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몽고메리 피닉스(3)
주인공은 절벽에서 떨어져도 기연을 얻는다는 소설의 기가 막힌 개연성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그럼 저 죽은 거 아니에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여기는 삼계에 위치한 계약의 공간, 우매한 인간이 무엇 하나 인지 못하는 것도 필연이다]
“그래서 누구신데요?”
[아신이 되고 싶지 않나?]
붉은 눈동자는 흥미로운 먹잇감을 바라보는 짐승처럼 이리저리 휘진을 살핀다.
광오한 목소리로 달콤한 열매를 건네는 정체불명의 오호트란.
[세계를 유린할 폭력. 필멸자의 굴레를 끊는 영체, 세상이 발밑에 고개를 조아릴 힘을 얻고 싶지 않나?]
“공군함대는 못 이긴다던데요.”
[….? 무슨 소리냐. 아신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아신 밖에 없거늘]
“세상이 바뀌어서 이젠 아신도 혼자서 무쌍은 못 찍는다고 들었습니다.”
[….]
그저 세상을 원망하듯 붉게 타오르던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흔들린다.
저렇게나 큰 눈동자가 움직이니 문자 그대로 동공지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세계에 절망한 자들, 정의라는 명목 하에 무참히 짓밟힌 악의가 모여 만들어진 죄의 화신! 그 검은 희망들을 너에게 주마! 피어나지 못한 악의 꽃을 네놈이 이 세계에 피워보아라! 크하하하하!!!]
어째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휘진은 순간 자신의 주변이 푸르스름한 조명이 켜진 것처럼 시야가 확보되는 것을 눈치 챘다.
“헙…”
무수히 쌓여있는 시체의 산.
붉은 진흙, 피, 녹슨 검, 시체, 탄환, 화약 끝을 확인할 수 없는 사자(死者)들의 행진.
그 모든 것들이 녹아 만들어진 검은 에테르가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내려가며 휘진의 몸을 덮어간다.
마치 네 녀석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라는 듯.
이끌어지지 못한 자들의 원망과 원념은 끝없이 휘진의 살점을 할퀴며 뼈 속에 스며들 정도의 짙은 농도로 온 몸을 덮어간다.
[증명해라. 너의 가치를. 유일무의의 아신. 아니, 악신(惡神)이 되어 세계를 내려다 보거라. 그게 네 삶의 유일한 가치일 터이니!!!]
혼자서 신나게 떠들던 오호트란이 흠칫 굳었다.
[뭐냐 네놈은]
“뭐라는 거야 이것 좀 떼 줘… 아프잖아!!!”
[아니, 그럴 리가? 네 안에 있는 건…]
“내 안에 뭐가 있어?!”
모든 의식이 끝난 것인지 검은 공간이 차츰차츰 좁아져 간다.
[그럴 리 없다! 그건 불가능해 어째서 이제 와서 ●●의 간섭이…!!!]
“일부러 그러는 거지?!! 내말 들리면 시발 대답 좀 해줘! 나도 같이 좀 놀라자!”
멀어지는 의식과 함께 오호트란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귓가를 때린다.
눈을 치켜뜬 휘진은 그대로 현실로 떨어졌다.
마음을 검은 벌레들이 갉아 먹는다.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처럼.
상실감은 지독하게 심장을 파고 들었다.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 ◈ ◈
“…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따사로운 햇볕이 느껴졌다.
“아직도 자?”
푹신한 침대 시트의 매트리스 위라는 것도.
새가 지저귀듯 귀여운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엇? 눈 떴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 걱정했어!”
눈앞에 있는 것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구했던 아신 ‘몽고메리 피닉스’.
착각은 아니었던 것인지 여전히 작은 체구이다.
작열하는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카락과 눈동자.
다만 루블 왕국의 토프키센이 저주 받은 루비처럼 짙은 붉은 색이었다면 이쪽은 싱그러운 사과에 가깝다.
양쪽으로 삐쭉 올라간 눈초리는 고집스러움과 함께 개구쟁이처럼 짓궂은 장난기가 느껴진다.
넝마 같은 옷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소녀는 아름답다.
그다지 로리콘은 아니지만 그런 취향에 눈을 떠버릴 만큼이다.
예쁘다.
역시 미소녀는 진리야.
세상은 아름답다.
그리고 너무 가까이 있다.
휘진은 이 피닉스라는 소녀가 누워있는 자신의 반신에 걸터앉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굴은 서로 인중을 핥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너…는…”
오랜 숙면을 취한 탓인지 갈라지는 목소리.
그런 모습에 기쁜 듯이 요상한 포즈를 취하며 자기소개를 하는 소녀.
“약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정의의 사도! 악당은 모두 정의의 불꽃으로 격파! 몽고메리 피닉스이올시다!”라고 말하며 윙크를 해 보이는데…
머리가 아픈 아이인가.
“왜 측은한 표정을 짓는 거야!”
“커허헉…!!”
팡팡 하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피닉스.
가볍다지만 지금의 휘진에게 커다란 데미지이다.
그 모습을 본 피닉스는 헉하고 놀라더니 가슴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앗! 미안 환자였지!”
그와 동시에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을 통해 전해져 온다.
그게 마력이라는 것을 휘진이 알리는 없었고, 그녀의 마력이 세상 그 무엇보다 탁월한 회복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도리도 없었지만.
어찌됐건 몸이 아주 아주 편해졌다.
“난 휘진이야. 널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니 알아서 받들어 모셔.”
“이 몸도 널 구해줬으니까 쌤쌤이지!”
훌쩍 몸에서 뛰어내려 침대 옆에 앉은 소녀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다.
말괄량이 캐릭터구먼.
아신이라면 수 백 년을 살아 왔을 터인데 이런 모습이라니 색다르다.
타타라도, 토렌스라는 작자도 뭔가 타인을 위압하는 분위기를 풍기는데 얘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오히려 친하게 지냈던 여동생 같은 편안한 분위기.
그보다 나 무슨 중요한 일 겪지 않았었나?
“그보다 메리 양? 여기가 어딘지 말해줄래?”
“남의 이름 멋대로 줄여 부르네.”
“빨리.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여긴 루블 왕국의 수도 ‘노브고로드’야. 물속에서 잠자고 있는 너를 건져서 몰래 데려왔어.”
엘프 친구들의 왕국도 아니고… 적진의 수도라고?
“좆됐네.”
“그렇지 뭐.”
상황을 정리해보자.
몽고메리를 구하던 중 정지 능력이 풀리고 그대로 수장되려던 것을 몽고메리가 구해 며칠을 끌어안고 강물을 탄 채 떠내려 왔다고 한다.
그 결과 도착하게 된 곳이 루블 왕국의 수도 노브고로도.
계속 의식불명 상태였던 휘진을 몰래 끌고 와 간호하고 깨어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아 그 전에 이상한 녀석을 만나 아신이 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제의라기보다는 강제였지만 워낙 존재감 없이 지나가다보니 깜빡해버렸다.
“그래서 메리 양. 우리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가면 좋을지 차근차근 상의해보도록 할까?”
“메리라고 하지 마! 이 몸에게는 피닉스라는 멋진 이름도 있고 애초에 몽고메리의 애칭은 몬티야.”
“그렇지만 메리 쪽이 입에 감기잖아.”
“그런가?”
와우.
이정도로 설득되어주다니 지금껏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관대함이다.
긴장도 풀 겸 조금은 티키타카를 할 생각이었는데.
“우선은 다시 한 번 자기소개를 제대로 하도록 할게. 나는 대공의 명으로 너와 엘프를 돕는 너희의 친구야. 그리고 우린 붉은 돌 왕국의 은신지로 합류해야 해. 혹시 어딘지 알아?”
“그쯤이야 난관이라고 할 것도 없다구. 피닉스님이 슝 하고 날아가면 하루면 도착할 수 있어!”
“그래? 그럼 잘됐네. 난 여기에 일 분도 있고 싶지 않거든?”
메리는 손가락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음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어딘가 으쓱한 표정으로 말한다.
“미안하지만 그건 최고 컨디션일 때의 이야기야. 지금 피닉스님의 상태는 간신히 짧은 거리를 날아갈 수 있을 정도.”
“얼마정도?”
“10초?”
“….”
“어쩔 수 없잖아! 차가운 물속에서 너무 오래 있었는 걸!”
근데 무슨 저런 말을 저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살짝 인지부조화가 왔지만 침착하게 말을 잇는다.
아무리 바보 같아 보여도 명색이 아신인데 나 같은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묘책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럼 최고의 컨디션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뜨거운 불이 필요해. 아주 아주 뜨거운 녀석으로.”
“저건 어때?”
방구석에서 타닥타닥 불똥을 튀기는 벽난로를 가리키는 휘진.
이번에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부정하는 메리.
“이 몸을 부활시키려면 저 정도로는 간에 기별도 안가. 화산, 아니 적어도 용광로 정도의 불길은 필요하다구!”
설마하니 이 녀석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만으로 상황에 상관없이 뿌듯함을 느끼는 건가?
일인칭도 쓸데없이 거창하고.
“그럼 화산이나 용광로는 어디 있는데?”
“으~음, 날아서 이틀 정도…?”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네가 날 데려다 주면 되지.”
이 녀석이 말하는 날아서 하루가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인가?
전혀 묘책 같은 건 없었다.
휘진은 마침내 끝까지 유예했던 판단을 속으로 읊조렸다.
메리는 바보다.
“일단 여기는 안전한 거 확실해? 군사 기지에 감금당할 정도인데다가 아신이라면 상당히 지명도가 높을 텐데. 여기 안전가옥 같은 곳 인거지?”
“아니! 여긴 인어의 별이라는 여관이야.”
휘진은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소녀와 함께 적국의 수도에 갇혔다.
심지어 무방비하게 여관에 숨어드는 과정에서 끄나풀이 붙었을지도 모른다.
평소의 휘진이였다면 곧장 침대에 누워서 순진한 메리 양과 뒹굴 흉계만을 짰겠지만 이번은 조금 달랐다.
“우선은 여기에 있도록 해. 나는 밖에서 분위기를 보고 올 테니까.”
“안 돼! 여기는 위험하니까 동행필수!”
방해된다.
한 없이 제로에 수렴하는 주목도와 인지도를 가진 휘진과 피닉스는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눈에 확 들어오는 적발과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다.
함께 다니는 것은 딸랑거리는 방울을 달고 잠든 호랑이 앞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위험하리라.
“나도 한 몸 지킬 정도의 힘은 있어.”
“하지만 이 몸이 더 강해!”
“네가 있으면 들킬 확률이 올라간다니까?”
“이 몸이 없으면 들켰을 때 함께 싸울 수 없잖아!”
이런 문답엔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휘진은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자자, 메리 이것 봐봐.”
그가 피닉스에게 건넨 것은 스마트폰.
난생 처음 보는 희한한 생김새에 안 그래도 커다란 피닉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렇게 좋은 화질로 반짝반짝 거리는 문명의 이기는 판타지엔 없으니까.
“사실 루블 왕국으로부터 극비정보를 입수했어. 여기엔 그 정보다 담겨있지.”
“우왕!”
“여기 보이는 이 점들을 연결해서 비밀번호를 풀어주면 돼. 내 머리로는 도저히 안 되겠지만 정의의 아신이라면 식은 죽 먹기겠지?”
“맡겨만 둬!!!”
쉽다.
너무너무 쉽다.
세상 사람들이 다 이 녀석과 같다면 세상을 주무르는 흑막으로 세계를 지배할 자신감이 생겨날 정도이다.
곧바로 스마트폰에 달려들어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패턴을 공략해가는 피닉스.
휘진은 그 모습을 확인하고 조용히 여관을 나섰다.
◈ ◈ ◈
노브고로도라는 외우기 어려운 이름의 도시는, ‘대도시’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그에 걸맞은 규모.
슈펜하우져 성과 비교하자면 보기에 사치스러울 정도로 발달했다.
보통 건물들이 5층은 넘고 가장 좋은 호텔은 무려 15층의 높이를 자랑한다.
돌과 목재 뿐 아니라 마공학을 이용한 연금기술까지 건설에 적극 활용하는 만큼 지구에서의 중세는 하지 못했던 하이테크의 문명이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슈펜하우져는 애초에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시설.
노브고로도는 동대륙 전체를 호령하는 루블 왕국의 수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