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남의 떡이 더 맛있다(2)
갑자기 몸을 돌려 힐을 신은 채로 문 쪽으로 달려가는 여인이지만 당연히 시간을 멈추는 휘진 앞에서는 불가능하다.
문은 어느새 잠겨있었고 눈앞에 있던 남자는 여유롭게 문에 기대어 능글능글한 미소를 보내고 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아까부터 눈에 들었던 탱글탱글해 보이는 가슴을 아래부터 받쳐 올리는 휘진.
브라도 차지 않는 것인지 극세사처럼 부드러운 벨벳 아래로 볼륨 있는 가슴이 아주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북해에서는 대공이나 아리스 등 눈치 보이는 일이 많아 멋대로 행동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괜히 소문이라도 나쁘게 난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는 적국인 루블 왕국이다.
무슨 깽판을 치든 시간 정지를 하고 하루에 하나씩 사람 목을 따고 10 명씩 강간을 하고 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적국.
몸 상태가 안 좋은 탓에 섹스를 통 못했기도 하고 타타라보다 커다란 가슴을 보니 흥미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예전부터 이런 까칠하게 생긴 여자를 자빠뜨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퍽!!!
“윽…!!”
따귀도 아닌, 손을 쫙 편 손바닥이 안면 정중앙을 강타한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겠지만 방심했다. 은근히 드러난 복근의 모양새만을 보고 있었던지라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죽이려면 죽여라! 어차피 그 개자식에게 시집을 갈 바엔 죽어버리지.”
처음 덜덜 떨던 반응이 어디 간 것인지 오히려 악을 쓰는 여자.
마음에 안 든다고 발악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쯤 되면 휘진이 살인자라고 아예 넘겨짚고 하는 행동인 건가?
진짜 간이 큰 건지 뭔지 감이 안 잡히네.
“알았어! 알았어! 가슴 안 만질게! 너무 크고 아름다워서 그랬어. 이야기만 하자 이야기만!!”
가방을 이용해 투닥투닥 때리는 여자와 머리를 보호하는 휘진. 그러다…
“악! 이 썅년이 진짜!”
눈가를 얻어맞고 빡친 휘진의 무게중심이 낮아진다.
단단히 대리석 바닥을 딛고 선 발부터 충분히 전해져오는 밀어내는 힘이 느껴진다.
무릎, 허리, 등 근육 순으로 이동.
짧은 거리에서 급속하게 몸을 틀어 원심력을 만들고 자연스럽게 체중을 실어준다.
핸드백을 휘두르는 빈틈을 날카롭게 노려서 꽂아 넣는 느낌의 바디 훅.
“켈록…!!!”
공중에서 등이 ‘?’자로 꺾이는 여인.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서 기침을 한다.
“힘 조절은 했지만 다음은 없다. 까불지 마.”
“아녀자에게…손찌검이라니 콜록… 시정잡배만도 못한 놈이니라.”
“원래 세상은 주는 대로 받고 사는 거야.
무의미한 연타보다 확실한 한 방이 승패에 영향을 준다는 교훈을 가르쳐준 휘진은 아직도 기가 전혀 죽지 않은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은 승부였어.”
등 뒤로 석양이 지는 청춘 만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보려 했지만… 다소 쌀쌀 맞은 반응이 돌아온다.
“미친놈.”
“그러게 이야기 하자고 할 때 하면 좋잖아? 그까짓 가슴 조금 주무른다고 닳아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세상엔 오물에 비벼지느니 자살을 택하는 여인들도 많지.”
“그런 섬세한 감성을 가진 아가씨로는 안 보이는데 말이야.”
기어이 손을 후려치고 구부정하게 일어난 여인은 배를 끌어안은 채로 휘진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죽음으로 날 겁박할 생각이었다면 상대를 잘못 찾았구나. 지금 내게 죽음은 스스로는 손에 넣을 용기가 없는 평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도 중학교 2학년 때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었지.”
만담은 이정도면 된 것 같다.
어떤 성격의 아가씨인지도 대충 알 것 같고.
남은 것은 성심성의껏 굴복시켜보는 일.
오랜만에 흑발 흑안이다 개꿀~
◈ ◈ ◈
휘진이 실종된 지 약 일주일 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아리스와 리리엘은 슈펜하우져 성으로 복귀했다.
“…그래서 임무는 실패입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이미 늦은 밤에도 산더미 같은 서류와 자료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정사(政事)를 보고 있던 아슌푸틀은 침통한 표정의 아리스를 격려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갈 순 없는 법이라네 아리스. 정말 수고 많았네.”
“….”
“애초에 보험으로서 들었던 작전일 뿐이라네. 엘프들에게 공군함의 마력노심과 설계도가 전달된 것 만해도 커다란 수확이지.”
“….”
임무를 실패하고 돌아온 부하가 지나치게 심려하지 않게, 그러면서도 애초에 기대치가 없었다는 말은 피하며 와인 잔을 들이키는 베아트레아 대공의 고운 얼굴이 돌연 흠칫 굳었다.
아리스는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 연연해하는 성격이 아니다.
설령 아주 큰 실수를 저질러 자책하더라도 주군 앞이라면 그런 기색을 삼킬 정도로 충성심이 먼저인 충직한 기사이다.
그 실수가 보통이었더라면.
“휘진은 어떻게 되었지?”
대공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아리스를 채근했다.
원래대로라면 누구보다 자신에게 먼저 달려오리라 생각했던 그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휘진 경은 작전 도중 적의 대공 포탑 3채를 무력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제 시간에 합류 지점에 도착해 현재로서 행방이 묘연합니다.”
“…당장 생사가 확인 된 것은 아니라는 겐가?”
아리스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대공의 동요가 큰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낙담했다.
자신이 눈치 채지 못한 사이 그는 제법 대공의 좋은 친구이자 의지가 되어주었던 모양이다.
“모두 제 실책입니다. 그가 특공을 자처할 때 제가 만류했더라면…”
“아니야, 그대 탓이 아니네. 일어나게.”
한 번 입술을 질끈 깨문 대공은 아리스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가볍게 안아주었다.
소중한 친구를 대하듯이 도리어 아리스의 마음을 위로한 베아트레아는 그녀의 이마에 몇 번이고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돌아가서 쉬게나. 그가 어디 쉽게 죽을 인물인가?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돌아오는 길일 것이야.”
“면목 없습니다.”
“인력을 동원해 수소문하겠네. 염려 말고 대기하게.”
아리스가 완전히 방을 나서자 방 한 구석에 조용히 있던 타타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슌푸틀… 이런 말 정말 미안하지만.”
“제발… 잠시만 생각을 정리하게 해주게.”
“휘진은 죽었을 거야.”
복잡한 마음을 잠깐이라도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타타라는 사정없이 선고를 내린다.
오랫동안 함께 한만큼 그 편이 그녀를 위해서도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와 심장을 엮는 계약을 맺었어. 하지만 며칠 전부터 계약이 풀린 상태야. 심장을 엮는 계약은 계약자의 죽음이나 그 보다 상위 존재와의 계약으로만 풀 수 있지.”
“아신 보다 상위의 존재?”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기 위해 반문해보는 대공이었지만 타타라의 말이 상식적으로 옳다.
전 세계를 뒤져봐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구도자’.
세상을 바꿀 힘을 가진 선택받은 존재에게만 부여받는다는 사명이 하필이면 그에게 부여됐을까.
대공도 자신이 가진 대단한 업적과 범인을 뛰어넘는 능력을 알고 있다.
애초에 ‘자신 정도’는 되어야 구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휘진에게 그 정도의 능력은 없다.
이제는 익숙하다고 착각했던 친우를 잃어버리는 고통은 여지없이 유리칼로 심장을 썩뚝 베어간다.
마취도 지혈도 없이 철철 흘러넘치는 피가 느껴진다.
“그대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군. 그와는 살을 맞대는 사이가 아니었나?”
“뭐, 그건 맞지만 어차피 내게 있어서 인간은 언젠가 죽는 존재인걸. 그의 경우 시간이 조금 더 앞당겨졌을 뿐이야.”
“조금 더 라…”
수백 년을 살아온 아신의 입장에선 80년을 사는 인간과 30년을 사는 인간이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진다는 것일까.
뾰족한 말투로 마치 질투라도 하는 여자아이처럼 투정과 배려 없는 질문을 던지는 아슌푸틀이었지만 타타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너무 화내지는 말아줘, 아슌푸틀. 아무리 나라도 슬픈걸.”
처음 보는 타타라의 쓸쓸한 표정에 대공은 깜짝 놀랐다.
그녀가 아는 한 타타라의 얼굴에 그늘이 졌던 것은 단 한 번도 없던 것이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철이 없었군.”
“이 정도로 뭘. 힘든 일이 있으면 말해줘.”
머리를 쓰다듬어준 타타라마저 방을 나서자 대공은 와인으로 병나발을 불었다.
콸콸 쏟아져가는 와인과 함께 후끈한 취기가 얼굴을 덥힌다.
아무리 마셔도 가슴에 눌러 붙은 상실감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 ◈ ◈
“네?”
“휘진은 죽었어. 축하해 자유의 몸이 되었구나.”
연구동에서 어째서인지 침울한 표정을 리리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린다.
그건 혼란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온갖 몹쓸 짓을 하는 악당.
게다가 타타라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까지 추가로 이용해 리리엘을 괴롭히는 정진정면의 악한이다.
만약 예전의 수행중인 리리엘이었더라면 즉결처분을 했을 정도의 쓰레기 중의 쓰레기.
그에게 받아온 성적 모욕과 성희롱 성추행을 전부 합치면 한 1500년 정도는 감옥에서 썩게 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일진데.
며칠 전 그가 작전 중 실종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덮쳤던 알 수 없는 검은 파도.
그것은 공포였다.
아는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는 또 다르다.
남의 일로만 여겼던 죽음이 선뜻 옆을 걷고 있다는 사실에 느껴지는 공포와도 달랐다.
증오하는 사람이 죽어버릴 까봐, 다시는 만날 수 없을까봐 느끼는 상실에 대한 공포.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모순이다.
자가당착이다.
“다시 한 번 말해…주실 수 있나요?”
“휘진은 죽었다는 부분이야? 아니면 자유의 몸이 된 걸 축하한다는 부분이야?”
“자유의 몸…?”
“그래, 어차피 난 휘진의 취미에 어울려 주었을 뿐이고. 그간 정도 들었으니 10년 20년 정도라면 대가 없이 가르쳐 줄 수 있어.”
아무런 비아냥도 연민이나 슬픔도 담지 않고 타타라는 마치 점심의 메뉴를 이야기 하듯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까지 그렇게나 미워했던 사람이 과거형으로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그가 죽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그를 좋아했어?”
“엣…?! 아니오… 절대… 아마도…”
“이별은 슬픈 일이지.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나아가야만 하는 거야.”
아마도 위로를 하며 타타라는 리리엘의 축 늘어진 두 귀를 조용히 손으로 쓸어주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면 오늘 수업은 쉬자. 어차피 갖은 일로 힘들었을 테고.”
“잠시 만요…스승님.”
“어머?”
리리엘이 타타라의 품에 안겨들었다.
가슴이 도넛처럼 뻥 뚫린 감정을 없애는 아주 좋은 방법을 리리엘은 알고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타타라를 올려다보며 리리엘이 속삭였다.
“오늘만… 응석부려도 괜찮을까요?”
“아이구… 많이 슬픈 모양이구먼.”
타타라는 리리엘의 뒷목을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진하게 혀를 섞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