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평화로운 나날들(1)
대공님과의 찐한 모닝키스 이후.
대충은 스케줄이 정해졌다.
오늘도 어제도 아마 내일도 공사다망하실 대공님은 허리에 알이 배긴 몸을 이끌고 일을 하러 가셨고 휘진은 오후에 열릴 소소한 환영회까지 시간이 붕 뜨게 되었다.
물론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제 향했던 타타라의 연구실.
온갖 잡다한 플라스크와 방대한 서적이 퇴적되어있는 지식의 보고.
타타라를 가장 마지막 순서로 할 예정은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설마 제일 늦게 만나러 왔다고 삐지는 것은 아니겠지.
아신인 그녀가 고작 이런 순서가지고 화를 낼까 싶긴 하지만…
“안녕 휘진 잘 지냈어?”
여느 때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 위에서 실험을 하고 있는 타타라.
메이드 복 위에 연구복을 겹쳐 입은 타타라는 마치 어제 본 친구를 또 보는 가벼운 인사를 던져왔다.
과연 아신.
수백 년을 살아온 초월자에게 그간 휘진의 부재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호들갑 떨지 않네.”
“이별이 있으면 만남도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거지. 어느 쪽이든 지나치게 마음 쓰다간 세월에 찌부러져버리거든.”
손에 들린 담배를 담백하게 빨아들이는 타타라.
보랏빛 연기가 스탠드의 반사광에 번져 그녀를 더욱 섹시하게 돋보인다.
얼굴이 되니까 담배만 펴도 무슨 화보 같구먼.
한 대를 빌린 휘진은 타타라와 사이좋게 맞담배를 피웠다.
오랜만에 폐 안을 감도는 연기가 찌르르하게 속을 울린다.
“그래도 모처럼 재회인데 너무 가벼운 거 아니야? 조금 쇼크인데.”
“그보다 중요한 사항. 잠깐 신체검사 좀 해볼게.”
휘진의 손목을 잡은 타타라는 자신의 마력을 그에게 투과해 몸의 상태를 점검했다.
“역시 계약이 풀려있어. 죽었다가 살아나기라도 한 거야?”
“뭐 반쯤은 그런 셈인데. 이상한 녀석이 나한테 들러붙었더라고.”
“이상하네.”
타타라가 보기에 휘진은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있을 뿐, 어디까지나 소시민이다.
약간 괴팍한 성격에 색마인 점을 제외한다면 ‘특별’하긴 하지만 ‘특출’과는 거리가 먼 일반인.
그런 그가 구도자로서 선택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가끔은 구도자가 되는 것을 계기로 180도 변하는 사람이 있지만.”
“뭔 소리래.”
하지만 아까부터 가슴을 힐끔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면 뭐가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아 맞다. 타타라 경사가 있어.”
“뭔데?”
타타라의 옆에 바짝 붙어서 무언가를 속삭이는 휘진.
“뭐? 진짜? 어떻게 했는데?”
그 내용은 당연히 베아트레아 대공과의 질펀한 첫 성교에 대한 것이었다.
오글거리는 부분은 어느 정도 빼고 타타라가 흥미를 가질 법한 내용 위주로 구성하여 한 편의 썰을 장대하게 풀어 놓았다.
때로는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로 박장대소하며 즐겁게 듣던 타타라는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역시 당신은 재밌는 사람이야. 없어졌으면 진짜 슬플 뻔 했어.”
“하여튼 이런 전리품을 갖고 왔으니까 맨 마지막에 만나는 것 정도는 용서 해줄 거지?”
“애초에 화난 적도 없어.”
담배를 비벼 끄는 타타라.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또 굉장히 새롭게 예뻐 보인다.
타타라는 굉장히 독특한 타입의 미녀였다.
이지적인 분위기로 충만하면서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강아지 같은 매력이 있다.
거기에 육감적인 나이스 바디까지 이 몸이 그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슬슬 손등을 쓰다듬으며 발동을 걸려 할 때.
타타라는 쓱 손을 빼었다.
“이제 당신이랑은 안 할 거야.”
“잉…?”
“당신과는 이 이상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는 말이야.”
“아슌푸틀 때문이야?”
타타라가 갑자기 이렇게 나오다니.
솔직히 휘진 역시 자기가 하는 짓이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 짓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사랑한다고 달콤하게 고백했던 아슌푸틀을 두고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타타라에게 손을 뻗으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배신하는 행위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껏 모든 배덕적인 행위에 어울려 주었던 타타라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타타라는 조용히 고개를 저어 그의 짐작이 어긋났음을 지적한다.
“북해는 일부다처제야. 능력만 있다면 당신이 100명의 첩을 들여도 아슌푸틀은 개의치 않아할걸?”
“그럼 갑자기 왜.”
“잠깐 잊고 있었나봐. 당신은 어차피 필멸자잖아. 누군가의 손에 죽지 않아도 세월이라는 극독을 천천히 주사 받아서 늙고 병들고, 너와 함께 해서 행복 했었다 따위의 말을 하며 죽어갈 일개 인간이잖아.”
‘홀로 남겨진 내 맘은 모르고 말이지’라고 쓸쓸하게 중얼거리는 타타라.
타타라가 그간 그것을 모르고 지냈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도 오래전의 일이라 잠시 잊고 지냈던 것 뿐.
하지만 가까워진 사람을 잃는 고통.
그 앞에서 무엇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은 타타라의 마음에 아직도 잔인한 흉터를 남긴 채이다.
“갑자기 그런 문제가 신경 쓰여? 타타라답지 않은데.”
“당신 따위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다고? 설마 몇 번 동침한 걸 가지고 애인 행세라도 할 생각은 아니지?”
“윽…”
생각보다 매섭게, 뿌리치는 말투로 거부해오는 그녀는 되레 이쪽을 원망하는 듯했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아신은 영원(永遠) 속에 살아. 이게 뭘 의미하는 지 알아?”
“나야 당연히 모르지.”
“아무리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도 결국엔 혼자가 된다는 의미야.”
언제나 밝고 지나치게 활달한 마이페이스의 타타라만을 봐왔던 휘진에게 씁쓸한 기색으로 자조하는 그녀의 모습은 낯설게 다가왔다.
다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마음을 에둘러 포장한다거나 숨기는 등의 가식이 없었다.
“난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야. 당신을 만나기 200년 정도 전에 당신처럼 이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남자가 있었어.”
“뭐?”
이건 또 쇼크이다.
어쩐지 아무 생각 없어 보여도 철저하고 의심 많은 타타라가 지구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자신을 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싶었다.
타타라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닌 듯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그 역시 당신처럼 발랄한 사람이었지. 난 그런 사람을 처음 봤었으니까 나름대로 마음도 주고 정도 주었어. 하지만 그도 결국엔 끝까지 함께할 수 없었지. 짧았지만 되돌아보면 나름 행복한 나날이었어. 하지만 난 그걸 되풀이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걸.”
“….”
“당신이 없어졌을 땐 조금 괴로웠어. 하지만 당신과 더 가깝게 된다면 분명 이별의 순간에 이보다 슬플 거야. 그러니까 딱 이 정도의 관계가 적당해. 적당히 연금술을 가르쳐주고 적당히 농담 따먹기를 하는 시시한 관계 말이야.”
“내가 아신이 된다면?”
아신이 되기 위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어떤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휘진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싹’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도자라는 응시권.
1000명의 구도자 중에 아신이 되는 자는 한 명에 불과 했으니까.
어찌 보면 순진해 보이기도 하는 휘진의 모습에 아슌푸틀은 애매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글쎄…?”
그리고 대화는 끝났다.
◈ ◈ ◈
애매모호하고 상상도 못했던 이유로 타타라에게 거절당한 휘진은 애써 평정을 가정하며 그녀와 함께 연구동 밖을 나섰다.
재회의 기쁨을 형식상으로나마 나누기 위해 성 밖에 고급 술집을 함께 들리기로 한 것이다.
휘진은 밤이 있고, 술이 있고, 단둘이라는 조건이 있으면 남녀사이의 친구란 없을 수 없다는 주의였다. 하지만 타타라의 의사표명이 상당히 완고했기 때문에 친구관계에 대해 또 다시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어색하게 함께 슈펜하우져 성을 나서려던 휘진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이 몸은 타타라를 만나러 왔단 말이야! 당장 비켜!”
“어허, 꼬마야 거짓말하면 못 쓴다. 그렇게 함부로 부르다간 타타라님에게 잡혀가서 말린 표본이 되고 말걸?”
“난 꼬마도 아니고 몽고메리 피닉스,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는 아신 맞다고오!”
“그러시겠지~ 그 나이에 꿈은 아주 소중한 거란다.”
어린 아이를 어르듯이 아빠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상대하는 경비병과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화를 내는 피닉스였다.
멀리서도 보이는 새빨간 머리인데 용케 여기 올 때까지 못 알아차렸구나.
그렇게 티는 나지 않아도 역시 섬세한 휘진의 마음엔 조금 데미지가 있는 듯 했다.
“윽!”
그것은 타타라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지척에서야 피닉스를 발견하고 흠칫 굳는다.
“어? 타타라!”
“추…추…추…추…충성! 으악! 애야! 못써 빨리 돌아와!”
낮은 신장을 이용해 경비병의 발밑을 파고들어 순식간에 타타라에게 달려드는 피닉스와 뒤늦게 제지하려는 경비병.
하지만 도도도 달려든 피닉스는 타타라의 허리춤에 풀썩 안겨버렸다.
그것을 보고 세상이 멸망하는 광경을 본 예언자 같은 표정을 짓는 경비병.
“한 200년 만인가? 엄청 반갑잖아!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뭐, 잘 지냈어. 일단…일단… 이익!! 떨어져 쫌!!”
찰거머리처럼 붙어대는 피닉스와 그녀를 달라붙은 껌 딱지 때듯이 밀어내는 타타라.
설마 일상생활에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휘진과 경비병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그 위대한 아신 타타타 타타라가 허둥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하나도 안 반갑다는 반응이잖아.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때문에 망쳤던 내 프로젝트가 몇 개인지 알아?”
“으이구! 그렇게 나쁜 일만 하니까 ‘재앙의 마녀’니 뭐니 하는 악명이나 얻지!”
“200년 전 일을 아직도 들먹이다니… ”
몇 분간의 사투 끝에 피닉스를 간신히 떨어뜨린 타타라와 그게 못마땅한 듯이 입술을 뚱하게 내민 피닉스.
뒤늦게 휘진을 발견한 피닉스는 그 ‘불~편’함의 화살을 휘진에게 돌렸다.
“이게 뭐야! 기껏 이런 곳까지 끌고 와 놓고 방에다 버리고 가버리다니! 피닉스 님의 시중을 더 공손히 들란 말이야!”
“응, 미안.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타타라가 산데.”
“응!”
휘진의 임기응변에 단세포만큼이나 쉽게 넘어가주는 피닉스.
이런 그녀에게 그 마왕 타타라가 왜 그리 쩔쩔 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느긋하게 셋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휘진, 역시 난 빠지면 안 될까?”
정정.
적어도 타타라에겐 느긋한 시간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 ◈ ◈
원래는 바에서 회포를 풀 예정이었던 타타라와 휘진은 피닉스라는 변수를 만나 그대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간단한 식사 이후 다시 연구동.
피닉스의 힘을 되찾아주기 위해 타타라가 힘을 쓰기로 했다.
“자, 빨리 들어가. 옷은 다 벗고.”
회반죽으로 되어있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어두컴컴한 지하에는 거대한 실험실이 있었다.
연구동 크기만큼의 공동.
타타라의 연구동도 그렇게 화려하진 않지만 이곳은 정말 인테리어라고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벽돌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맨바닥에 박혀 있듯이 안치된 거대한 솥.
‘마녀의 마법 솥’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연상될 정도로, 처음보지만 익숙한 모양새이다.
“여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한두 번 해봐?”
“그것도 까먹었는걸. 그럼 나 한숨 자고 있을 테니까 끝나면 깨워줘.”
칭얼거리며 알몸으로 솥 안에 들어가는 피닉스.
워낙 그 크기가 엄청난지라 피닉스가 들어가서 서도 머리털하나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자세히 묘사하자면 피닉스 20명 정도는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휴우…”
“왜 이렇게 꼼짝도 못해?”
피닉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타타라.
우선 눈에 안 보이는 것만 해도 마음에 안정감을 얻는 모양이다.
솥에 들어간 지 3분도 되지 않아 피닉스가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타타라는 그 소리를 듣고 입을 열었다.
“몽고메리한테는 빚진 게 많아.”
“네가 빚도 진다고?”
언제나 악덕 채권자일 것 같은 타타라가 무려 빚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