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89화 (89/154)

89화 대공님과 첫날밤(1)

휘진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류란 무엇이며 인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반영구적인 이 세계에서 겨우 100년의 수명도 채우지 못하는 인간의 불연속성은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갖는가.

30분 정도 전부터 기절한 아리스와 리리엘을 방치한 휘진은 우아하게 포도주를 마시며 우수에 잠긴 눈빛으로 창밖을 내려 보았다.

과연 1박 2일 동안 20번의 사정이란 아무리 타타라 특제 정력제의 도움을 받아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간 무분별한 자위-섹스 테크를 탄 휘진은 현자타임에 대한 면역력을 지녔으니 말이다.

“훗, 이런 기분도 꽤나 오랜만이군.”

알몸으로 시트를 적시며 나란히 누워있는 아리스와 리리엘을 보아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다.

그저 새벽 수산시장 돗자리 위에 깔려있는 참치 두 마리를 보는 기분이랄까.

담배도 엄청 땡기고.

딱 한 대만 필까?

문지기가 갖고 있는 연초 하나 정도는 얻어 필 수 있을 것이다.

근질근질한 기분에 입맛을 다시며 휘진은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성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방문 앞에 서있던 위사가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하며 말했다.

가슴이 뛴다.

냉혹한 지구인의 심장이지만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파르게 두근거린다.

그렇게 오래된 인연도 아니고, 심지어 특별한 이벤트를 그녀와 겪을 적도 없는데 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답은 단순하다.

“존나 말도 안 되게 예쁘잖아.”

휘진은 즉시 시간정지를 사용한 채 대공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진작 그러고 싶었지만 그 전에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것이 많다.

방으로 돌아가 3번의 샤워를 하고 머리도 깔끔하게 포마드로 넘긴다.

눈썹 정리와 면도, 마음 같아서는 화장도 조금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세계에서 남자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향수를 뿌리고 속옷도 깨끗하면서도 표범 무늬가 있는, 남성미와 탱탱한 엉덩이를 강조하는 드로워즈 팬티로 갈아입는다.

여성을 상대하기 위해선 언제나 짧은 손톱을 유지해야 하므로 손톱 역시 가지런하게 정돈.

손톱을 정돈하다보니 발톱도 신경 쓰여서 자르게 되었다.

“이 넥타이는 별론데.”

벌써 15개 정도의 넥타이를 갈아치운 휘진은 마지막으로 거울 속의 모습을 체크한다.

마치 첫 소개팅 나가던 대학시절이 생각나 즐겁고 설렌다.

그때는 갓 20살이 된 남자의 허세 때문에 술에 절어 상대방의 가슴을 주무르다가 구치소에서 깨어난 기억이 있다.

진짜 인생 끝난 줄 알았는데…

암울했던 지구의 기억이 쓸데없는 부분까지 따라와서 조금은 머리가 식었다.

“자, 그럼 가봅시다.”

◈          ◈          ◈

베아트레아의 방문을 열었다.

내 피앙세.

나의 줄리엣.

내 잠정 오나홀 겸 섹파.

앗, 본심이 드러났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모습을 그린다.

화사한 향기가 요란하게 코를 간질인다.

그 안에는 기분 좋은 편백나무의 냄새와 대공의 체취, 낡은 종이의 서걱거림이 섞여 있다.

꽤나 잦은 빈도로 술자리를 함께 했기에 눈에 익었던 대공의 방.

언제나 넘치는 집무량에 침실에까지 들여놓은 테이블은 문과 정면에 대치해 있다.

앉은키보다 높게 쌓인 각종 서류들과 그 사이에서 안경을 낀 채 펜대를 굴리는 대공.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녀는 그곳에 앉아있었다.

평소처럼 군청색의 간편한 드레스.

요요히 빛나는 하늘 색 눈동자가 종이 위의 문자를 서늘하게 더듬는다.

어제 새벽달이 조금 흘리고 간 달빛인양 찬란하게 빛나는 백금발이 그녀의 고귀함을 리본처럼 다발로 묶는다.

“조금 늦었구나.”

“미안, 일이 좀 많아서.”

너무 신난 탓에 노크도 없이 방문을 활짝 열어버린 휘진과 그런 그를 아무런 놀란 기색 없이 맞이하는 대공.

그녀는 무테안경을 조용히 내려놓고 펜을 잉크병에 도로 꽂아 넣었다.

“대공님의 오른팔 휘진. 임무를 완수하고 금의환향 했어.”

어설프게 기사의 예를 취하는 휘진을 아슌푸틀은 턱을 괸 채 찬찬히 바라보았다.

휘진은 그녀와 눈동자를 마주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어색하고 뻣뻣하게 서 있다.

뭐지?

당장 테이블을 박차며 달려들어서 포옹을 해주는 게 정상 아닌가?

사실 나 혼자만 겁나게 좋아하고 있었고 막상 고백하면 ‘미안, 넌 친구로서는 참 좋지만 남자로는 좀…’이라는 소릴 듣는 관계였던 것인가.

절대적으로 희박한 휘진의 자존감이 바닥을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을 때 쯤 대공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에게 걸어왔다.

드레스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장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둘이 있을 땐 아슌푸틀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응?”

“그대는 방금 대공이라고 했느니라.”

조금 토란 진 듯한 목소리가 무지 귀엽다.

그 위엄 넘치는 대공님이 겨우 이름을 안 부른 거 가지고 그렇게 삐지다니.

이런 갭이 그녀를 귀엽게 하는지도 모른다.

더불어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다름아닌, 휘진이라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전능감에 도취되게 한다.

“아슌푸틀.”

“그래, 그렇게 부르면 되는 걸세.”

기특하다는 듯이 대공의 손이 머리를 기분 좋게 쓰다듬는다.

세팅하는데 30분은 걸린 머리인데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걸려 헝클어진다. 그런데도 뭔가 발기할 것 같다.

대공님 손 기분 좋앗!

저 손으로 대딸 받고 싶다.

대 우주의 기원보다, 인간의 불연속성보다, 성관계가 더 중요하다.

손목 부근에서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향수의 향기가 당장 그녀를 쓰러뜨리고 싶게 만들었다.

“그대 덕분에 피닉스를 빼돌릴 수 있었고, 그대 덕분에 루블 왕국의 공세를 주춤하게 만들 수 있었네. 그대 덕에 무고한 엘프들의 희생이 줄었고, 이 한 걸음은 앞으로의 행보에도 크나큰 디딤돌이 될 걸세.”

“그럼 그럼, 내가 엄청난 공을 세웠지. 이게 다 아슌푸틀을 위한 것이었다고.”

여전히 기사의 예를 위해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사실 고개 정도는 들어도 되지만 부끄럽다), 되는대로 주워섬기던 휘진.

아슌푸틀은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휘진을 턱을 받쳐 든다.

마치 길에 버려진 고양이나 강아지를 쓰다듬으려는 듯이.

그리고 그 청명한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쳐온다.

엄청난 미모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데미지가 올 것 같다.

“그대는 나를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을 해주었는데.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깨달았다.

아슌푸틀의 눈꼬리에는 보일 듯 말듯 아주 아주 조그맣게 눈물이 맺혀 있었다.

죄책감에, 책임감에, 언뜻 대가 없어 보이는 그의 헌신에.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나를 괴롭게 하는 건가.

그의 무사한 안위에, 염치없이 그것만으로도 만족해버리고 마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무수히 많은 죄를 짊어지고도 스스로를 구제하려는 오만에.

“일단 우…울지 마.”

“쓰읍… 누가 울었다는 겐가?”

그녀는 황급하게 일어서더니 뒤를 돌고는 옷소매를 사부작거렸다.

그러고는 조금 빨개진 코끝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휘진을 일으켜 세운다.

“그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북해 최고의 벌꿀주를 준비했다네.”

“오! 저번에 먹었던 거랑 같은 거야?”

“그보다 몇 줄은 위에 있는 미주(美酒)이니 실망하지 않을 걸세. 일단은 앉게나.”

◈          ◈          ◈

베아트레아 아슌푸틀.

그녀가 12살이 되던 해, 가문은 전쟁을 겪으며 몰살당했다.

행복했던 나날들.

이제는 기억조차 흐릿한 과거의 따뜻함은 전화(戰火) 아래로 흩뿌려진 잿더미가 되어 마음마저 불살랐다.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하고 집사였던 바티스텡과 함께 도주에 성공한 아슌푸틀은 가장 밑바닥에 밑바닥부터 아득바득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늘이 내려준 정치인, 모든 상황을 뒤에서 조정하고 조율하는 흑막 중의 흑막.

당시 루블 왕국과의 전쟁이 끝나고 혼란했던 세태를 틈 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가문의 재건 준비를 끝낸 아슌푸틀.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베아트레아 가문은 지금쯤 벌써 어느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 되었을 것이고, 그녀 역시 떵떵거리며 남은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보았다.

권력이라는 달콤한 마약에 취해, 한 웅큼이라도 남의 행복을 빼앗아 자신의 쾌락을 공고히 하려는 악독한 무리들을.

그녀의 가문을 정치 싸움을 통해 멸망시키고도 여전히 번성과 번영만을 반복하는 무수한 귀족 가들을.

그들의 도가니에서 흘러넘친 잔혹한 기름방울이, 민초의 삶을 어찌 짓밟는지를.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흉년으로 황폐해진 밭 어귀에 굶어죽은 갓난아이를 끌어안은 아낙을.

땔감이 없어 모조리 얼음 동상이 되어버린 한 마을을.

화상으로 두 눈을 잃고 부모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죽어가던 한 병사를.

기실 아슌푸틀이 그 모든 것을 책임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따위야 그들의 삶이며 이 세계의 순리이다, 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더라면 그녀는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잔혹하게 짜인 세계의 규칙 속 가장 좋은 울타리의 안쪽에서, 호화로운 드레스와 장신구를 두른 채로.

그러나 아슌푸틀을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편안한 침대에 누워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 눈에 밟혔다.

아무리 훌륭한 진미와 술을 삼켜도, 손을 뻗어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가련한 삶들이 발목을 끌어 잡는다.

누구도 가려하지 않은 순례자의 길에 기꺼이 올라선 아슌푸틀에겐 그 대가가 주어졌다.

언젠가 타타라가 했던 말처럼.

비틀린 것을 바로잡으려는 자는 그 비틀림의 정점에 서야만 했다.

암살, 파괴공작, 재력과의 유착, 학살, 신체 실험.

아슌푸틀이 그토록 혐오하던 귀족들의 진흙탕에 아슌푸틀은 발을 담갔다.

만약 그녀가 타협을 했더라면 그녀에겐 구원의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서, 라고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정당화 했다면 여기까지 피폐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슌푸틀은 그럴 수 없는 인종이었다.

어둠을 응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했던 죄악감은 언제나 그녀를 난도질했다.

너덜너덜한 심장을 움켜쥐고도 나아가야만 한다는 책임감이 등 뒤를 채찍질했다.

그렇게 지쳐 쓰러지는 일만 남았던 그녀는 휘진을 만났다.

북해의 대공의 자리에 오른 뒤 만나게 된 남자.

농담으로도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애써 꾸며야 그럭저럭 봐줄 만한 정도.

매력을 느낄 곳이란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는 그녀가 그토록 질색해오던 권위와 체제에 아무런 선입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쉽사리 친해질 수 있었고, 그렇기에 자꾸만 함께 대화하고 싶었다.

그와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어항처럼 갑갑한 세상이 조금은 숨쉴만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은 현실도피에 불과하단 것을.

그럼에도 아슌푸틀은 그와 자신 사이에 놓인 가느다란 실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뒷모습을 모르는 휘진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호의와 충의를 바칠 때마다 아슌푸틀은 더럽혀지기 전의 자신을 떠올릴 수 있었다.

구원받는 느낌이 들었다.

때문에 묻고 싶었다.

“그대는 나를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을 해주었는데.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이 추악한 위선자에게.

순례자의 가면을 쓴 악의 화신에게.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일단 우…울지 마.”

금은보화도, 권력도, 하물며 몸도 아닌… 당황한 듯 눈물을 닦으려 드는 그의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