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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81화 (81/154)

81화 사랑의 메이드(2)

새벽의 부둣가는 한산했다.

적재되어있는 화물들의 그림자에 숨죽이는 자들이 있다.

죄다 망토로 몸을 두른 이남 이녀.

쿨쿨 잠을 자는 피닉스를 등에 업은 휘진과 미카엘 그리고 아나스타샤이다.

밀항선을 타기 위한 모든 절차는 미카엘에게 양도했지만, 아무래도 최근 여러 가지 사건으로 검문이 빡세졌기 때문에 접선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많은 것을 깨달았다.

판타지 세계는 절망적으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나스타샤를 그대로 보내야 하는 것은 못내 아쉽지만 솔직히 그동안 ‘질릴 만큼’이라는 나쁜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실컷 즐겨왔다.

“지금껏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니야. 이쪽이야 말로 고맙지.”

“당신이 아니었더라면 아가씨를 영영 잃었을 테니까요.”

미카엘은 자신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휘진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입장에선 자신의 연적으로부터 연인을 구출해주었을 뿐 아니라 후작의 구출에도 적극 도움을 주었으니 말이다.

그런 미카엘의 얼굴을 쀼루퉁하게 쳐다보는 아나스타샤를 본 휘진은 무심코 웃음을 흘릴 뻔했다.

당장 오늘 새벽까지도 아나스타와 침대에서 마지막 찐한 섹스를 했다는 것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진짜로 쓰레기가 돼버린 느낌이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기분 좋으면 상관없다’라는 쾌락 지상주의가 이 정도로 위험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나스타샤는 한 마디도 먼저 건네지 않았다.

그 동안 그렇게 열심히 봉사해 주었거늘…

이제는 모든 과거를 잊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이런 이별도 나쁘진 않다 싶다.

“지금입니다 모두 달리세요…!”

탐조등이 지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밀항선에서 승강기가 내려온다.

승강기라고는 해도 밧줄과 나무 원반의 조합인 조악한 기계장치였지만.

피닉스와 휘진을 태운 공선은 조명도 없는 공선에 올라타 어스름한 새벽별을 등지고 사라졌다.

◈          ◈          ◈

슈펜하우져 성의 휘진의 방.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방이었던 장소.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예전 그대로이다.

침대나 그의 옷가지 무엇 하나 치우지 않고 몇 개월이나 방치되었음에도 먼지 한 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청결도가 유지되고 있었다.

슈슈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 침대의 시트를 수거했다.

휘진이 실종상태가 되면서, 그의 전속 메이드였던 슈슈는 원래대로 성내의 메이드로 돌아갔다.

원래대로라면 진즉 퇴근을 했어야 할 시간이지만, 슈슈는 적어도 3일에 한 번 씩은 휘진의 방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누군가 시키거나 명령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월급제인 메이드에게 추가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슈슈는 휘진의 베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그 냄새를 맡았다.

시트는 몇 번이고 갈았어도 이 베개만큼은 바꾸지 못했다.

주인님이었던 휘진의 체취가 무엇보다 강하게 새겨져 있던 물품이었으니 말이다.

그랬던 베개도 이제와선 무향.

세탁한지 오랜 된 직물의 매케한 냄새만이 느껴질 뿐이다.

“주인님… 어디에 계신가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려는 것을 꾹 참은 슈슈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으며 방을 나섰다.

나서기 전 한 번 더 뒤를 돌아본다.

텅 빈 방안을 사정없이 내리쬐는 창백한 달빛이 적막과 공허를 돋울 뿐이었다.

이미 늦은 밤이기에 걸음을 재촉한다.

비록 북해가 아무리 치안이 좋은 편이라고 하더라도, ‘조금 발전한 중세 판타지’ 정도에 불과한 이세계에서 여자아이 혼자 돌아다닐 시간은 아니다.

처음에 휘진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슈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던 휴가를 무려 일주일 동안 사용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아루가 깨어있는 시간이 아니라면 정말로 하루 종일 울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울다 지쳐 잠이 드는 나날을 반복하고 오랜만에 출근한 그녀는 영혼이 빠져나간 기분으로 평소와 같은 작업을 끝낸 뒤 용기를 내어 휘진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파렴치한 농담을 건네면서도 상냥한 미소를 보여줄 휘진을 기대하며.

하지만 언제나 기분 좋은 주인님의 향기로 가득 차있던 방은 고작 며칠, 사람 손을 타지 않은 것만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창틀에 쌓인 먼지하며 환기도 되지 않아 매우 불결했다.

거기서 슈슈는 마지막 눈물을 흘렸다.

이제 다시는 울지 않겠다, 다짐하며.

적어도 그가 돌아올 이곳을 슈펜하우져 성의 그 어떤 곳보다 깨끗하게 관리할 것이라 다짐하며.

다시 얼굴을 마주할 그날 ‘다녀오셨어요, 주인님’이라고 웃는 얼굴로 반겨줄 것이라 다짐하며.

“어라…?”

슈슈의 발걸음이 천천히 멎었다.

익숙한 발걸음.

익숙한 실루엣.

익숙한 미소.

슈슈는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언제나처럼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커서, 꿈에서 언제나 그를 만났던 것처럼… 꿈에서 그가 튀어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없는 나날들은 너무나도 힘들었으니까.

현실과 꿈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는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주인님…”

떨리는 목소리로 비틀비틀 걸어간 슈슈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에 애처롭게 매달린 그리움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물감처럼 번져간다.

“미안, 걱정시켰네. 조금 늦었지?”

슈슈는 숨을 들이쉬었다.

“다녀오셨어요. 나의 주인님.”

청초하게 간신히 미소를 지은 슈슈의 눈꼬리엔 이슬 같은 눈물이 매달려있었다.

◈          ◈          ◈

일단은 너무나도 피곤했기 때문에 본성의 내부까지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공선의 장기간 체류는 도저히 인간이 할 게 못된다.

애초에 밀항선이라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고 좁아 터진 곳에 컨디션이 더욱 나빠진 피닉스를 케어 하느라 이쪽까지 진이 다 빠져버렸다.

아까까지도 등에 누워서 쿨쿨 자고만 있었고.

때문에 하룻밤을 슈슈의 집에서 머물려던 순간, 때마침 슈슈를 만났다.

“….”

피닉스를 슈슈의 남동생인 아루의 방에 눕혀 놓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섰을 때 슈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휘진을 바라보았다.

짧은 해후 이후 집으로 들어설 때까지 슈슈는 한 마디도 먼저 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보고 싶었을 텐데, 휘진이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 와중에 여자아이를 업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감정이 솟구치더라도 그 감정을 숨기고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능력.

처음엔 슈슈를 성노예 정도로 생각했던 쓰레기 휘진마저도 감화시키고 애정을 쏟게 만드는 그녀의 매력이었다.

힘든 일은 없으셨나요? 끼니는 잘 챙겨 드셨고요? 다치신 곳은 없는 거죠?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해야 할 말도 많았다.

반드시 하겠다고 수첩에 꼬박꼬박 적어둔 질문들과 물음들도 많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덥썩!

슈슈는 휘진에게 달려들어 가슴팍에 안겼다.

때로는 그 어떤 복잡한 미사여구보다 하나의 행동이 더 깊은 진심을 전하는 법이다.

무사태평하고 희희낙락 루블 왕국의 생활을 즐겼던 휘진이지만 슈슈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졌다.

온갖 화려한 금발이 난무하는 판타지에선 수수하기 그지없는 밤색 머리카락.

머리카락의 결을 손에서 느낄 수 있게 천천히 쓰다듬었다.

감정이 격에 달해 바들바들 떨리는 가녀린 몸이 느껴진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슈슈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무너져 내릴 것…같았어요.”

오래된 테이프처럼 뚝뚝 끊기는 슈슈의 목소리는 애써 삼킨 눈물로 잠겨있었다.

그 무뚝뚝한 휘진마저도 찔끔 눈물을 삼킬 정도의 애절함.

그녀가 어느 정도로 자신에게 의지해 왔었는지 뼛속까지 느껴진다.

“너무너무 울고 싶었지만… 제가 울어버리면, 못 참고 또 울어버린다면… 주인님이 정말로 나쁜 일을 당한 것 같으니까. 꾹 참고 기다렸어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석을 어루만지듯이 휘진의 손을 붙잡은 슈슈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끌어 자신의 뺨에 부볐다.

“정말 맞는 거네요. 정말 꿈이 아닌 거네요. 정말 슈슈의…주인님이 맞는 거네요.”

몇 번이나 꿈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는 번번이 뒤돌아 사라졌다.

야속하게도 현실을 난자하는 꿈의 뒤에도 슈슈는 꿋꿋이 먼지가 쌓인 방을 청소했다.

“아아…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로 다행이에요…”

“슈슈 별 일 없었으니까…”

“돌아오셔서… 너무나 다행이에요.”

숨이 갑갑할 정도로 다시금 휘진을 끌어안는 슈슈의 커다란 눈망울엔 어느새 아록아록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기쁨이, 환희가, 익숙함이, 안도가 제각기 다른 모양의 방울이 되어 바닥으로 옷으로 스며든다.

지구에 있을 적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커다란 사랑과 애정을 느끼게 해주는 당사자가 다름 아닌, 자신이 못된 짓을 잔뜩 저지른 슈슈라는 것이 휘진의 마음에 작은 파문을 던졌다.

“슈슈가 잘 참고 기다려줘서 돌아올 수 있었던 거야.”

최대한 다정한 말투로 꺼낸 말에 슈슈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실 저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주인님이 실종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슈슈는 무력해요… 슈슈는 주인님의 옆에 있기에 모자란 아이에요… 슈슈는…”

슈슈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휘진의 입술이 슈슈를 덮어갔다.

여전히 작고, 조금은 거칠고, 그럼에도 말랑말랑한 입술.

내밀어진 혀가 물컹한 살덩이와 얽히고 울음 탓에 거칠어진 호흡이 입으로 얼굴로 전해져온다.

슈슈는 눈을 꼭 감은 채 휘진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애타게 기다려왔다.

그와 꼭 손을 부여잡고, 키스를 하고, 몸을 섞고, 다정한 말을 속삭이는 이 밤만을.

“그렇지 않아, 슈슈는 나한테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야. 주종관계를 떠나서도.”

피로도 Max에 길바닥에서도 취침이 가능했던 휘진이지만 슈슈의 애정 어린 사랑 표시에 순식간에 급속 충전이다.

금방이라도 서럽게 무너질 듯한 슈슈의 두 눈이지만 지금 휘진의 눈엔 별빛보다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슈슈의 메이드 복 치마를 등 뒤로 뻗은 손을 이용해 걷어 올렸다.

팬티의 고무줄이 손목을 조이는 것을 느끼며 탱글탱글한 엉덩이를 움켜쥔다.

손등으로 느껴지는 천의 촉감,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복숭아 같은 엉덩이 살,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절묘한 골짜기.

긴장과 기쁨으로 슈슈의 발끝이 가볍게 들리는 것을 느끼며 휘진은 상체를 낮춰 슈슈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여린 피부가 타액으로 젖어간다.

살짝 짠맛이 나는 피부와 묶어 올린 머리카락에서 흘러 내려오는 귀밑의 체취가 휘진을 더욱 고양시켰다.

“하읏…주인님…휘진님…”

곧바로 달콤하게 한숨을 짓기 시작하는 슈슈는 하늘을 바라보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커다란 짐승처럼 거칠게 부풀어 오르는 그의 성기가 바짝 붙은 허벅지 사이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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