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애증의 리리엘(2)
무뚝뚝한 말투로 리리엘이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휘진의 방이었다.
게다가 한 마디 설명도 없이 욕실에 씻으러 들어가 버렸다.
휘진은 침대에 앉아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필사적으로 생각중이다.
자 일단 굳이 내 방까지 따라와서 씻는다는 건 섹스를 하려는 게 맞나?
아니면 그냥 수련 때문에 더러워진 게 신경 쓰여서 씻으려는 건가.
갑자기 왜 이렇게 전전긍긍해야하지?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괴롭히기만 하면 되는 건데.
묘하게 박력이 느껴지는 그녀의 행동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휘둘려야만 했다.
머리에 물기를 타월로 닦으며 가운을 걸친 리리엘이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침대에 앉아 손가락을 꿈지럭거리고 있던 휘진은 극한의 어색함을 느꼈다.
뭔가 여사친이랑 술김에 모텔 와서 하기는 하려는데 여사친이 씻고 온 사이에 술이 좀 깬 느낌.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매우 건강히 돌아오는 길이지. 내가 누군데.”
“어디 봐 봐요.”
멀쩡히 앉아있는 사람을 이곳저곳 짚어보던 리리엘은 복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만지작거리는 것도 어디까지나 할 말이 없어서 하는 일인 것 같고.
“무슨 표정으로 당신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 보인다.”
“당신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제 탓 같았어요. 제가 조금 더 잘 싸울 수 있었더라면 당신이 탈출할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았을까.”
“그야…”
석고상처럼 굳어있던 리리엘의 표정이 점점 색을 띠기 시작한다.
그토록 완고해 보였던 얼굴은 점차 녹아내리듯이 선명히 생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신이 미워요. 언제나 거짓말투성이에, 사람 거칠게 다루고, 맨날 맨날 성희롱에, 바보처럼 사람 마음도 몰라주니까.”
‘이야…이거…’
아무리 휘진이 여성에 둔감한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리리엘이 말을 하며 짓는 표정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무척이나 애달프고, 미련하고, 애증이 서려있다.
“하지만 진짜 바보는 저에요. 그런 짓을 당하면서도 당신이 없는 동안 당신만을 떠올렸어요. 후회하고 스스로를 미워하고 원망하면서도 당신이 살아 돌아오기를 바랐어요.”
리리엘의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기도하는 성녀의 경건함이 느껴질 만큼의 기백에 휘진도 조금 기가 죽었다.
워낙 예상 밖의 반응인지라 도리어 당황하게 된다.
당연히 차일 줄 알았던 고백상대에게 엄청난 기세의 대시를 받으면 이런 기분이 되려나.
파스텔 톤의 주홍빛 머리카락이 잔뜩 흐트러졌다.
머리 수건을 벗어던진 리리엘은 소중하게 휘진을 껴안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꽉 움켜쥐는 힘에 머리가 아플 정도다.
얇은 가운 너머로 리리엘의 보들거리는 가슴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샤워 이후 살짝 달아올라 살구 빛을 띠는 피부 너머로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정신없을 정도로 귓가를 울리는 심박은 리리엘이 결코 가벼운 다짐으로 이 말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당신만 없으면 저는 완전히 행복할 수 있는데. 스승님께 연금술을 배우고, 더 이상은 성적인 괴롭힘을 받지 않아도 되고, 키스엘 후작가의 차기 당주로서 걸맞은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었겠죠.”
턱을 가느다란 손가락이 받쳐 든다.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안은 리리엘이 눈을 마주쳐온다.
“저는 당신이 끔찍하게, 정말 정말 싫어요.”
정말 사랑스럽게도 귀를 쫑긋거리며.
“그러니까 영원히 제가 미워할 수 있게 제 옆에 있어주세요.”
목련처럼 부드러운 두 입술이 다정하게 포개졌다.
키스엘 리리엘 이바나.
객관적인 상황에서 보았을 때.
자신이 휘진을 좋아할 이유 따위 티끌만큼도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굴려 봐도 그와의 기억은 하나 같이 얼룩 투성이다.
지독한 음행에 어울린 경험 외에는 그 무엇도 없다.
풋풋하게 서로 얼굴을 붉힌 채 바라보았다던가.
가벼운 첫 키스에도 심장이 뛰었다던가.
섹스가 끝난 뒤 땀에 젖은 나신을 겹치며 사랑을 속삭였다던가.
그 무엇도 없었다.
약점이 잡힌 피해자와 그 약점을 고삐 삼은 가해자의 관계.
이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인데.
그저 살을 맞대고 비비는 것만으로 이런 마음이 들어버렸다는 것이라면 어찌 이리 허무한 관계일까.
평소 언제나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들을 배려하던 리리엘이라지만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은 아무리 봐줘도 멍청한 여자의 미련에 불과했다.
몸은 정신의 아래에 있다고 배워오고 믿어왔다.
만약 그와의 섹스에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한들 고고한 귀족의 긍지를 가진 자신이라면 결코 그에게 빠지지 않는 것이 맞았다.
“마음엔 공식이란 게 없더라구요.”
“갑자기 뭔 소리야.”
“아, 진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리리엘은 휘진을 끌어안고 부둥부둥거리고 있었다.
가운이 흐트러져 맨 가슴이 그의 얼굴에 잔뜩 부벼지고 있었지만 더 이상 그걸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다.
서로의 나신을 몇 번이고 보여 왔던 것이다.
이 정도의 접촉에 얼굴을 붉히는 모습은 없었다.
반가운 마음이 오퍼풀이 되어서 약간 머리가 고장이라도 난 것일까.
지금은 자신의 품에 그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낀다.
“나랑 하고 싶었던 거야?”
갑작스러운 리리엘의 분위기 전환에 휘진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다.
오랜 별거 끝에 종속도의 감소, 그에 따른 진심어린 반란은 없던 일이 된 모양이다.
강한 척하지만 실은 겁 많은 리리엘이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꾸는 일을 상상하긴 어렵기도 하고.
“…”
“잠깐만… 잠깐만 아파, 아파…”
안고 있던 팔에 꽉 힘이 들어갔다.
아마 볼을 부풀리고 뚱한 표정으로 있겠지.
재빨리 탭을 쳤지만 좀처럼 힘은 빠지지 않았다.
리리엘의 힘이 굉장히 강하지는 않지만.
“실컷 다른 사람 마음 어지럽혀 놓고 그런 말이나 하다니…”
“이게 원래 나인데 어떻게.”
“후훗, 그건 그렇네요. 당신다워요.”
침대의 모서리에 걸터앉은 휘진과 그와 마주보듯이 걸터앉은 리리엘.
원래 리리엘의 몸을 두르던 가운은 격렬한 헤드락 탓에 활짝 열려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여성의 가슴이란 아무런 방해 없이 접하게 되면 상상 이상의 촉감을 자랑하는 법이다.
거기에 C컵이라는 굉장히 준수한 미드를 가지고 있는 리리엘인 만큼 그 촉감은 한 발 더 극상에 치닫는다.
“앗…흐읏…”
휘진의 콧김만 아슬아슬하게 닿던 젖꼭지에 혀가 뻗어온다.
마치 젖을 빠는 아이처럼 달라붙어 휘진은 입 안에서 유두를 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뭉근하게 몽글거리는 감촉에 불과했던 것이 거듭된 자극에 따라 단단하게 뭉쳐간다.
리리엘은 허공을 붙잡으려는 듯 손을 허무하게 휘두르다 이내 휘진의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안겨온다.
조금 거센 호흡이었던 리리엘의 소리는 어느새 야릇한 비음을 내며 촉촉하게 녹은 교성으로 바뀌어왔다.
가슴을 가리거나 허벅지를 오므리는 거부 행위는 일절 없이 자신의 몸을 휘진에게 맡겨온다.
얇은 면바지위로 봉긋하게 천을 들어 올린 휘진의 물건이 가랑이 사이로 느껴진다.
밀착한 허벅지의 떨림이 전해지는 것이 새삼 부끄러웠다.
“헷…!!!”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목소리를 참으려 꽉 물고 있던 입술을 벌리고 해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탕을 녹여 먹듯이 느긋하던 휘진의 혀 놀림 사이로 날카로운 통증이 파고든 것이다.
간만의 애무를 느긋하게 만끽하던 리리엘에겐 강한 자극이었다.
적어도 타타라는 애무 도중 갑자기 깨문다거나 하는 거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고통을 느껴야할 그 자극에 리리엘은 자신의 허벅지가 휘진의 허리를 꽉 움켜쥐는 것을 자각했다.
끊는 점 바로 밑에서 기포를 올리던 뜨거운 욕망이 갑작스럽게 임계값을 넘어버린 것처럼.
앉아서 다리를 벌린 탓에 뻐끔 입을 벌리고 있던 리리엘의 슬릿에서 투두둑 꿀물이 쏟아진다.
허리가 골반이, 전신이 저도 모르게 발작적으로 주춤거렸다.
가슴에 코박죽을 시도하던 휘진이 깜짝 놀라 얼굴을 땔 정도였다.
“하으으으…진짜~ 아프잖아요…”
어설픈 변명을 시도하는 리리엘이었지만 휘진은 자신의 바지를 축축히 적시고 있는 리리엘의 애액을 보았다.
리리엘은 토끼 귀를 두 손으로 끌어내려 얼굴을 가린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요거 요거 안 본 사이에 거짓말이 늘어버렸네.”
“진짜 아팠거든요.”
“어디보자. 아 너 발정기구나?”
“아우아우, 말하지 마요…”
정곡이었다.
하필이면 그가 돌아오는 날에 정확히 맞춰 발정기가 시작된 리리엘.
토인에게 발정기란 성감과 성욕 모두를 증폭시키는 마법의 날이다.
물론 스스로가 문명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토인족에겐 선뜻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단어이기도 했다.
하지만 휘진에겐 아직 퇴화되지 않은 야성의 증표가 굉장히 반가운 이벤트였다.
이 기간의 리리엘은 누구보다도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니 말이다.
“너무 놀리지는 마요…”
여전히 얼굴에서 손과 귀를 떼지 못하는 리리엘의 가슴을 살짝 살짝 깨문다.
부드러운 살을 파고들며 옅은 이빨자국을 남길 정도의 세기로 다만 너무 아프지 않게 세심하게 공을 들였다.
리리엘의 배 언저리가 퍼득거리는 감각이 느껴진다.
눈을 치켜뜨고 점차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는 리리엘의 골반을 붙잡는다.
허벅지와 연결되는 옆구리의 잘록한 촉감이 최적의 그립감을 선사한다.
가슴을 애무하며 열어 놓았던 지퍼의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민 휘진 주니어.
리리엘의 허리를 살짝 당겨 내리는 것만으로도 그 첨단이 리리엘의 입구에 비벼진다.
“하읍…!”
“그렇게 목소리 죽이는 게 무슨 의미야? 평상시에는 잘도 앙앙 거리면서.”
“오랜만이라… 부끄러운 걸요.”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의 분신, 살결, 감촉.
목구멍 뒤를 억지로 긁어내며 나는 듯한 소리가 의지를 벗어나 새어나온다.
신체에서 가장 예민한 곳끼리 서로 이어져 있다는 실감이 묘하게 마음을 채운다.
“넣을게?”
“잠시만…이라고 했는데…하윽…!!”
사실 흥분이 극에 치달았던 것은 리리엘 뿐이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보여주는 고분고분한 모습.
게다가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해왔던 리리엘.
사실 휘진이 보기에 그녀의 마음은 일종의 착각이었다.
냉철하게 분석해보자면 사랑도, 그와 비슷한 무엇도 아니다.
약점을 잡고 휘두르던 사람을 증오했다.
심약한 리리엘에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증오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허용하기 힘든 행위였을 터.
그런 상태에서 자신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일절 책임이 없을지라도 일말의 책임을 느낀다.
그 죄책감을 덜기 위해 억지스러운 감정을 짜내었을지도 모른다,
라는 것이 첫째.
엄격한 정조관을 가진 판타지 세계관에서 여성으로서 자라온 리리엘이 과정이야 어떻든 몸을 허락했다.
몸을 섞은 남자는 평생 섬겨야 한다는 교육을 주입받으며 자란 그녀가 휘진에게 어느 정도 연심을 품는 것으로 거부감을 중화시켰다,
라는 것이 둘째.
리리엘의 안에 있는 진정한 M의 자질이 휘진의 S와 만나 극적인 화학 변화를 거쳐 사랑으로 변모했다,
라는 것이 셋째.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휘진은 생각보다 세상을 물로 보지 않았다.
사랑은 좀 더 오묘하며 복잡한 것이다, 라고 일단은 생각하고 있다.
어쩐지 머리가 차가워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