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평화로운 나날들(2)
“그녀와 함께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해봤어?”
“음… 조금 멍청한 것도 포함이야?”
“몽고메리의 불사(不死)는 공짜가 아니야. 그녀는 한 번 죽고 살아날 때마다 80년 치의 기억을 잃어. 어떤 의미로는 한 삶의 죽음이지.”
휘진은 조금 놀랐다.
마치 뛰는 게 이상하다고 놀렸던 반 친구가 지체 장애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초등학생 때처럼.
“아신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로는 안식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에게는 공포야. 자신과 함께 싸웠던 소중한 사람들, 행복했던 소중한 기억들을 모두 잊어버리거든.”
인간에게 주어진 80년은 아기로 태어나 한 가정을 꾸리고 넉넉한 황혼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밝고 씩씩한 모습만 보여 왔던 피닉스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된 휘진은 달리 할 말을 잃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심정이 별로 짐작가지도 않는다.
“몽고메리는 날 구하기 위해서 8번을 죽었었어.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사람을 어떻게 모질게 대하겠어.”
“대책 없이 좋은 녀석이기도 하고.”
“잡설은 여기까지. 내가 지목한 품목들을 가져와줘. 당신에게도 공부가 될 거야.”
지옥 기름, 폭열의 정수, 장작나무의 잔가지, 불꽃 두꺼비의 타액 등등 수 십 가지의 재료를 부르는 타타라.
휘진이 더듬더듬 찾아준 약품들을 솥에 콸콸 부어넣기 시작했다.
딱히 정량을 잰다거나 고민을 하는 기색도 없이 순식간에 솥 안이 여러 가지 액체로 차기 시작한다.
이제 막 연금술을 배우기 시작한 휘진이지만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는 알고 있다.
연금술은 계량의 학문.
한 방울의 시약을 더 넣고 덜 넣느냐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타타라는 대충해도 눈금하나도 틀리지 않을 만큼의 시약을 투여했으며 실험은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 초밥 장인도 그것보다는 꼼꼼히 무게 재던데.”
“당신도 수백 년 동안 이것만 해봐. 못하면 바보지.”
대수롭지 않게 답한 타타라는 손 안의 불꽃을 일으키고 휘진에게 말했다.
“내 뒤에서 눈 감고 있어.”
“왜?”
“지금 할 당신이 보게 될 건 가장 뜨거운 불꽃을 일으키는 연금술이야.”
“난 너랑 할 때 가장 뜨거운 불꽃이 생기던데…”
“그냥 같이 들어가던가.”
대충 던진 추파를 아프게 받아치는 타타라.
휘진은 타타라가 시킨 대로 그녀의 뒤에 서서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작게 중얼거리는 타타라의 영창과 함께 결코 작지 않은 공동이 어마어마한 열기와 빛으로 가득 찬다.
만약 눈을 뜨고 있었더라면 그냥 실명 확정인 정도.
태양을 지척에서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하실을 가득 채우던 열기는 이내 피닉스의 몸으로 빨려 들어간다.
불꽃과 뜨거움 모두 몸 안에 담아내겠다는 듯이 꾸역꾸역 삼켜대는 작은 몸.
그 피부는 수십 번씩 박피와 재생을 반복하며 압도적인 화력을 홀로 감당한다.
“이제 눈 떠도 좋아.”
“후아아!!! 피닉스님 부활!!!”
모든 것들이 재처럼 사그라지고 피닉스는 솥을 넘어 폴짝 뛰어 내렸다.
그 전까지 기운 없던, 아니 기운은 넘치지만 기세는 없던 피닉스가 지금은 말괄량이 소녀처럼 팔짝팔짝 뛰어다닌다.
-치이이익!!!
그녀가 돌바닥을 디디는 것만으로도 새빨갛게 달아오른 용광로에 돌덩이를 넣은 것처럼 벽돌이 흐물거리며 불탄다.
피닉스의 등 뒤로 떠 오른 거대한 새의 날개 모양에서는 낭창낭창 불똥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휘진으로서는 왜 아신이 공포의 대상이었는지 알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장관이었다.
만약 손에 K2가 들렸다고 해도 저런 것에는 대응할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 ◈ ◈
더불어 말하자면 피닉스가 힘을 회복하기 위한 과정은 저게 끝이 아니었다.
방금 전 과정을 무려 5번이나 반복하고 나서야 완벽한 복구가 끝난 것이다.
그러고 나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이다.
원래 저녁을 먹기엔 지나치게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대공은 소소한 만찬회를 열어 휘진을 환영했다.
전에도 가끔 함께 밥을 먹던 테이블.
아슌푸틀, 타타라, 아리스, 리리엘, 피닉스, 거기에 무려 메이드인 슈슈마저 오늘만큼은 손님으로 초대되어 함께 앉아있다.
이렇게 보니 죄다 여자네. 그것도 피닉스를 제외하면 한 번씩 몸을 섞은 사람들이다.
인생을 성실하고 견실하게 살다보면 이런 보상도 받는 구나 싶어 마음이 뿌듯했다.
“휘진 경의 무사한 복귀를 축하하며 모두 잔을 올리게나.”
대공님의 작은 건배사와 함께 준비된 식사가 에피타이저부터 차근차근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슈슈는 아까부터 잔뜩 긴장한 탓인지 쭈뼛쭈뼛 몸을 붙여온다.
지금까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녀 입장에선 이등병이 방한한 미 대통령과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너무 긴장 안 해도 돼 슈슈. 실수하더라도 내가 다 덮어줄 수 있어.”
애초에 겨우 그런 일로 트집을 잡을 만큼 모난 사람들도 아니다. 감자 스프만 먹던 슈슈는 최고급 북해 꽃 가재가 들어간 스프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금씩 입으로 옮기고 있었다.
“하…하지만…”
“슈슈라고 하였느냐?”
“네…넷…!!”
갑작스러운 대공님의 부름에 멋들어지게 혀를 씹으며 대답하는 슈슈.
사실 저런 식으로 대답하는 것도 굉장히 큰 결례라고는 하지만 대공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슈슈에게 보내주었다.
“휘진 경이 실종 되어있는 동안에도 갸륵하게 그의 방을 정돈했다고 들었네.”
“네…”
“그대의 사정은 휘진 경에게 전해 들었다 아픈 남동생이 있다지?”
물론 그간 기특하게 기다려준 슈슈에게도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 생각했기에 휘진이 미리 조치해두었다.
“북해 최고의 의료진을 보내도록 하마. 그리고 성 안에 방 한 개를 내어줄테니 앞으로는 그곳에서 동생과 함께 기거하도록.”
감읍할 만한 아슌푸틀의 제안에 슈슈는 연신 ‘감사합니다’를 말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리리엘 양. 우리 북해는 리리엘 양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연회가 끝난 뒤 초대장을 드리겠습니다. 슈펜하우져에 제가 있는 한, 리리엘 양은 언제나 빈객으로서 환영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아마도 포상타임인가보다.
리리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바르게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역시 잘 배운 귀족 아가씨는 다른 모양인지 슈슈처럼 허둥거리는 기색도, 뽐내는 기색도 없이 점잖다.
귀족의 기품이라는 것은 역시 저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몽고메리 피닉스 님.”
“응!”
마력을 회복한 반동으로 입맛이 돋았다며 가재 스프만 5그릇을 돌파중인 피닉스는 발표를 하는 아이처럼 씩씩하게 손을 들었다.
“그를 무사히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뭘, 나도 그한테 도움을 받았는걸.”
“피닉스 님을 위해서 슈펜하우져 성의 귀빈 전용 바 출입권을 준비했습니다. 모든 음료수를 공짜로 제공 받을 수 있죠.”
“왕!”
그게 뭐지? 라는 표정을 짓다가 화색이 되는 피닉스.
설마 저걸로 퉁칠 줄이야.
피닉스는 대공님을 모르지만 대공님은 피닉스를 아주 잘 알고 계신가 보다.
“그리고 휘진.”
아니나 다를까 폭풍 섹스 이외에도 특별한 상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대공님은 휘진의 이름까지 마저 불러준다.
“그대의 헌신으로 많은 생명들을 구할 수 있었네.”
“내가 다했지. 저기 피닉스는 사실상 잠만 잤고.”
“그대에겐 나의 기사 작위를 수여하겠네.”
대공님은 즐거운 듯 싱글거리는 미소로 손을 뻗어왔다.
새파랗게 정맥이 돋은 하얀 손을 내밀어 손등의 키스를 요구하는 대공님.
판타지를 보면서 이런 것도 나름 로망이었지.
“이젠 식객이 아닌 나만의 기사가 되어주겠나?”
대답은 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 ◈ ◈
연일 계속된 격무와 어제 밤 휘진과의 뜨거운 밤을 보낸 이후 아슌푸틀은 번 아웃 상태였다.
하얗게 타서 재가 된 심정으로 점검할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맺은 뒤 대공은 안경을 벗어던졌다.
“미안하네. 먼저 불러 놓고 이렇게 기다리게 해서.”
“아닙니다. 제가 더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죠.”
아리스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아슌푸틀의 방 한 구석에 앉아 와인을 마시던 중이었다.
물론 술 상대는 아슌푸틀.
일처리 탓에 분산되는 신경에 드문드문 이어지던 대화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아리스는 그것을 불편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함께해 왔던 주종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약한 모습.
화가 난 모습.
기뻐하던 모습.
그 모든 순간을 함께 해 왔으니까.
이런 침묵 정도로 불편할 리가 없다.
“기억나나? 아직 북해에 자리를 잡기 전 무너지다시피 한 폐가에서 지냈던 때 말이네.”
“대공님께서 팔뚝만한 쥐를 보고 기겁을 하셨죠.”
“어쩔 수 없지 않는가? 그때까지만 해도 쥐는 주먹만 하다고 알고 있었으니 말이네. 말이 팔뚝이지 고양이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귀여운 구석이 많으셨는데 말이죠.”
아슌푸틀은 아리스의 놀림에 부끄럽다는 듯이 미소를 짓고는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런 아슌푸틀은 아리스는 가만히 안아주었다.
“식사는 언제나 식은 스프에 감자나 고구마 반 덩이.”
“일어나면 자객들의 단검이 반겨주었고 말이죠.”
“날씨도 어찌 그리 추운지 땔감을 밖에 쌓아두었더니 죄다 자기들끼리 얼어붙어 버렸더군.”
“밤새 한 이불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버티던 날 말씀이시죠?”
어째서인지 시작된 옛날이야기의 향연.
바티스텡이 북해 남부와 교섭을 하러가고 아리스와 단둘이 빈민굴에서 지냈던 적의 일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었지만 아직도 그때가 종종 생각나곤 하네. 공무에 지치고 더러운 짓거리들에 물려버리면… 항상, 그 허름했던 집이 생각나.”
“지나가버린 과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밝게 빛나니까요.”
“그대로 아리스 너와, 바티스텡과 함께 도망쳐서 대륙 남부에 터를 잡았더라면 지금보다 행복하지 않았을까?”
“대공님은 그럴 수 없었던 것뿐이에요.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공님 정의의 그 높은 뜻에 저는 이미 이 검과 목숨을 바쳤습니다.”
아슌푸틀은 점점 강하게 아리스의 옷깃을 쥐었고, 아리스는 어리광부리는 아이를 떼어놓듯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밀어내었다.
“미안하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슌푸틀의 표정에 아리스는 짐짓 모른 채 이불을 정리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함께 자도록 할까요?”
아슌푸틀은 의도적으로 말을 돌리는 아리스를 따라 고분고분 침대에 누웠다.
그 어떤 말도 선뜻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더 쉬운 길로. 금방이라도 도망쳐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족들에게 느꼈던 포근함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을 그리워하며 아슌푸틀은 아리스의 품 안에서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이 밤이 북해에서의 마지막 평온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