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대공님과 첫날밤(2)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대공님과의 대화는 즐겁다.
평소에 던져지는 어려운 주제들이 가장 큰 걸림돌이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어려운 대화보다는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물어보는 일이 되었다.
“저런…정말 고생이 많았겠구나.”
북해에서 했던 고생을 약 5배 정도 부풀려서 이야기 해 주었다.
어차피 대공님에게 감사를 받을 예정이라면 굳이 밍밍한 히키코모리 라이프보다는 역전의 스파이 이야기를 하는 편이 좋지.
대공님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딱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정말 진상을 알게 되면 어떤 얼굴을 할지 두려운 반응이다.
절대로 모르게 무덤까지 가져가야지.
“아슌푸틀도 엄청 고생 많았겠는 걸?”
“치정자의 숙명 아니겠나. 염세, 피로와 끝이 없는 싸움이지.”
“자자, 오늘은 일 같은 거 걱정 말고 마셔. 모처럼 좋은 술이라며.”
“후후, 잔을 비워두었던 것은 그대 아닌가?”
그녀의 손에 들린 술잔에 공손히 술을 채웠다.
투명한 술잔에 담긴 맑은 황금빛을 띄는 벌꿀주로 건배다.
유리가 부딪히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아슌푸틀과 휘진은 사이좋게 술을 들이 부었다.
“잠시만 기다려주겠나? 의복을 갈아입고 오겠네.”
갑자기 옷을 갈아입겠다고 오겠다니.
휘진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진짜 그린라이트 맞는 것 같은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섣불리 확인할 수가 없다.
행여나 설레발로 대공님한테 미움 받는 것은 피하고 싶으니 말이다.
“아…”
휘진의 기색을 보고 반 박자 느리게 자신의 말을 곱씹은 아슌푸틀은 멋쩍은 듯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변명이라도 하듯이 우물쭈물 덧붙인다.
“술을 마시기엔 부적절한 복장이지 않나. 오늘은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바빴으니 말이네.”
“알아, 알아. 아하하하, 그렇게 말하면 내가 이상한 생각이라도 한 것 같잖아.”
사실 휘진은 이상한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사내들이란 술만 들어가도 번뇌에 시달리는 게 아니었던가? 그대는 특히나 말이지.”
“에이, 나처럼 여색과 먼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래.”
톡 쏘는 말투가 어째 휘진의 여성편력을 질투하는 낌새에 조금은 찔린다.
다소 거칠어진 발동작으로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아슌푸틀.
그녀의 등에 대고 휘진이 한 마디 했다.
“여기서 망부석처럼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다녀와. 엿보지 않을게.”
“최대한 빨리 올 테니 기다려주게.”
시간 정지를 하고 곧바로 훔쳐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힌 휘진은 연거푸 두 잔이나 술을 따라 마셨다.
번뇌와 번민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는다.
저 문 뒤에 벗고 있는 대공님이 있는데 여기서 고추가 튀어나오지 않게 팬티로 수납정리를 하고 있는 꼴이라니!
아예 적당히 예뻤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트를 꽉 움켜쥐고 있는 상대에겐 제 아무리 휘진이라도 무려 ‘자제’라는 것을 하게 된다.
아슌푸틀이 말했던 대로 3분도 되지 않아 모든 옷을 갈아입고 왔다.
그 잠옷은 설마 하던 베이비 돌.
살결이 비치는 소재로 되어있는 민소매 원피스 잠옷이다.
대공님이 글래머 한 몸매는 아니기 때문에 퇴폐미 넘치는 모습은 아니지만.
허벅지 위를 간신히 가리는 짧은 기장이나, 헐렁한 민소매 사이로 노출되는 겨드랑이가 대공님의 우미(優美)함과 연계되어 크리티컬한 일격을 날린다.
오우야, 저거 허리 숙이면 꼭지 보일 정도로 헐렁한데?
“옷이 엄청 가벼워졌네.”
“여름은 아무래도 더우니 어쩔 수 없지. 보기 민망한가?”
“그럴 리가 있나.”
슈슈에게 북해의 여름은 그리 덥지 않다고 전해 들었는데, 아슌푸틀에게는 약간 다른가 보다.
융단 위로 슬리퍼를 신으며 걸어온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케이프를 무릎에 덮고 휘진과 마주 앉는다.
그 말인 즉, 저 베이비 돌은 앉는 것만으로 팬티가 보일 정도로 짧다는 뜻.
근데 굳이 저렇게 민망한 옷을 입고 나올 필요가 있나?
가려야 할 정도로 부끄럽다면 충분히 대체할 만한 편한 옷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말이다.
후우, 별의별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돌연 한숨을 내쉰 아슌푸틀은 벌꿀주를 호쾌하게 비우고는 다짐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아직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네.”
“뭐가?”
“그대가 나에게 소망하는 것 말이네. 울지 말라는 것이 정말 부탁은 아니었을 테고.”
“뭐든지 가능해?”
잠깐 고민하던 휘진의 회답에 아슌푸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손과 능력이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머리를 빗게 해 줘.”
◈ ◈ ◈
침대에 걸터앉은 아슌푸틀.
그 뒤에 앉은 휘진의 손에는 상아 빗이 들려있다.
머리카락은 사람의 체취가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부위 중 하나.
새삼스럽게도 뒤에 앉자마자 은은한 장미향과 섞인 술 냄새가 훅하고 풍겨져 온다.
참으로 사람 애간장 녹이는 냄새가 아닐 수 없다.
“머리카락 엄청 길구나?”
“음, 기르기 시작한지 3년은 되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
“이렇게 길면 조금 불편하지 않아?”
“이 작은 몸에 조금이라도 위엄을 붙이려면 이 정도의 불편은 감수해야지 않겠나.”
아슌푸틀의 머리 중간 부분을 잡아 들어올렸다.
비단 같은 촉감에 굉장히 얇은 모발이 마치 커튼처럼 가지런히 손에 잡힌다.
여담인데 서양인은 동양인보다 한 모근에서 나오는 머리카락 수가 월등히 많다고 하지.
“머리카락도 이 정도면 꽤나 무겁구나.”
“윽! 너무 잡아당기지는 말게나.”
손으로 고정한 아랫부분을 빗으로 시원스레 쓸어내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빗의 이빨사이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은발의 가닥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이쪽에 시선을 향하지 않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대공님.
어쩐지 두 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으고 괜스레 애꿎은 옷자락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지금은 어때? 아프진 않아?”
“딱 좋은 정도라네. 잘 손질해주게나.”
“진짜 관리 잘했다. 상한 부분도 없고. 샴푸 광고모델이라도 하려고?”
간지러운 듯이 숨을 죽여 웃는 대공님의 어깨가 떨린다.
어깨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베이비 돌의 어깨끈이 흘러내리려 한다.
이런 재미없는 농담에도 잘 웃어주니까 헛소리하는 맛이 난다.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둘 다 조용해지는 때가 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많아질 때, 혹은 그 순간을 잡담 없이 온전히 만끽하고 싶을 때.
할 말이 없는 어색한 침묵이 아니라, 그저 이것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침묵의 순간이.
그 고즈넉한 고요를 뚫고 창밖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여름의 밤비가 오는 모양이다.
“비가 오는군.”
“그러게.”
“나는 비를 좋아한다네. 세상의 잡음이 빗소리에 감춰질 때면 혼자와의 대화가 편해지니까.”
아련한 목소리로 멋진 말을 해주신 대공님은 흔들 그네를 타듯이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휘적거린다.
저번에도 말한 것 같지만, 대공님이 뭔가 민망할 때 하는 제스쳐이다.
“그대는 정말 이것으로 만족하는가?”
“대공님의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볼 때마다 항상 빗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꼬추로.
라는 속마음은 숨긴 채 묵묵히 빗질에 열중한다.
줘도 못 먹는 놈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런 게 전부 빅 픽쳐를 그리는 방법이니까.
어느덧 뒷머리가 끝나고 옆으로 옮겨간 휘진의 손길은 무심코 대공의 귓가나 목덜미 완만한 어깨선을 훑었다.
“웃…”
“왜? 아팠어?”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하게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기에 도드라진 조그마한 귀가 어쩐지 새빨갛게 달아올라있다.
이때쯤을 기점으로 해서 휘진은 빗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손으로 갈퀴를 만들어 이미 잘 정리된 아슌푸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갑자기 두피에 맨살이 파고드는 감촉에 대공의 어깨가 흠칫 굳는다.
귀 뒤편으로 나있는 솜털이 오소소 서는 것이 보였다.
아마 처음부터 이렇게 했더라면 대놓고 뭔가를 노리는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빗으로 접촉에 대한 거부감을 최소화 한 뒤 자연스럽게 손으로 가드패스.
이 정도면 뭐 여자 여럿 울리고 다닌 카사노바의 빌드업 아니겠는가.
예상대로 대공님은 갑작스럽게 목덜미와 귀 등을 만지고 돌아다니는 손길에도 아무 말 않고 잠잠히 있다.
“흐응…”
어느덧 열기를 띠기 시작한 하얀 피부가 손끝을 스칠 때마다 대공님은 알게 모르게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었다.
여자란 분위기의 동물.
귀와 목덜미는 많은 여자들에게 ‘분위기’라는 선행조건을 클리어할 시 성감대가 된다.
호감도도 적잖이 올려놨겠다.
술도 들어갔겠다.
비오는 야밤에 남녀가 한 방에 단둘이면 무드 조성치곤 훌륭하잖아?
“머리 조금 더 만져 봐도 돼?”
“그 정도야 아무렴 어떻겠나?”
대공의 어깨에 한 손을 올리고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약간 아이 취급하고 있다고 화낼지는 몰라도 어쩌겠어. 이렇게 하고 싶은 걸.
다른 여자들이야 어떻게 대하든지 딱히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데 유독 대공님만큼은 다르다.
이렇게 가냘픈 몸으로 무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충절 없는 충성이 다 생겨나니까.
“대공님도 많이 힘 들었지? 미안해 갑자기 없어져버리고.”
“….!”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와 자상한 목소리로 낮게 아슌푸틀의 귓가에 속삭인다.
어느새 슬쩍 끌어당긴 아슌푸틀의 등은 휘진의 가슴과 맞닿고, 마치 인형을 끌어안듯이 휘진은 대공을 자신에게 기대게 하고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를 꽉 무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큰거리는 콧날을 억지로 막아 세우려는 낌새도, 잠겨버린 목을 정돈하려는 기색도.
직접 보지 않아도 이 정도나 밀착해 있으면 다 느껴지는 법이다.
“그대는… 언제나 날 곤란하게 하는구나.”
한 번의 망설임 이후 아슌푸틀은 몸을 틀었다.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휘진의 오른손을 끌어와 조용히 깍지를 끼고 맞잡는다.
은어 같은 손길이 인간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부드러운 촉감이다.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채워지는 단단한 연결이 느껴진다.
아슌푸틀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우는 모습은… 정말로 보이기 싫었는데…”
완전히 휘진에게 기대는 모양새가 된 아슌푸틀은 애써 글썽이는 눈망울을 감추며 그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나한테는 보여도 괜찮아.”
“그럴 순 없네. 내겐… 내겐 그럴 자격이 없어.”
억지로 억눌렀던 감정이, 둑이 터지듯이 댐이 무너지듯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렇게나 많은 죄를 저질러 놓은 주제에… 어찌 뻔뻔하게 나만을 구원하려하겠나. 나만이 행복할 생각을 할 수 있겠나? 정의라는 명목 하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짓밟아 온 내가. 어찌 그대에게 기대며 나의 안위만을 찾을 수 있겠나?”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는 그녀가 지금까지 속으로만, 또 속으로만 삭혀 두었던 독과 같았다.
스스로를 원망하고 저주하는 목소리.
언제나 정의로운 길을 걸어가려하는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목이 터져라 절규하고 있던 그녀의 죄책감.
“내가 같이 짊어질게.”
당장이라도 바스러져 사라질 것 같은 안타까운 몸부림에 휘진은 조용히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나비처럼 여린 몸이 딸꾹질에 흔들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휘진은 결코 그 힘을 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