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몰락한 후작 영애(2)
미하엘로부터 얼추 설명을 들은 휘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남자 둘 사이에 여자가 껴버리면 부자간에도 살인이 일어나는 법이다.
삼국지에서도 그랬고.
시체를 치워둘 것을 미하일에게 지시한 휘진은 욕실에 던져둔 아나스타샤를 찾으러 갔다.
“아나스타샤.”
지구의 서양에서는 할머니나 쓰는 고리타분한 이름이지만 중세 판타지인 이세계에서는 굉장히 세련된 이름인 모양이다.
‘부활’이라는 의미의 굉장히 성스러운 이름이지만 실제 이 아가씨의 성격은 상당히 개차반이다.
“나가!!!
욕조에서 더러운 듯이 몸을 박박 닦고 있던 그녀는 휘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수건을 던졌다.
철퍽하고 얼굴에 맞은 젖은 수건. 은근히 아프다.
대공의 성에 있던 대욕탕보다는 훨씬 조그맣지만 굉장히 세련된 터키탕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성 같은 저택에는 욕실이 무려 9개나 있었고, 그 중 8개가 압류 당했다고 한다.
“너무 박대하는 거 아니야?”
“네 놈이 한 짓을 생각해라 짐승 새끼.”
“통쾌한 복수극을 도와준 남자를 짐승이라고 하면 마음이 아픈데 말이야.”
휘진은 아나스타샤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알몸인가 했더니 목욕 타월로 몸을 둘둘 말고 있다.
이래서야 보이는 것은 둥근 어깨 정도.
“네가 그렇게 싫어했던 약혼자 카를 남작 씨는 방금 전에 유명을 달리했어.”
“뭐?!”
“유명(幽明)이라 함은 곳 어두움과 밝음. 즉 저승과 이승을 뜻하니까…”
“그 정도는 알아! 그렇지만 아직 아버지가…”
“뭐 그 부분은 알아서하고. 난 약속대로 대가를 받아야겠으니까.”
“대가라면 이미 지불했어.”
옷을 천천히 벗고 아나스타샤와 같은 욕조에 쓰윽 잠수한 휘진.
얼마만의 목욕인지 행복함이 몰려오고 있다.
“난 단 한 번도 네 처녀를 대가라고 한 기억은 없는데?”
“웃…!! 그 거면 충분해. 네 놈에게 버릴 만큼 가치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순순히 물러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나스타샤의 검은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건 올바른 추측이다.
“그럼 여기서 널 죽이고 밖에 있는 미하엘이라는 녀석도 죽여야겠네.”
욕조에 반쯤 얼굴을 담근 채, 보글보글 거품을 내며 장난을 치는 남자.
그가 얼마나 쉽게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지를 알고 있는 아나스타샤로서는 장난스런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도 소름이 끼쳤다.
공포로 굳어있는 가운데도 그녀의 귀는 정확히 한 이름을 캐치했다.
“잠깐, 미하엘이라고?”
“그래, 널 몰래 짝사랑해왔다는 친구. 친해?”
똑바로 시선을 마주쳐오는 위험한 남자.
그가 표정을 읽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마음을 조였다.
“별로… 친하진 않아.”
“그럼 죽여도 되지? 목격자는 없는 편이 좋잖아. 게다가 그 녀석의 심복이라니까.”
-참방
“잠깐!!”
욕조에서 일어나 걸어 나가려는 휘진을 다급하게 붙잡는 아나스타샤.
새침한 성격과는 다르게 거짓말을 못하는 아가씨이다. 저렇게 티 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좋아 그럼 심장을 엮는 계약이다. 손 내밀어봐.”
“기필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잘근잘근 이를 갈면서 말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제부터는 휘진의 장난감이다.
지금 할 계약은 무려 심장을 엮는 계약이니까.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감자.
의식이 새카만 공간으로 빨려들어 갔다.
정신없이 휘감아 치는 기하학적인 무늬.
수많은 황금빛 점들과 그 수 억, 수 조 가닥의 금실들이 천천히 선명해져간다.
오호토란과 이상한 계약을 한 뒤, 휘진은 자신도 모르는 요상한 일들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숙지한다던가, 이런 삼계(三界)를 인지하게 될 수 있다던가.
타타라나 피닉스는 언제나 이런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것일까? 라고 생각하니 또 신기해졌다.
아나스타샤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정신없이 삼계를 뒤적이던 휘진은 깨지는 듯한 두통에도 계약의 내용을 설정해갔다.
화가 나는 척은 했다지만 아나스타샤는 그의 허술함에 웃음이 나왔다.
‘심장을 엮는 계약’은 특별히 어려운 마법이 아니다.
술자보다 강제력이 높은 사람과 재계약을 맺는 것만으로 아주 쉽게 풀 수 있고, 무엇보다 심장을 엮는 마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 명령의 구체성은 극히 낮았다.
만약 휘진과 계약을 맺더라도 그의 눈을 피해 계약을 풀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던 중.
아나스타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설마… 삼계 마법?”
삼계 마법이란 아신이나 구도자, 혹은 극히 드문 극소수의 선택받은 존재만이 일으킬 수 있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마법’이니까.
마법과 삼계 마법의 효과는 인공 가슴과 천연 가슴의 차이 정도로 크다.
마법이 보형물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그럴 듯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삼계 마법은 DNA 속 유전자에 의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거유이니 말이다.
“좋아. 너에게도 보여?”
인간의 정보 수용 한계를 초월한 삼계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던 탓에 머리가 터질 듯이 지끈거렸지만 휘진은 애써 태연한 척 정리한 계약서를 심상에서 구현했다.
손을 맞잡고 있는 이상 싫더라도 그 심상을 공유하게 된 아나스타샤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계약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았다.
1.휘진과 피닉스 일행을 북해로 돌려보내는 것에 최대한 협조할 것.
2.이 계약에 대한 것은 모두에게 비밀로 할 것.
3.하루 5회 강제명령권 사용에 동의할 것.
4.휘진은 니콜라 후작을 구하기 위해 여건이 허락하는 한 전력으로 협조할 것.
5.상기 내용이 지켜지는 한 휘진은 아나스타샤와 미하엘을 죽일 수 없다.
6.계약의 종료 시점은 휘진이 북해에 도착한 시점.
…이란다.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강제하는 강화조약도 이보다는 강압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4번 항목에 ‘여건이 허락하는 한 전력으로 협조’할 것이라니.
‘여건이 허락하는 한’이라는 말과 ‘전력’이라는 말이 병치될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설마 거부하진 않겠지? 모처럼 머리 팽팽 굴려가면서 겨우겨우 만든 거 거든?”
“…”
충격으로 멍해져있는 틈에 둘의 손끝에서 머물던 빛 무리가 서로의 심장에 안착했다.
이로서 계약은 성립된 셈.
사실상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다.
어차피 거부할 힘도 구실도 능력도 없다.
자기 한 몸이었더라면 얼마든지 초개처럼 던져버릴 수 있는 그녀였지만 소꿉친구였던 미하엘과 아버지의 목숨이 달렸다.
지금은 그에게 한껏 농락당하는 수밖에 없다.
“자, 그럼 경축할 만한 노예 계약을 기념해서 재미있는 게임을 해볼까?”
“마음대로 해. 네 말을 듣게 하고 싶다면 명령권을 행사하던가. 절대로 기꺼이 따르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그럼 그 어여쁜 가슴으로 내 고추를 씻는 것부터 시작해볼까?”
“거절한다.”
단칼에 대단한 아나스타샤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녀의 몸은 움직이고 있었다.
욕조에서 일어나 단숨에 목욕 타월을 벗어던지는 아나스타샤.
그녀의 얼굴에는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뭐…뭐…뭐…뭐어엇…!!”
“강제 명령권이라고 했잖아.”
의사조차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신체라…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한껏 비누칠을 시작했다.
당혹스러움과 수치심에 빨갛게 물들어가는 새하얀 피부가 봐줄만하다.
특히 가슴골을 위주로 천천히 스펀지로 거품을 낸 아나스타샤는 욕조 가에 걸터앉은 휘진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여자치고는 큰 키에 팔다리가 길고 늘씬해서 예상보다 다리를 벌려야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몽글몽글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맨 가슴의 촉감.
손으로 주무르기만 할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직접 맨살을 부비게 되니 상상 이상의 무게감이 있다.
비누로 미끈미끈해진 가슴이 상상 이상으로 부드럽게 휘진의 물건을 함몰시킨다.
아나스타샤는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자신의 가슴을 스스로 움켜쥔 채 물건처럼 그의 하물을 닦고 있다.
그것도 강제 명령권이라는 말도 안 되는 협잡에 당해서.
-뿌득…뽀득!!!
“오우 보기 좋네.”
파이즈리라면 어쨌거나 여성의 가슴을 이용한 유사 성행위이기 때문에 특별한 감촉은 기대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가슴을 휘진의 허벅지에 올리듯 상체를 숙인 아나스타샤는 양 옆 가슴을 팔 사이에 끼고 상상 이상의 압박감을 만들어 내었다.
타원형으로 찌그러진 가슴은 그만큼이나 충분히 휘진의 대물을 압박해 왔다.
녹아 버릴 듯한 포근함과 미세한 심장 박동.
단순히 점막과의 성교가 아닌 매끄러운 살점에 비벼지는 색다른 쾌감이 편안한 절정을 유도한다.
“그럼 이 상태로 진실게임을 시작해볼까?”
이 미슐랭 6스타 급의 호화 메뉴를 맛보며 성욕을 돋구어보도록 하자.
욕조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휘진.
그 아래 반신만 몸에 담군 채 열심히 거시기를 씻겨주는 아나스타샤.
수려했던 얼굴은 잔뜩 부끄러움에 일그러져있다.
니콜라 후작가는 굉장히 엄격한 정조관념을 보유한 보수적인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에서 금지옥엽처럼 자라온 아나스타샤 역시 혼전 순결을 고수.
결혼해도 1년은 손만 잡고 자야한다는 고리타분한 교육을 경청하는 순수한 아가씨였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버리기로 결심을 하고 원수를 갚기 위해 몸을 대가로 지불했다지만 그 생각은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 처음 만남 남자에게 알몸을 보이고, 순결을 잃고, 자진해서 가슴을 이용해 그 남자의 물건을 씻기고 있다.
“그래서 자위는 평소에 어느 정도로 해?”
“이…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래? 생각보다는 많이 안하는 것 같은데? 손가락을 넣는 거야?”
“아니, 직접 삽입하진 않아.”
그것도 이런 음란한 진실 게임에 강제로 대답하면서.
휘진은 자신을 씻겨줄 것을 명령함과 동시에 앞으로 두 시간 동안 결코 거짓말 하지 않고 대답할 것, 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아나스타샤는 또 한 번 놀라야 했다.
원래 심장을 엮는 계약엔 행동의 강제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행동에 관한 것은 어디까지나 피 계약자의 의사에 따른다.
가령 죽음을 각오한다면 이런 수치스러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 대신, 목숨을 잃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몸을 씻기고 있고 흑심 가득한 질문에 저절로 대답하는 중이었다.
“오늘 나한테 처녀 개통 당했을 때 어땠어?”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어.”
“그게 끝이야?”
“태어나서 가장 기분이 좋았어.”
최대한 평정을 가정한 채 무표정으로 대답하는 그녀다. 하지만 상종 못할 벌레라도 본 듯한 표정과, 달궈진 듯이 빨개진 귀까지 숨길 수는 없다.
아까까지 매섭게 노려보던 눈도 지금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곁눈질로 애꿎은 욕조 바닥을 쏘아볼 뿐이다.
정면을 보아봐야 그의 성난 뱀이 머리를 치켜든 채 가슴에 파묻혀있고, 위를 보아봐야 빈정거리는 듯한 조롱의 웃음만이 돌아올 뿐이다.
“엉덩이까지 살랑살랑 흔들면서 가슴으로 봉사하다니 어지간히 자지를 좋아하는 프렌드구나.”
“너와 계약이 아니었다면 이런 치욕을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음… 너라는 호칭은 너무 건방지니까. 적어도 당신이라고 해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