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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91화 (91/154)

91화 대공님과 첫날밤(3)

“언제나 아슌푸틀 네 곁에 있을게. 모두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나만은 내 옆에 서서 같이 돌을 맞아줄게.”

“나는… 나는…그대 역시 죽게 만들 거야… 또 다시 내 옆에 서있기로 한 사람을 잃게 될 걸세.”

“그런 일 절대 없어. 이 세상에 나보다 강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나의 신념이 그대를 제물로 원한다면 나는 주저하면서도 같은 선택을 하고 말걸세. 그대는 떠나야해. 결코 내 옆에 서서는 안 돼.”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일까? 공포에서 기인한 거부와 함께 휘진의 품에서 벗어나려는 아슌푸틀.

휘진은 발버둥치는 그녀를 절대로 놓지 않았다.

“알게 뭐야? 사랑하는 사람의 신념을 위해서 죽을 수 있으면 그게 남자지.”

수면 총을 맞은 사슴처럼 날뛰던 아슌푸틀의 몸이 축 늘어진다.

동시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큰 눈망울로 휘진을 올려다보았다.

평소보다 2배나 커진 토끼 눈에, 충격을 받은 듯 반쯤 벌린 입.

“아슌푸틀 알고는 있었지? 나 너 엄청 좋아해.”

내 애를 낳아줘.

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

정답이 없는 이 답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답을 내 놓을 것이다.

깊숙이 들어가자면 이 질문은 결국 형이상학적인 영역.

정형화된 대답은 불가하다.

따라서 전 세계가 공유하는 미의식은 결국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휘진은 그 답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창공을 담은 듯이 푸르른 아슌푸틀의 눈동자.

도저히 인체의 일부라고 할 수 없는 형형색색의 찬란함이 매혹적으로 어른거린다.

엷은 쌍꺼풀 위로 소복하게 쌓인 눈 같은 숱 많고 긴 속눈썹.

촉촉하게 젖어 파르르 떨리는 그 자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을 갑갑하게 조이는 통증을 느끼게 한다.

“아…”

휘진의 갑작스러운 고백을 듣고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던 대공님.

한참을 숨도 쉬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있던 아슌푸틀은 휘진의 손이 뺨을 부드럽게 감싸자 탄식을 내쉬었다.

아이의 피부처럼 보드라운 뺨이 손에 찹쌀떡처럼 감긴다.

그렇게 큰 편이 아닌 휘진의 손임에도 비율 깡패인 대공님의 얼굴 반쪽은 고스란히 그의 손바닥 안에 전부 들어왔다.

어색한 듯이 시선을 돌리려는 대공을 붙잡은 채 휘진은 똑바로 그녀의 눈동자와 마주쳐갔다.

“대답해 줄래?”

재촉하지 않는 말투로 부드럽게 대공을 회유한다.

앞으로 한 걸음씩… 조심스러운 상황이 휘진을 점점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던 대공답지 않은 망설임.

길을 잃은 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헤매고 있다.

“나는… 나는…”

휘진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휘진의 반응에 대공의 안색에도 초조함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휘진은 그런 그녀를 몰아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도리어 역효과다.

그녀가 어떤 과거와 아픔 때문에 관계를 거부하는지 앞선 대화로 대충 짐작이 가능했기에, 다소간의 유예기간을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느 샌가 느슨하게 풀린 손깍지를 휘진 쪽에서 먼저 풀어내었다.

그리고 엄지를 이용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천천히 닦아주었다.

“지금은 대답하지 않아도 돼.”

휘진은 천천히 말을 잇는다.

“나는 너를 위해 죽어도 한 점 후회 없을 거야.”

몇 번이나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것일까.

지지부진한 결단에 먼저 내쳐지는 미래를 예상했던 대공은 휘진의 선언에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어떻게 지금도 본인의 생각만 하고 있었을까.

그가 얼마만큼의 각오를 품고 이런 말을 하는지 자신은 전혀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있었다.

언제 다가올지도, 아니 실제로 존재하지도 못할 이별을 미리 그리며 뒷걸음질만 치고 있다.

그런 자신을 향해 그는 기꺼이 계속해서 손을 뻗어준다.

아무리 매몰차게 내치려해도 지금 이 뺨의 온기를, 눈물을 훔쳐 주는 자상함이 마음을 뒤 흔든다.

“술을… 조금 더 마시지 않겠나?”

“좋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는 휘진은 아슌푸틀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품을 열어 주었다.

새처럼 몸을 틀어 그 사이를 비집어나가는 대공.

맞붙어 있던 신체가 떨어지자 쌀쌀한 바람이 괜시리 옆구리를 쿡쿡 쑤신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비겁한 자기 자신을 아슌푸틀은 조소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여있던 유리병을 통째로 손에 쥔 아슌푸틀은 애써 호기심어린 휘진의 눈길을 피한 채 코르크마개를 딴다.

쉼 호흡으로 숨을 가다듬고 묘한 구석이 보이지 않도록 감정을 갈무리한 아슌푸틀은 처음 만났던 정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담담히 대화를 이어간다.

그 말투는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아까까지의 격정은 보이지 않는 매우 정돈된 목소리.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애주가라네. 온갖 미주를 혀로 굴리는 것이 소소한 유희라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 몸’이라는 거리감 느껴지는 1인칭이 아닌.

어느덧 자연스럽게 자신을 ‘나’라고 칭하는 아슌푸틀 대공.

관계라는 것은 정말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라고 무심코 생각했다.

“이 북해의 벌꿀 주를 가장 깊게 음미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더군. 나는 여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방법이네.”

본인 역시 방금 한 말이 낯 간지러운 말 돌리였다라는 분별은 있다.

다만 이렇게 해서라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먼 훗날 오늘을 돌아볼 때 반드시 후회에 잠길 것이라는 직감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성의 입술을 주배(酒杯)삼아 혀를 축이는 방법이라더군.”

“응?”

갑자기 나온 대공의 북해 문화 교육에 언뜻 어리둥절하던 휘진의 눈이 번쩍 띠였다.

대공은 공연스레 손목의 머리끈을 풀어 포니테일로 뒷머리를 묶었다.

“그대가 앞서 맛을 보겠나?”

아슌푸틀은 창피스러운 듯이 가만히 술을 조금 머금고 먹이를 조르는 아기 새처럼 벚꽃 빛 입술을 모아 삐죽인다.

그 맵시가 무척이나 앙증맞아 휘진의 입가에도 아빠미소가 서렸다.

예정대로 계획은 순조로운 모양이다.

화장도 하지 않았는데 반짝거리는 입술이 천천히 클로즈업 된다.

침대의 시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BGM삼아 두 사람의 호흡이 얽힌다.

수분을 띤 소리.

차디찬 주정(酒情)이 뜨거운 열락 속에서 말캉거리는 살덩이와 함께 헝클어졌다.

살포시 내려앉는 콧소리가 술기운과 함께 머리를 어질 거리게 만들었다.

아슌푸틀의 입술사이로 흘러나오는 술을 받아마시던 휘진은 조금 거칠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뾰족하고 까슬거리는 대공의 혓바닥과 가지런한 치열.

젤리보다 말캉거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곧바로 혀를 밀어 넣는다.

“후웁…!!”

당황한 듯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뻣뻣한 나무토막이 되어버리는 아슌푸틀. 하지만 술로 살짝 차갑게 식은 그의 혀가 구강 점막 구석구석을 핥아감에 따라 아슌푸틀의 몸도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푸우우…”

황급하게 탭을 치는 대공님의 모습에 입술을 떼어내었다.

한 몸처럼 맞붙어있던 두 사람이 떨어지고 대공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동작 하나 하나가 저렇게 전부 그림이냐.

참고로 그녀의 입술을 통해 마신 북해의 벌꿀주는 세상에서 제일 맛이 좋았다. 리얼 꿀맛이다.

“조금은 숨을 쉬게 해주겠나?”

난처한 듯이 겸연쩍은 듯이 혀를 삐죽 내밀고 헥헥 거리는 대공님.

술기운과 더불어 사과처럼 새빨갛게 변한 얼굴은 직접 만지지 않아도 화끈거리는 것을 짐작할 정도다.

“설마 이제껏 숨 참았어?”

“키스 중인데 어떻게 숨을 쉴 수 있겠나.”

“…코로 쉬면되잖아.”

“아…”

그다지 놀라운 사실도 아니건만 경험이 일절 없는 아슌푸틀의 입장에선 퍽 새로운 깨달음이었나 보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대공님보다 서툴고 풋풋한 모습에 괴롭혀 주고 싶은 마음이 마구, 마구 솟아난다.

“흥!”

왜인지 갑자기 토라지신 대공님.

혼자서 팔짱을 끼더니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입술을 삐죽거린다.

“어떻게 처음부터 능숙할 수 있겠는가? 아아, 경험 많고 능숙한 그대라면 지금 이 몸의 모습이 미숙한 어린 애의 치태로 비치겠구나.”

“그럴 리가 있나. 아슌푸틀 무척 귀여웠는데?”

“이 몸은 귀엽지 않느니라.”

살짝 애교 섞인 변명에도 여전히 한쪽 눈썹을 치켜뜬 채로 고개를 홱 돌린다.

어느새 바뀐 1인칭, 나름의 시위인 모양인데… 귀여운 걸 귀엽다고 해야지 뭐라고 해야 해?

아까보다 배는 부풀어 보이는 입 꼬리가 못마땅한 듯이 내려가 있는데 저것도 귀엽다.

“내 말은 아슌푸틀이 정말로 사랑스럽다는 얘기였는데 아니야?”

“이 몸은 사랑스럽지 않….”

아까처럼 고스란히 반박하려던 아슌푸틀이 무릎을 모으고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진짜 폭발이라도 할 듯이 벌겋게 달아오른 귀에서 스팀이 나오는 것 같다.

휘진이 여기저기 콕콕 찔러보아도 보지도 않고 팔을 치우려할 뿐… 다리 안으로 푹 숙인 얼굴을 당최 보여주질 않는다.

“그대는 낯 부끄럽지도 않은 겐가? 사랑한다느니 귀엽다느니 공치사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모기처럼 기어가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는 아슌푸틀.

고개를 숙이고 있기 때문에 똑바로 가르마를 탄 정수리가 무척이나 잘 보인다.

휘진은 거기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며 뺨을 꼬집어 주었다.

“바보구먼.”

등껍질 안에 푹 숨어버린 거북이처럼 당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몸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 말 알고 있어? 입술 위라면 애정의 키스.”

백합보다 부드러운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지다가 입을 맞추고,

“손 위라면 존경의 키스…”

땀방울이 맺혀있는 이마,

“이마 위라면 우정의 키스…”

가냘프게 뻗어 있는 다리,

“발등 위라면 애착의 키스…”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일련의 행위를 이어간다.

조금 내려와 복숭아 빛으로 상기되어있는 뺨.

“뺨 위라면 만족의 키스…”

떨리며 감긴 백설(白雪)이 내린 듯한 눈,

“감은 눈 위라면 동경의 키스…”

붉게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목덜미,

“목이라면 욕망의 키스…”

이래도 안 일어날래? 하는 오기가 섞인 장난이었지만 아슌푸틀은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아슌푸틀이 부끄러움에 폭발해버리기 전에 가볍게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고 그 외는 전부 광기의 행위.”

아슌푸틀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눈을 뜬 그녀의 눈동자는 혼란으로 물들어간다.

예전에 소설에서 봤던 문구 같은데 이런 오글거리는 말을 입에 담다니. 휘진도 술에 맛이 갔나보다. 아님 아슌푸틀에게 취한 건가.

스스로 생각해도 거칠어진 목소리로 그는 말하고 있었다.

“너라면 난 이 모든 걸 할 수 있어.”

다짐하듯 띄엄띄엄 막히는 목으로 간신히 소리를 낸다.

마른 입안을 다시금 술로 적시고 싶어졌다.

“내가… 너를 가질 거야.”

이토록 강렬한 소유욕을 갖게 된 적은 없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성을 홀리는 마력이 있다면 필시 이런 것이리라.

거부할 수조차 없이 위험하게 마음을 빨아들이는 대공님의 흡입력은 최소한의 브레이크마저 고장내버렸다.

“입술로 마신 술은 맛있었어?”

“무척이나… 달콤한 첫 키스였다네.”

휘진의 손끝이 아슌푸틀의 베이비 돌 리본의 프론트 리본을 조용히 풀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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