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남의 떡이 더 맛있다(1)
“신세계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판타지 계 SF도시에 온 기분이다.
마천루처럼 높게 솟은 건물들, 사방에서 귀가 먹먹해 질정도의 인기척이 바글거린다.
하늘을 빽빽하게 매우고 있는 것은 모두 상업용 공선.
동쪽에서 내리쬐는 햇빛과 화려한 하늘을 번쩍이며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수천 개의 돛들은 이곳을 황금도시를 연출한 공연장처럼 보이게 했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했을까하는 심정을 느낀다.
“무한 리젠 되는 던전 같다.”
이 정도로 사람이 많아서야 한 두 명의 지명수배자는 자연스럽게 묻혀갈 것이다.
동양인이 적기는 하지만 몇 명보이기도하고 지금 입은 옷은 특별히 눈에 띌 것도 없다.
대충 분위기라도 훑어보기 위해 나왔지만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다.
예상대로 광장 쪽의 벽보도 훑어보았지만 수배지 같은 것도 없고.
무엇보다 공군 요새 한가운데에 갇혀있는 주요 인사, 반 엘프 법령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피닉스가 겨우 공군함 한 척을 대동한 병력에 탈취 당했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광고하고 다닐 리가 없다.
이쯤 하고 돌아가기로 한 휘진이 다시 골목길에 들었을 때였다.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위화감이 든다.
여관 1층에 존재한 식당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파란의 기색이 느껴진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놓치고 지나갔을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경직되어있는 손님들의 표정.
객실이 있는 계단 쪽에 나 있는 군용 부츠의 발자국.
휘진은 테이블 위에 스테이크를 써는 나이프를 챙겨들고 2층 객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공무 집행 중이다. 잠시 대기해라.”
좁은 복도를 장벽처럼 가로막은 루블 왕국의 병사.
그 뒤쪽 휘진의 방은 열려 있었다.
“이거 놔!”
“어느 정도 힘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 빨리 죽여.”
그리고 방 안에서 메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플레이트 갑옷도 아니고 평범하게 차려입은 병사들에게 제압당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로 약해진 것일까.
“조력자가 있을 것이다. 샅샅이 정리하고 잠복해라.”
퍽 소리와 함께 메리의 기척이 잠잠해진다.
일단은 상황을 살펴 볼 생각이었건만 병사 쪽에서 날카로운 창날을 겨눠온다.
아마 상관의 목소리를 듣고 머리가 좋아지기라도 했는지 신중하게 경계하는 병사 A.
“너는 몇 호실에 묶고 있지?”
-푸슉
잔뜩 으름장을 놓는 병사의 턱밑으로 은빛의 나이프가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크흡!”
기도까지 깊게 찔러 넣은 싸구려 나이프 였던 터라 휘진의 힘으론 단 한 번에 목뼈까지 끊을 수 없었다.
때문에 팔 뒤꿈치를 추가로 활용한다.
돼지의 정수리에 정을 박아 넣는 것처럼 나이프의 손잡이 부분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려 단숨에 뇌관까지 끊었다.
고통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일류 도살자 같은 솜씨이다.
순식간에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지는 병사를 피가 묻지 않게 조심스럽게 받아 든 휘진은 시체를 벽에 눕혀 놓았다.
“뭐냐? 네놈은!”
방 안에는 세 명의 병사와 한 명의 기사로 보이는 인물이 서 있었다.
지금 막 수상해 보이는 시체 백에 메리를 집어넣고 있는 중이었다.
가슴엔 길에 단도가 박혀 흰 커튼 같은 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바닥에 흘러넘친 피의 양은 심상치 않다.
“영장은 가지고 오셨나? 나리들.”
“이년의 동료다. 붙잡아라!”
현명한 기사였더라면 여기서 병사를 물렸을 테지.
공훈에 눈이 먼 어리석은 상관 때문에 줄초상을 치르게 생겼다.
휘진은 그 엄중한 요새에서 아신을 탈출 시켰다던 조력자다.
그런 그를 상대로 겨우 이 정도의 양과 질로 해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승진에 대한 갈망이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휘진의 행동은 간단했다. 시간을 멈춘다.
고작 한 번 뼈를 관통한 것만으로 날이 상해버린 나이프는 버려두고, 창을 뺏어든다.
4명의 훈련용 허수아비를 순서대로 찔러준다.
이 루블 왕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휘진에게 가장 큰 메리트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격자를 남기는 것은 필요 없다.
그저 명령에 충실할 뿐인 병사들을 죽이는 것도 생각보다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굳이 있었다면 잠깐의 애도 정도.
가슴을 향해 힘껏 지른 창이 갈비뼈를 부스며 심장의 탄력적인 근육을 헤집는 감촉이 손잡이 너머로 전해져온다.
단말마조차 허용하지 않는 최후를 선사한 휘진은 밖에 있는 병사의 사체를 방안으로 옮기고 복도의 핏자국을 닦아내었다.
마지막으로 메리의 시신에서 칼을 빼내준다.
죽은 자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피닉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가 이 정도로 죽는다면 섭섭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체 백에 넣은 메리를 어깨에 들춰 멘 휘진은 시간을 멈춘 채 유유히 길을 떠났다.
이상하다.
처음부터 시간을 멈추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텐데.
처음으로 5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는데도 기묘하게 감정의 고양이나, 흥분, 죄책감들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시체백은 놀랍게도 가방처럼 어깨에 멜 수 있도록 편의성을 생각해 디자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렇게나 먼 거리까지 걸어오지 못했으리라.
일단 인적이 드문 곳에서 상황을 살피자고 생각한 휘진은 여관에서 3시간 정도 떨어져있는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을 멈춘 이상 말 그대로 순간이동(물리)이다.
이 정도거리까지 단숨에 사라진다면 아마 찾아내기도 힘들 것이다.
어째서 저택으로 향했냐에 대한 이유는 몇 가지 있다.
첫째, 슈펜하우져 성의 경험상, 거대한 저택 방의 절반 정도는 버려진 채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
둘째,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손님을 맞아들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
셋째, 호텔이나 여관 같은 경우는 회전률이 높아 손님이 많지만 저택의 경우에는 그 빈도가 훨씬 적어 기생해 사는 것이 발각될 확률이 적다는 것.
“이거 잘못 골랐나?”
폴리스라인처럼 코팅된 종이가 울타리부터 담 벽까지 칭칭 감겨 있었다.
제국의 문자는 타타라를 통해 어느 정도 익혔지만 루블 왕국의 것은 전혀 읽을 수 없다.
저 살벌한 빨간 글씨가 쓰인 테이프가 환영 합니다 같은 글귀일리는 없고.
정원에 들어서자 대충 감이 왔다.
아마 버려진 유령저택인 모양이다.
창문이 깨져 수리가 되어있지 않은 곳도 눈에 띄고, 무엇보다 이 넓은 저택에 사용인 하나가 눈에 띄지 않는다.
손질되지 못한 채 자연 그대로 자라나는 잔디와 나무, 그리고 잔뜩 시들었는데도 방치된 꽃.
정원 한 가운데를 장식한 분수대에는 이끼까지 덕지덕지 끼어있어 을씨년스러움의 화룡점정을 찍는다.
이러면 오히려 감지덕지다.
혼자서 열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저택의 문에도 역시 커다란 종이가 붙어있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으니까.
정확히 시간 정지의 대가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원하지도 않은 때에 멋대로 풀려버리는 것은 더 이상 사절이다.
“드라마에서 많이 봤던 관경이구먼.”
저택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있는 로비를 보자 감이 왔다.
전시되어있는 각종 도자기와 그림들에 붙어있는 빨간 글씨의 종이.
차압 딱지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또 오래있긴 힘들 텐데…
하지만 항상 뭔가 편한 점이 있다면 감수해야할 부분도 있는 법이다.
이만 시간 정지를 푼 휘진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 침대가 있는 방을 찾아 시체 백을 내려놓았다.
등과 맞닿아있던 부분이 땀범벅이 되었을 정도로 휘진도 힘들었다.
지퍼를 열자 창백한 얼굴의 피닉스의 몸이 드러난다.
코에 귀를 대자 미약한 숨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아까까지 검붉은 단면을 흉측하게 들어내며 쩍 벌어졌던 상처엔, 잿불에 타는 종이처럼 표면부에 조그마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마치 상처가 입어가는 모습을 아주 천천히 역 재생하듯이 천천히 몸을 고쳐나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아래로 천천히 핏줄이 먼저 이어지고 있는 장면이 상당히 그로테스크하다.
“흐으으으므므…”
“타이밍 좋네.”
휘진 입장에선 거의 몇 시간 만에 깨어나는 피닉스이지만 줄곧 시간을 멈추고 있었으니 불과 몇 분 만에 재생을 끝냈는지도 모른다.
“여기 어디야…?”
“채권추심당하는 불쌍한 귀족아저씨의 집이야. 주인은 잡혀갔는지 묻혔는지 없더라.”
“으윽…!!”
“너 정말 죽지 않는 거야?”
“피닉스는 정의의 아군이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아.”
고통 때문인지 미간을 찡그리는 피닉스.
벌써 말을 더듬지 않는 걸 보면 정말 경이로운 회복력이다.
…라고 생각하며 몸을 부축했던 것은 너무 섣불렀다.
“피닉스 님에게 이 정도 부상은 아무것 푸웨에에엑…!!!”
“야 괜찮아?!”
“쿨럭…!! 쿨럭!!!”
“아, 진짜 바지에 다 묻었네.”
호기롭게 말하던 도중 입으로 피를 한 사발 쏟는 피닉스.
B급 코믹고어 같은 장면이다.
침대도 핏자국으로 엉망이다.
“일단은 눈이라도 붙이고 있어. 마실 거라도 구해 올 테니까.”
“나…난 오렌지 쥬스으…”
“시꺼.”
마지막 유언을 전하고는 장렬히 전사하는 피닉스.
그대로 코를 골면서 숙면모드로 들어갔다.
휘진도 그렇도 피닉스도 언제까지나 피로 축축한 옷을 입게 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버려진 옷이라도 찾아줘야겠다. 그나저나 넝마 같은 옷을 입고 있던데 설마 착한 사람이 계속 버려진 옷이라도 찾아서 입혀준 건가.
호화로운 방문이 열렸다.
아무리 발전했다고는 해도 사람의 움직임을 인지하는 자동문 따위는 없을 터.
휘진은 일단 기쁨을 느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불청객이 20대 중후반의 여인이었고 굉장한 미녀였기 때문이다.
상복이라도 입은 듯이 위아래의 의복은 검다.
둥글게 묶어 올린 흑발이 곱게 뻗은 목선과 확연하게 색 대비를 일으킨다.
눈동자 역시 휘진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검은색 눈동자.
전체적인 분위기는 ‘공주님’스타일이었다.
판타지 계의 공주님이 아닌 지구에 있었을 적의 공주님.
워낙에 예쁜 외모와 좋은 환경을 타고나 주변에서 떠받들어 준.
지구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다소 싸가지도 없지만 예쁘기에 모든 것이 용서되는 캐릭터라고 해야 하나.
검은 벨벳으로 제작된 얇은 드레스가 육감적인 몸매에 바싹 달라붙어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휘진의 시선을 눈치 챈 것인지 모자에 딸린 검은색 페이스베일 아래로 색스러운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다.
“이제 빈집에까지 와서 주책이라니 어지간히 추악하구나. 이래서 천한 놈들은…”
한숨을 쉬더니 짜증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여인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휘진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아아, 겨우 가슴 좀 본 것 가지고 이런 취급이라니.
경멸스러운 표정이 지나쳐서 불알이 쪼그라들 것 같을 정도이다.
“네 주인에겐 분명 제안을 수락한다는 뜻을 비쳤다. 빛나는 니콜라 가문을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장본인들이 이제 와서 동아줄이라니. 천박한 것도 정도가 있느니라.”
“가슴 좀 봤다고 가문 멸망까지 운운하는 건 너무 간 것 같은데.”
“그 입 다물라.”
경멸에 경멸이 곱빼기로 얹어진 시선이다.
하지만 흥분으로 좁아졌던 시야가 원상복귀 한 것인지 여인의 시선이 침대 위의 피닉스로 향했다.
피로 물들어있는 여자아이의 시신과 반쯤 열려있는 시체 백이다.
이어 시선이 머문 곳은 하체를 중심으로 피에 범벅이 되어있는 휘진의 옷차림.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의 상상력으로는 시체성애자의 엽기성행위까지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저택이 빈틈을 타서 침대에 시체를 올려놓은 남자가 장의사로 보이진 않겠지. 못해도 살인범일 것이다.
“누구냐 넌…”
예전의 휘진이었다면 필사적인 항변과 함께 해명을 시작했겠지만.
“진짜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
이번에는 조금 장난끼가 발동했다.
싸이코패스 살인마 영화에 나오는 살인자처럼 그럴듯한 대사를 하며 겁을 줘보는 것도.
아까까지 세상 무서운 줄 몰랐던 아가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나가는 것은 묘한 전능감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