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소꿉친구 빼앗기(1)
피닉스 몽고메리는 정의의 아신.
반면 지금 휘진이 하던 짓은 정의와는 아주 대척점에 있는 비열한 행위이다.
메리가 눈치를 챈다면 어떤 불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
“아기 만들기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야! 오늘 처음 만난 사람과 그런 걸 하는 건 길고양이나 다름없어!”
무슨 말을 할지 조금 쫄아 있었는데 갑자기 혼을 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휘진 혼자만이 아니라 아나스타샤까지 싸잡아서.
“아기 만들기는 3년 이상 교제한 사람끼리. 손잡고, 뽀뽀하고, 결혼한 다음에 1년이 지나면 하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야.”
“너도 그렇게 했어?”
조선시대에도 그렇게는 안했겠다 싶은 생각에 저도 모르게 반론해버렸다.
“호…혼나고 있는 중에는 피닉스님의 말을 경청해야지!”
“처음부터 생각하기는 했는데 1인칭이 피닉스님인 거 좀 웃긴 거 같아.”
애초에 한국 문화권에선 자기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군대 제외) 오글거린다, 끼 부린다라고 욕먹는 판에 뒤에 ~님까지 붙여서 자칭하는 메리의 1인칭이 거슬렸다.
메리의 얼굴이 자신의 머리카락 색깔만큼이나 빨갛게 변했다.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들어온 변화구였던 모양이다.
“지금 피닉… 이 몸이 혼내고 있잖아!”
사실 이 몸이라는 호칭도 좀 어색하긴 한데 이것까진 나름대로 귀여운 맛이 있으니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샤가 먼저 너무 외롭다면서 나한테 안겼는걸? 그렇지?”
“그래 내가 먼저 그를 유혹했어.”
은밀히 강제 명령권을 써가며 위증까지 완벽하게 구현한다.
어느새 목욕 가운으로 몸을 감싼 아나스타샤가 죽일듯한 눈빛으로 노려보기는 하지만 무시해주고.
“게다가 요즘엔 마음이 맞는 남녀는 하룻밤만 잠자리를 같이하기도 해. 내 고향에선 원 나잇이라고 하거든?”
“뭣?!”
“너도 내가 마음에 든다면 안아줄 수는 있는데.”
손가락을 동그랗게 만들고 검지를 넣다 뺐다해 보였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다.
아마 무슨 제스쳐인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다만 ‘안아줄 수 있다’는 부분에서 은근한 기분 나쁨을 느낀 것인지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뭔 진 모르겠지만 기분 나쁘니까 금지야.”
“아, 아나스타샤.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서로 소개를 못 해줬네. 그럼 위쪽에서 다 같이 회의라도 할까?”
기껏 잘 꼴렸는데 싸지도 못하고… 아쉽더라도 메리가 보는 앞에서 그럴 수는 없다.
여차하면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아주 없지도 않고.
우선 자리를 옮겼다.
◈ ◈ ◈
미하엘과 아나스타샤의 어색한 조우 이후.
몽고메리와 휘진, 아나스타샤와 미하엘은 응접실에 오순도순 모였다.
역시 호화로운 가구들이 한 가득이지만 보기 흉하게 죄다 빨간 딱지가 붙어있다.
몽고메리는 집안을 뒤져 기어이 찾아낸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쪽쪽 빨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좋아, 선수들도 다 모였으니까 우리 작전을 구상해 볼까?”
“무슨 작전인데?”
“이름하야 ‘니콜라 후작 구출 및 휘진의 북해 밀항 대작전’이지.”
“너무 길어.”
피닉스가 투덜거리건 말건… 어차피 이 귀찮은 짓을 끝내야 스위트 홈 북해로 돌아갈 수 있다.
솔직히 밥도 맛없고, 걱정거리도 많고,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은 루블 왕국은 정이 붙질 않는다.
당장 북해에 돌아가기만 해도 함께 놀 수 있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여기서 또 아등바등 거려야해?
“그럼, 미하엘이었던가? 니콜라 후작을 구하기 위해서 네가 좀 애써 줘야 할 것 같은데.”
“본래대로라면 카를 남작이 총관을 통해서 편지를 날렸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를 죽여 버린 이상 처형장까지 연락을 할 방법이…”
“원망할 생각이라면 접어둬. 네님을 구해준 상황 자체가 일촉즉발의 기지를 발휘한 거였으니까.”
사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겠지만, 그 당시에는 니콜라 후작을 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즐거운 썸씽으로 끝내면 될 일이었고.
그래도 도의적인 책임이라는 것이 있다.
그렇게 된 이상 죄 없는 후작 아저씨를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카를 남작의 죽음을 은폐하는 겁니다. 그가 오늘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아는 건 총관과 저 둘뿐이니까요.”
미하엘의 말에 따르자면 만약 총관의 명의로 편지를 보낼 수 있고 카를 남작의 죽음을 숨길 수만 있다면 무리 없이 니콜라 후작을 피신시키는 것이 가능한 모양이다.
그 과정에서 카를 남작의 행방불명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총관이 적어도 며칠은 행방불명이 되어야 한다는 점.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머리아파. 피닉스님은 자러가도 돼?”
“이 닦고 자라.”
벌써부터 재미없어진 모양인지 눈을 끔뻑 끔뻑 감는 피닉스.
재생을 위해 많은 마력을 소비하면서 수면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나버렸다고 한다.
어차피 기대한 건 없으니 쿨하게 보내준다.
“그럼 편지를 보내고 총관을 죽이면 되겠네. 회의 끝. 안내해.”
“이걸로 끝이라고?”
“뭐. 어쩔 건데? 신묘한 기책이라도 있으면 내놓던가. 어쨌든 편지만 보내면 장땡이라잖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카를 남작의 저택 깊숙이 살고 있으니까요. 카를 남작이 원체 적을 많이 둔 지라 경호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 저택이 이 근처이긴 한 거지?”
“마차로 15분 정도 거리이긴 합니다만…”
그 어떤 경호도 어차피 시간 정지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
◈ ◈ ◈
“돌아가자.”
“네…넷? 벌써 끝난 겁니까?”
허무하리만치 간단한 결말이다.
방금 전 눈앞에 이 남자는 자신이 세계 최고의 암살자라며 호언장담하더니 카를 남작의 저택을 제 집처럼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계획했던 모든 일들을 끝내버렸다.
“염소수염을 한 70대 노인네 맞지?”
“정말 죽었다고요?”
“목이 270도 돌아갔는데도 살 수 있는 유연한 사람이라면 살아있겠지.”
밤에 산책을 나와 달맞이꽃을 꺾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처음 저택에 진입했을 때와 나왔을 때 모두 아주 평온한 모습이었다.
마치 마음먹은 이상 타겟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듯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동부 제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신 피닉스를 따돌렸다는 솜씨가 결코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편지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부치겠습니다.”
“우리 밀항 편도 잊지 마. 졸려죽겠네.”
미하엘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휘진에게 총총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뭐가?”
“당신이 없었더라면 카를의 손에 아가씨가 더럽혀 졌을 거고, 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도대체 무슨 사이야?”
별로 하나도 궁금하지 않지만 예의상 물어봐주었다.
“그녀와 저는 소꿉친구였습니다. 어렸을 때의 아가씨는 평민인 저를 친구삼아 노셨죠. 그 모습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시던 니콜라 후작께서 카를 남작에게 보내 버리셨지만요. 그 뒤로 아가씨를 짝사랑…”
“응, 그쯤 들을게. 지루하다.”
“네…”
열성적인 모습으로 설명을 하려던 카를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쳐진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조금은 불쌍하게 됐다.
그가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휘진의 정체는 사실 짝사랑하던 여자를 유린한 악당인데 말이다.
그녀가 이미 더럽혀진 것도 모른 채 안도하는 모습이 좀 딱했다.
-쩔그럭!
“옛다.”
“이게 뭡니까?”
“이제부터 배편도 알아보고 이것저것 돈이 들 거 아니야.”
묵직한 가죽주머니의 촉감에 미하엘은 화들짝 놀라며 내용물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빛 무리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바로 금화의 광채이다.
“이…이 정도로 많이는 필요 없는데요.”
“너희도 같이 도망쳐야 할 것 아니야.”
카를 남작이 죽고 총관이 죽었다.
용의선상에 오를 사람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들이 가장 최근에 몰락시킨 가문이 다름 아닌 니콜라 후작가니까.
“임마, 다 서로 돕고 사는 거야. 아나스타샤랑 도망치면 노잣돈으로 써.”
“가…감사합니다!!”
미하엘의 얼굴이 감동으로 일렁인다.
사실 그 돈은 방금 훔친 것이다. 실상을 알고 나면 세상에 착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려나.
알 바 아니다.
계속해서 밀려오는 하품을 참으며 휘진과 미하엘은 저택으로 돌아왔다.
◈ ◈ ◈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침실에서 손톱을 매만지며 달을 보고 있었다.
아래로 펼쳐진 부감은 황폐하게 변해버린 정원.
위로는 하늘이란 천개를 밝게 비치는 적월(赤月).
추억 속에서 그토록 아름답던 정원은 메케하게 먼지가 쌓인 앨범처럼 아릿한 향수를 자극할 뿐이다.
“후우…”
쓰디쓴 위스키를 잔에 따라 넘기며 아나스타샤는 상념을 털어냈다.
“많은 일이 있던 하루였네.”
이상한 남자를 만나고, 능욕 당한 끝에 처녀를 잃고, 원수를 죽이고, 어렸을 적 친구인 미카엘을 만나고, 이제와선 노예 계약까지 당해버렸다.
이상한 일도 이 정도까지 겹쳐버리면 차라리 후련했다.
애초에 정해진 대로 카를 남작의 성노가 될 일보다는 지금의 상황이 훨씬 났다는 것이 그녀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비록 출신도 아무것도 모르는 미치광이와 이렇고 저런 사이가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혼자 힘이라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던 원수를 갚고 아버지도 예정대로 구출되었다.
아버지 탓에 억지로 헤어져야 했던 미카엘도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겠지.
그에게 별다른 특별한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상황이 악화되었던 때, 이따금 그의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 압류 당했다면서 먹어도 돼?”
“윽…”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아나스타샤는 마시던 술을 주르륵 다시 잔에 뱉어버렸다.
예전이라면 교양이 없다느니, 후작 가의 영애가 가져야할 기품에 맞지 않다느니 당장 스스로부터 이것저것 따졌겠지만, 어차피 지금의 대화 상대는 그런 것을 챙겨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대이다.
“어차피 도망자 신세가 될 거 한두 개 엇나가도 상관없잖아?”
“그도 그렇구먼.”
“저기 너무 다가오진 말아줄래? 역겨우니까.”
“술이나 한잔 따라봐.”
“…방금 먹던 거 뱉은 잔 밖에 없는데.”
“그럼 더 좋지.”
휘적휘적 들어온 그는 테라스의 의자에 제 것처럼 편하게 앉으며 손을 까딱거렸다.
마지못하게 술잔을 한번 행구고 술을 따르자 휘진은 그 독한 위스키를 단 숨에 털어 넣었다.
아무리 봐도 제대로 된 예의범절을 배운 남자는 아니다.
아까까지 답답하게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고 얼굴을 찡그리는 휘진.
진짜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했다.
“안주도 없이 이런 걸 먹어? 알고는 있었지만 너 깡따구 장난 아니다.”
“용무가 없으면 나가줘. 모처럼 달빛이 아름다운 밤이니까.”
“까칠하게 왜 이러셔. 일이 잘 풀렸다고 보고하러 왔는데.”
그건 어차피 예상했던 바다.
자세한 정체는 모르지만 공군기지에서 아신을 빼돌릴 정도의 인물이다.
카를 남작이 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일개 군사 기지 정도의 삼엄한 경비를 갖추고 있진 않다.
거기에 길잡이인 미카엘까지 따라 붙었으니 실패할 리가 없겠지.
“그래서 칭찬이라도 기대하고 기어 들어온 거야?”
“응.”
“욱…!!!”
갑자기 의자를 끌어 바짝 붙어 앉은 그는 허락도 없이 가슴을 만지기 시작했다.
취침 직전이기 때문에 옷은 부드러운 나이트 드레스.
속옷도 없었기에 아나스타샤의 가슴은 휘진의 손아귀에 둥글둥글 굴러다녔다.
“승전보를 울린 동료에게 몸으로 축하 선물을 해주면 사기가 더더욱 올라간다는 연구 자료가 있다는데.”
“헛소리 그만하고…웁…”
휘진은 입에 술을 머금은 채 아나스타샤의 입을 부여잡고 진득하게 키스했다.
얽히고 얽히는 혀.
주황빛 주정의 씁쓸한 향이 잔잔한 정욕과 함께 번진다.
지금이라도 이 남자를 밀쳐내자.
하다못해 강제 명령권이라도 사용하게 만들자, 라며 생각하던 자신이 정작 그의 멱살을 잡을 뿐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