슈펜하우져 성의 기함이 닻을 내린 곳은 공작령 소속의 ‘데 아셴도(de ascend?)’라는 도시였다.

‘승강하다’의 의미를 지닌 이 도시는 이름에 걸맞게 대륙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종단 열차의 시작점이자 종점이다.

지구 문명인 공선의 발전이 전투공선함(戰鬪空船艦)라는 전투 병기에서 비롯됐듯이, 증기와 마력엔진의 원리를 이용해 만들어진 이 증기마기관차(蒸氣魔機關車) 역시 루블 왕국과의 전쟁에서 빠른 물자 운송을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전쟁은 세상을 황폐하게 한다고들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유사이례 가장 화려한 과학이 꽃피웠던 시대는 번번이 전화(戰火)에 불타오르는 지상에서였다.

공선함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범선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상 풍향에 큰 영향을 받는다.

여름은 시기적으로 대륙 남부의 지중해에서 발생한 남풍이 거세기 때문에 공선보다는 기차 이용이 빠르다는 것이 아슌푸틀의 판단이었다.

본래 열차 운행은 자정에 모두 중단되지만 긴급사태에 의해 플랫폼엔 불이 들어와 있다.

아슌푸틀과 휘진을 제외한 모든 인원은 북해로 복귀하고 단 둘이 기차에 몸을 실었다.

“와.”

막연히 배만 떠다니는 중세 판타지라고 은연중 이세계를 무시했던 휘진은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란히 타게 된 열차의 객실은 휘진이 흔히 알고 있는 ‘객실’과는 명백히 괴리감이 있었으니.

전용기의 스위트룸처럼 잘 꾸며진 열차의 내부는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광이 없으면 기차임을 망각할 정도로 넓고 잘 정돈되어있다.

방 안을 꾸미고 있는 화초도 방금 손질을 한 것처럼 가지런하고, 가구 역시 당장 휘진의 방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도 그럴 만했다.

무려 열차 두 칸을 개조해 VIP 전용으로 만들어진 ‘움직이는 호텔’이었으니 말이다.

“이것도 아슌푸틀 거야?”

“아닐세. 이런 호화스러운 물건을 살 정도로 예산이 남아 돌지는 않아서 말이네.”

시장이 빌려주었다고 귀띔하는 아슌푸틀.

좀 아까 곰돌이 파자마를 입고 맨발로 플랫폼까지 마중 나왔던 시장의 모습이 생각나 휘진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럼 이제 우리 둘만 여기에 있는 건가?”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바로 자게나. 어차피 중앙까지 삼일은 족히 걸리니 말이네.”

휘진에게 눈물을 보인 뒤 곧바로 잠들었다가 방금 깨어난 아슌푸틀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저런 모습도 예뻐 보이는 것은 명백히 조물주의 실수이다.

주사위를 100번 굴려서 100번 모두 6이 나와야 저 스탯이 나오지.

“아무리 나라도 정황은 읽을 줄 알아. 이 상황에서 졸라봐야 제정신 아닌 사람이지.”

휘진 역시 지금 북해의 상황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다.

휫센 상단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마르고 닳도록 대공에게 들었으니까.

그런 핵심 역할에게 뒤통수를 고스란히 내주었으니 아무리 아슌푸틀 치하 공작령이라도 휘청하지 않을 수 없다.

“뭐? 역모?”

“목소리는 좀 낮추게나. 밤에 듣는 새는 소문을 못되게 꼬아버리니 말이네.”

거기에 이 알콩달콩 한(할 예정인) 여행의 단초가 다름 아닌 역모에 대한 추궁이라니.

휘진이 살았던 한국도 봉건제였던 시절이 있던 만큼-엄밀히 말하면 봉건제였던 시절이 훨씬 길었던 만큼- 역모의 무서움은 휘진도 잘 알고 있다.

“그거 팔대를 멸한다는 그거 맞지?”

“걱정 말게나, 중앙회에도 확실한 물증은 없을 것이야. 고작해야 이때다 싶어 다리를 거는 치졸한 책략일 뿐이지.”

“개새끼들이네.”

격분하는 휘진을 아슌푸틀은 부드럽게 달랬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어차피 지금 이 열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모처럼 휘진에게 동행을 요구한 이상,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 기억이 남게 하고 싶었다.

“그대와 언젠가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 날이 올 줄은 몰랐구먼.”

아슌푸틀은 휘진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팔뚝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그대로 자버린다.

마지막 말이 끝난 지 10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엄청 피곤했나보네.

불편해 보이는 겉옷만을 벗겨준 채로 침대에 눕혀 주었다.

응큼한 장난을 쳐볼까도 고민했지만 곧 입에 떨어질 감 괜히 찔러서 상하게 할 필요도 없다.

휘진도 어지러울 정도로 피곤한지라 소파에 몸을 맡겼다.

◈          ◈          ◈

석탄은 물론 마력까지 충전해야 하는 증기기관차가 직통으로 북해에서 제국의 중앙이라는 장거리를 이동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들리게 된 열차가 정착한 곳은 ‘베로니카’.

행정 구역상 제국 중앙의 가장 북쪽.

바다만큼이나 거대한 호수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였다.

공선의 발달이 무역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수송 운송업이 완전히 사장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마력으로 부력을 일으켜 선박을 띄우는 공선과 자연스럽게 물 위로 떠오르는 선박은 동일한 배수량이라 하더라도 적재 중량이 다르다.

때문에 수백 년 전부터 물류 운송의 허브로서 존재해온 베로니카는 아직까지도 대륙 최대 규모의 연안항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호수 위를 느긋하게 유영하는 제각기 다른 크기의 선박들.

아침과 점심 사이인데도 부두가의 인도에는 놀이동산만큼이나 인파로 붐빈다.

조금만 한 눈 팔아도 소매치기를 당할 정도로 여러 인종들이 걸어가고 있고 복장도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다.

한편 차도 쪽으로는 갖은 상품을 실은 마차들이 줄지어 거북이 행진을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던 탓에 3층을 넘기지 않는 석조 건물들.

노상에 앉아 신문을 읽는 노인도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놓인 빨랫줄엔 빨래를 널고 있는 아낙의 모습도 보였고, 달콤한 향기를 풍기며 빵을 구워내는 제빵사의 모습도 보인다.

휘진이 상상했던 중세의 평화로운 무역도시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든 풍광이다.

“이렇게 가도에 나와 걷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휘진의 옆에는 그의 소매를 꼭 쥐고 있는 대공님이 서 있다.

챙이 커다란 하얀 모자를 쓰고 숏 케이프로 어깨를 감싼 대공님은 가벼운 원피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아래서 예쁘게 호를 그린 눈은 여기저기를 둘러다보며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 중이었다.

이건 완전 사담인데 이렇게 하얀색 일색인 대공님을 보니 마치 천사를 보는 것 같다.

어차피 열차가 완전히 충전될 때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서둘러 출발한 만큼 하루 정도라면 여유롭게 휴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아슌푸틀의 설명이었고 휘진은 그에 별 토를 달지 않고 따랐다.

생전 유럽 여행은커녕 해외에도 나가보지 못했는데, 아리따운 연인과 함께 유럽과 비교할 수도 없는 관광명소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를 미쳤다고 걷어차겠는가.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라면 아슌푸틀이 알아서 하겠거니 할 뿐이다.

남쪽으로 이동할수록 휘진은 과연 이세계의 여름도 한국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안감을 넣지 않은 양복을 입고 있음에도 땀이 삐질삐질 이마를 타고 흘렀으니.

북해에선 정오만 지나도 가끔 으슬으슬 한기를 느낄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이런 곳에 수행원도 없이 혼자 다녀도 돼?”

“이곳에 날 알아볼 사람은 없을 걸세. 그대는 나와 단 둘인 것이 싫은 겐가?”

“아니 그런 건 아니지.”

아슌푸틀은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말을 했지만 그녀의 미모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위의 이목을 끌어들였다.

남녀노소 상관 않고 길을 터주며 반드시 한 번이상은 뒤를 돌아본다.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입을 멍하게 벌린 채 담배를 떨구는 행인은 지금와선 그다지 특별한 관경도 아니었다.

심지어 마차를 그대로 강물로 돌진시킨 마부도 있었다.

그 시선에서 뿌듯함이나 승리감을 느끼기엔 제아무리 무사태평한 휘진이라도 불가능하다. 오히려 대공과의 거리감이 실감나 조금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걸음걸이만으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고귀함의 오라는 날벌레처럼 꼬이는 호객꾼들과 잡상인들의 접근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둘이 걸어가는 길은 자연스럽게 동그란 공백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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