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남의 떡이 더 맛있다(3)
“기사님…”
아주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조그마한 목소리였기 때문에, 아리스는 세 번째나 되는 부름에 뒤돌아보았다.
혼란이 아직 수습되기도 전인 가슴을, 술과 목욕으로 달래려던 아리스.
그녀를 멈춰 세운 것은 한 눈에 봐도 숫기가 없어 보이는 메이드 소녀였다.
“무슨 일이죠?”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중첩된 아리스는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휘진이 실종된 일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례했습니다. 휘진님의 전속 메이드 슈슈라고 합니다.”
트레이에서 손을 땐 체 양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소녀.
세상에 그 어떤 악의도 품지 않을 것 같은 순진한 눈망울엔 구석구석 염려가 깃들어있었다.
“제 주인님은 돌아오시지 않은 건가요?”
아리스는 이 소녀가 휘진이 총애하던 전속 메이드임을 알아차렸다.
돌이켜 보면 아리스가 휘진을 다시 보게 된 이유도 일개 평민에 불과한 메이드를 위해 조폭들과 싸웠던 일 때문이었다.
“혹시 돌아오신 거라면… 어디에 계신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냉철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
그 모든 것을 갖춘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는 아리스였지만 지금만큼은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이 소녀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상냥한 거짓말이 좋을지.
그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슈슈의 초조함도 커져만 갔다.
아리스는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휘진 경은… 작전 중에 실종되었습니다.”
짧은 통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을 슈슈.
있는 힘껏 표정을 감추려하는 기색은 보였지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그…그런가…요? 실례했습니다.”
예의바르게 꾸벅 인사를 한 슈슈는 거칠게 트레이를 끌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 눈 끝에는 방울방울 이슬이 맺혀있었다.
◈ ◈ ◈
“히힛! 섹스다 섹스!”
그 시간 휘진은 시간 정지를 하고 세팅을 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준비물은 피닉스와 멀리 떨어진 방과, 의자, 밧줄, 가위, 가장 중요한 건 어여쁜 여자.
아직 이름도 묻지 못했지만 여배우 급의 포스와 미모를 가진 여자를 마음껏 능욕할 생각에 기쁨이 넘쳐흘렀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음식을 먹기 직전과 첫 한술이 가장 맛있듯이 섹스 또한 그러하다.
평소 식당을 갈 때도 먹을 메뉴의 먹방 방송을 시청하며 식욕을 돋우는 휘진답게 지금도 최대한 성욕을 끌어 올리는 중이다.
일단은 저 벨벳으로 만들어진 머메이드 드레스.
신체 윤곽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옷에 밍크로 만든 숄.
영화제 레드 카펫 위에 선 여배우 같아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휘진은 가위를 들었고.
그녀의 코디를 보다 더 완벽하게 재단해 주었다.
◈ ◈ ◈
“저는 제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발가벗은 리리엘과 타타라.
특히 리리엘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타타라는 팬티를 입고 연초를 담백하게 빨아들였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천천히 흩어지는 것을 보며 리리엘은 말을 이었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남들보다 앞서 있었고. 가문에서도 승승장구. 어린 나이에 대학자라는 칭호도 받았으니까요. 가끔 저처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왜 저렇게 꾸물거릴까?’라고 생각했어요.”
“이 세상은 어찌됐건 재능에게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로 나뉘니까.”
“하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가 된 느낌이에요.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왜 이런 기분이 들어야 하는지도…”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타자란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가장 알 수 없지. 촛대의 밑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누구보다 그가 미운데. 지금은 누구보다 보고 싶어요.”
흐느끼기 시작한 리리엘의 어깨를 조용히 안아주는 타타라.
타타라의 수면마법에 의해 리리엘의 흔들리는 어깨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 ◈ ◈
찰나(刹那).
75분의 1초.
평범한 인간이라면 인지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짧디 짧은 시간.
몰락한 니콜라 공작가의 영애 니콜라 아나스타샤가 인식한 시간은 그 정도였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풍광.
그와 처음 조우했던 그녀의 방으로부터 1층 접객실까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동해버렸다.
“뭐…뭐지?!”
“신기하지?”
게다가 자유로웠던 신체는 어느새 밧줄로 팔다리가 구속된 채 목제 의자에 앉혀져 있다.
구속되어있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아나스타샤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네 놈은 누구냐.”
“정말 목숨 아까운줄 모르는 아가씨네. 이름이 뭐야?”
“정체도 밝히지 못하는 천민에게 밝힐 이름 따윈 없다.”
부모의 원수라도 보듯이 이를 악 물고 말하는 아나스타샤에게 살짝 쫄았다.
보통은 이런 상황이 되면 조금은 굽히고 들어가는 게 정상인데 상황파악을 못할 정도로 멍청한 것 같지는 않고…
대체 뭘까?
하지만 역시 이런 게 재밌는 점이지.
“하지만 아가씨. 정말 천박한 꼴을 하고 있는 건 누굴까?”
“뭐?”
검은 벨벳의 머메이드 드레스.
몸의 윤곽을 그대로 비추는 주제에 벨벳이라는 파렴치한 소재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이쁘장 하게 커스터마이징 해 주었다.
무서운 기세로 드레스를 들어 올리는 가슴의 융기.
정확히는 젖꼭지 부분만의 옷감을 동그랗게 도려내어주었다.
드레스와 살결의 황홀한 흑백대비.
그 가운데에 연분홍빛의 유륜과 유두가 하이라이트를 만들어낸다.
휘진에게 그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숭고한 행위였지만.
강제로 그런 몰골에 처해진 아나스타샤의 입장에선 그 이상 없을 굴욕이었다.
“이…이…이…”
도도하기 그지없던 새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한다.
어쩐지 차갑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설마하니 홍등가 창녀 같은 차림이 되어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분노와 수치심에 아무 말도 못하고 이상한 소리만 내는 아나스타샤.
“어때 마음에 들어?”
“당장 나를 원상태로…으읍…!!!”
버둥거리기 시작한 아나스타샤의 두 볼을 잡아 든 휘진은 그녀와 강제로 눈을 맞췄다.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부터 그럴 거야?”
“더러운 자식…”
“그런 것치고는 점점 단단해져 가는 걸?”
유두를 손가락으로 꼬집으며 말하는 휘진의 손길에 아나스타샤는 몸서리쳤다.
반면 휘진은 그 어떤 젤리보다 말랑 말랑하고 부드러운 살결을 만끽하며 굴욕에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구경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미개발지인 그녀의 몸은 솔직히 반응한다.
엄격한 정조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아나스타샤에겐 누군가에게 젖꼭지를 집요하게 만져졌던 경험이 없었다. 자신조차 만진 적 없다.
“조금 더 말해보지 그래? 이런 짓을 한다고 내가 굴복할 줄 아느냐! 라던가, 이건 생리적인 작용일 뿐이야! 라던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빈정거리기 시작한 휘진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멋대로 주물렀다.
“그 편이 더 굴복시키는 맛이 나서 좋거든.”
“욕보일 바엔 차라리 죽여라…”
“이렇게 아까운 몸을 맛도 안보고 처분하기엔 아깝잖아? 안 그래도 자원낭비가 심한 시대에.”
얇은 섬유 위로도 느껴지는 탱탱하고 부드러운 젖가슴의 감촉.
그의 거친 손길에, 푸딩처럼 부드러운 살덩이가 제멋대로 모양을 바꾸어간다.
보이지도 않는데도 전해지는 충만한 살결의 출렁임은 이미 약속된 쾌락의 열매다.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묘비도 없이 쓸쓸히 죽어가고 싶진 않을 거 아니야.”
휘진이 윗입술을 핥으며 이 미녀를 어떻게 조리할까 고민할 때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작고 어여쁜 피앙세 내가 왔소!!!”
◈ ◈ ◈
“그 어여쁜 가슴에 코 박고 죽으면 아주 소원이 없겠어.”
카를 남작의 수행인 미하엘은 남작의 음담패설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박혀오는 것을 느꼈다.
“꿈에만 그리던 그년이 드디어 내 앞에 엎드려 뒤치기 자세를 취할 생각을 하면 아주 아랫도리가 우효오옷…!!!”
2인승의 마차에 마주 앉은 카를 남작과 미하엘.
카를 남작은 꿈에도 그리던 니콜라 후작 영애를 손아귀에 넣게 된 것이 어지간히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아까부터 엉덩이를 들썩이며 신을 내는 남작의 몸동작에 마차가 덜컹거린다.
“분명 카를 공께 어울리는 베필이 될 것입니다.”
본심을 숨긴 채 웃는 가면을 꺼내든 미하엘이 남작의 말에 맞장구치자 남작은 또 다시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자지러졌다.
속이 불타오르는 절망감.
어렸을 때부터 몰래 사모해왔던 니콜라 아나스타샤 후작영애.
그녀로서는 기억도 못할 정도로 짧은 만남이었겠지만 어렸을 적 빈민가에 앉아있던 소년에게 뻗었던 소녀의 손길을 미하엘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원해주었던 그 사랑스러운 아기고양이가 오늘 밤 그의 주인에 의해 무참히 짓밟힐 것이라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워서.
도리어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미하엘 오늘따라 기운이 없구나?”
“아닙니다.”
“에헤이~ 누가 남자아니랄까 봐? 질투나나? 너도 생각만 해도 거시기가 근질근질 거리지?”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리는 남작.
그래 질투다.
두툼한 목살을 도려내고 심장을 끄집어내고 싶을 정도로 가슴을 격렬하게 태우는 분노다.
언제나처럼 친근하게 대하는 남작의 태도에도 미하엘은 검은 뱀처럼 빳빳이 고개를 치켜든 증오를 느꼈다.
“아무렴 걱정 말게. 우리가 어떤 사이인가? 신분을 초월한 아름다운 우정의 두 사나이 아니겠어? 내가 초야가 끝나고 나면 자네에게도 꼭 한번 맛보여줌세. 술을 잔뜩 먹이고 교대하는 거야 좋지? 좋지? 우효효효횻!”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좋은 주인이 어디 있겠어? 안 그래?”
“네네, 그럽죠.”
인간왕 토프키센의 반 엘프 법령에 반기를 든 니콜라 후작 가.
선왕의 총애를 받던, 공작이 부럽지 않은 부와 권력을 지니고 있던 니콜라 후작가는 토프키센의 손가락질 한 번에 풍비박산이 났다.
호텔과 물류에 있어 동대륙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던 니콜라 사(社)는 순식간에 갈가리 찢겨나갔고 니콜라 후작은 지하 감옥에 유폐되었다.
남은 것은 승냥이 같은 채권자들에 의한 빚 파티.
그 승냥이 중 대장 역할을 자처하고 가장 귀한 보물을 손에 넣은 것이 여기 이 카를 남작이다.
남은 빚을 청산해주고 아버지를 감옥에서 꺼내주는 대가로 아나스타샤와의 몸을 요구해온 것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녀로서는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어느새 을씨년스런 저택에 들어선 마차에서 카를 남작은 육중한 몸을 이끌고 뒤뚱뒤뚱 뛰어나갔다.
“자네는 빨리 안 오고 뭐하나?”
“저는 마차를 물리고 이곳에서 대기하겠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한시가 급하다는 듯이 미하엘을 채근하던 카를의 얼굴에 휘둥그레 미소가 떠오른다.
“이런~ 이런~ 센스 있는 녀석. 주인님의 시간을 방해하기 싫다는 거구나. 알겠다. 내 거사를 끝내고 곧장 찾아 올 테니 얌전히 정원이라도 구경하고 있게.”
황량한 정원을 쓱 둘러본 카를은 말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저택으로 뛰어들었다.
당장은 세세한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지금이라도 막아야 하나.
지금이라도 죽여야 하나.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눈물로 애걸을 해야 하나.
그 어떤 용기도 미하엘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꿈.
자신을 구원해주었던 가장 소중한 것이 부서지기 직전인데도.
입도, 발도, 손도.
그 무엇 하나 움직여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