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비밀작전(2)
잔디가 깔려있는 언덕.
엘프들의 은둔지에서 아주 조금 떨어져있는 곳이었다.
온통 높은 나무 때문에 하늘도 제대로 안 보이는 숲의 중심과는 달리, 텅 빈 이곳은 별을 보기엔 아주 좋은 특등석이다.
휘진은 잔디를 베개 삼아 누워 아름다운 별들을 관람했다.
엘프들을 위해 준비된 대공의 선물이란 공군함의 ‘마력 노심’이다.
마법사와 기사들의 질이 인간보다 월등히 우월한 엘프가 루블 왕국에게 속절없이 패배했던 이유는 바로 공군함의 부재 때문이다.
상선을 띄울 정도의 마력 노심은 민간 기업에서도 제작이 가능하지만 인간 국가 중에서도 공군함을 제작할 수 있는 국가는 겨우 네 개의 국가.
따라서 공군함에 사용되는 마력 노심은 그 어떤 군사정보보다 중요한 기밀이다.
엘프들도 몇 번이고 마력 노심의 탈취를 노려보았지만 번번이 실패.
적의 손에 노획될 때 마력 노심의 마력회로를 산성용액으로 녹이게끔 되어있어 정보유출을 막는다. 더군다나 정비공들은 심장을 엮는 계약으로 가족을 볼모로 배신을 생각할 수 없게끔 한다.
그런 마력 노심을 무상으로 제공한 것은 휘진의 연설과 더불어 엘프들에게 인상 깊게 다가온 모양이다.
아까까진 부모의 원수 보듯이 노려보던 엘프들이 조그맣게나마 연회를 열어주고 있으니.
물론 휘진은 그런 축제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발 빠져 적당한 술과 음식을 먹고 슬쩍 빠져있는 중이다.
“이런 곳에서 뭐해. 귀가 짧은 인간 남자.”
“실례네 휘진, 이라고 해줘.”
간만의 평화를 맛보고 있던 참에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눈에 익은 그 모습은 오늘 오전에 대립했던 네시아였다.
지금은 멸망해버린 푸른 돌 왕국의 새로운 여왕.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그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은 아까 위장 중에도 알아봤었다.
“받아. 쌀로 빚은 우리 왕국의 특산주야.”
투박한 대나무 수통에 담긴 술을 받아 든 휘진은 익숙한 냄새에 코를 킁킁 거렸다.
뿌연 우유 빛 색깔부터 냄새까지 막걸리 그 자체다.
“우왓! 맛나네.”
“그렇지?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은 모쪼록 이걸로 잊어줬으면 싶어.”
“어차피 마음에 두지도 않았어.”
한 모금을 들이키자 진한 향수가 목울대를 울린다.
요즘에 와인이나 양주만 먹었더니 속이 부대꼈는데 모처럼 막걸리를 마시니 술을 먹는데도 해장되는 느낌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지구에 있었을 때는 막걸리는 돈 없어서 마시는 술이었는데 지금은 이렇게나 맛있게 느껴지다니.
물론 공장이 아니라 정통기법으로 만든 막걸리랑 일반 막걸리를 비교하는 건 실례이지만.
“우리 고향에서나 먹던 술인데. 그립네.”
“하긴 너는 동부 출신으로 보이니까.”
“연회에서 쏙 빠져나와도 되는 거야?”
“너도 축하연의 주인공인 주제에 따로 나와 있잖아. 쌤쌤이지.”
스스럼없이 다가온 네시아는 자리를 털더니 풀밭에 털썩 앉았다.
여왕님 같은 행동은 아니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술에 취한 모양인지, 조금은 마음이 열린 것인지. 아까 활을 겨누던 때와 비교하자면 아주 표정이 좋다.
“나도 알고 있었어.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 죽여 마땅한 악이 아니란 것도. 좋은 인간도 있다는 것도.”
사르륵 잔잔하게 일어난 밤공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감는다.
마치 광고 모델 같은 구도와 분위기.
하지만 그 옆얼굴은 어딘가 지쳐보였다.
“고마워. 적대하는 우리를 그냥 버려두고 떠나는 게 더 마음이 편했을 텐데. 설득해서 굳이 도와주다니.”
“나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 예전 내 고향도 너희처럼 강대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어서. 남의 일 같지 않더라고.”
“지금은?”
“잘 해결 됐지.”
또 다른 강대국의 힘을 빌리는 바람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독립했다.
어차피 이세계에 떨어진 판에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만 그녀와의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것은 중요하다.
새로운 히로인이 될 후보에게 함부로 대할 순 없지.
“이상하게 넌 사람이 참 편하네. 얼마 만난 지도 얼마 안됐는데 이렇게 대화하는 건 오랜만이야.”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언제나 친구가 없어서 쩔쩔 맸단 말이지.”
“꼭 친구 많은 사람이 그렇게 기만하더라.”
“진짜라니까?”
모처럼 즐거운 대화를 나누던 와중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휘진 씨이~”
뒤를 돌아보자 비틀비틀 걷고 있는 리리엘이 보였다.
한 손엔 와인 잔이 들린 채.
아까까지 같이 있던 휘진은 술이 들어가자 들러붙는 리리엘이 귀찮아져서 바람 쐬러 나온 터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따라와 버리다니.
“너무해요오… 적국의 한 가운데에 억지로 데려온 주제에 버려두고 딴 여자랑 얘기나 하고 있고…”
“너무 마신 거 아니야? 얼굴 완전 홍당무인데.”
“제 얼굴은 그렇게 길쭉하지 않거든요!”
혀를 내밀며 화내는 리리엘.
그녀의 모습을 본 네시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애인이야?”
“애인이랄 것까진 아니고.”
이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냥 섹스 파트너이긴 한데 그걸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호감도를 왕창 깎아 먹을 것 같고.
안 그래도 술 취한 리리엘이 무슨 헛소리를 할지 노심초사다.
깡충깡충 다가온 리리엘은 굳이 네시아와 휘진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우우, 하늘이 핑핑 돌아요. 속도 안 좋고.”
“너가 챙겨줘. 어차피 나도 이제 곧 회의를 해야 해서.”
땡깡을 부리는 리리엘을 보고 네시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연인 사이에 눈치 없게 끼어있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뭐하는 짓거리여. 남의 연애 전선에 훼방이나 놓고.”
저 멀리 네시아가 떠나간 것을 본 휘진이 혀를 찼다.
하지만 리리엘이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는 매~일 딴 여자 꼬실 궁리나 하고 있고… 저는 누구누구씨 때문에 혼삿길도 막혔는데 말이에요.”
“우리 교통정리 확실히 하자? 네가 먼저 나한테 선빵 쳤던 거 알지?”
“그래도! 그렇지… 여자는 소중히 대해야 한다고 못 배웠어요?”
술에 취한 리리엘은 거침없이 휘진에게 반박했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대들지는 않을 텐데.
까불까불 거리기는 하지만 언제나 확실한 보복을 당한 리리엘로서는 굳이 휘진을 자극하지 않아 왔었다.
“조금은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 고찰해 보는 거 어때요?”
“그럼 책임지고 너랑 결혼해?”
“….?!”
아무 생각 없이 던진 한 마디에 리리엘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거 다음에 나올 말은 알만하구먼.
“누가 당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한데요!!!”
“그럼 어떻게 책임지라는 거야. 나 원.”
“그러니까! 적어도 딴 사람이랑만 이야기 하지 말고 저도 좀 챙겨주고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 이상은 꿈도 꾸지 마세요.”
“그럼 난 결혼 누구랑 해.”
“그거야 제 알 바 아니죠.”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리리엘은 또 다시 와인을 들이키며 홍알거렸다.
자기 주량을 모르는 녀석이 확실하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뜬금없이 휘진을 좋아하게 됐을 리는 없고 그냥 술을 먹으면 애교가 많아지는 타입인 건가.
“아하! 그러고 보니 요즘 나랑 전혀 못해서 욕구 불만이다 이거야?”
“…그냥 죽어버려요.”
공선에서 뱃멀미로 섹스는커녕 일상생활도 못한 리리엘과 휘진.
어쩌면 욕구 불만일지도 모르겠다.
원래 남자는 술이 들어가면 고추가 가려운 법인데.
이 녀석도 그러려나?
시험 삼아서 명령해보았다.
“리리엘.”
“미스 키슈엘아니면 미스 키스엘이라고 부르라니까요.”
“까불지 말고 벗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금은 험악하게 말했다.
리리엘의 쫑긋 솟은 토끼귀가 움찔 떨린다.
수인이란 조금 불편하겠다 싶다.
조금만 감정이 변하거나 동요해도 이렇게 귀나 꼬리가 그대로 보여줘 버리니까.
아니, 어쩌면 이 녀석이 유달리 그런 걸 숨기는 데에 서툰지도 모른다.
“잘… 못 들었습니다?”
갈굼 당하는 이등병처럼 뻣뻣해지는 리리엘.
“오랜만에 교육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당장 옷 벗으라고.”
“여…여기서요? 적어도 숙소에서…”
생각해보면 이걸 노리고 이랬나 싶을 정도로 도발적이었던 리리엘은 곧바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하며 우물쭈물 거렸다.
휘진은 당장 리리엘의 두 귀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귓가에 속삭였다.
보드라운 감촉 계속 만지고 싶어지는 중독성이 있는 털 귀이다.
“너무 오냐오냐 해줬더니 이제는 동급으로 보이나 보네? 남의 작업을 방해했으면 적어도 네 몸뚱이로 위로해 줘야 할 것 아니야?”
“하지만 여기서라면… 누가 볼지도 모르고.”
“그거야 말로 내 알 바 아니지.”
귀를 놓아주자 리리엘은 주변을 쓱쓱 살피더니 애원해온다.
“여기 말고 딴 곳은 정말 안 되나요?”
곧 바로 시간을 멈추고 팬티를 압수했다.
오늘 리리엘의 팬티는 하얀 색 레이스 팬티.
어라? 그런데…
“뭐야? 벌써 젖어있네?”
“꺄아!! 어느 틈에?”
아직까지도 꽉 다물려 있는 리리엘의 비소와 맞닿았던 팬티에 끈적끈적한 얼룩이 묻어나있다.
“뭐야 벌써부터 준비 만반이면서 그렇게 뺐던 거야?”
“우우우, 생리 작용이에요! 바…발정기라 그런 거에요!”
“그러고 보니 그런 설정도 있었구먼. 그럼 유독 까불었던 것도 이 몸이 혼내주길 원해서 그랬던 건가?”
역시 귀여운 구석이 있다.
“그렇게나 원한다면 내가 도와줘야지. 아아~ 사매를 생각하는 내 자비로운 마음에 가끔은 내가 다 눈물이 난다니까.”
“또또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조금 봐줄게.”
리리엘의 옷을 전부 벗긴 이후 망토만 입고 숙소로 데려왔다.
전전 긍긍하는 리리엘의 모습은 분명 예전과 같았지만.
옛날과 다른 게 있다면 가슴과 밀착한 망토 부분이 유독 뾰족하게 융기해 있다는 것 정도.
그럼 리리엘을 혼 내 주도록 하자.
◈ ◈ ◈
인간이 마공학과 연금술에 정통했다면, 엘프들은 자연마법에 오랜 공을 들였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최소한의 변형만을 통해서 살아가는 내츄럴 프렌들리한 친구들이다.
당장 이 엘프 은신처만 하더라도 나무를 베어 만든 통나무집이 아닌, 나무 그 자체가 집 모양으로 변하도록 유도하는 신기한 마법을 사용해 문자 그래도 생목(生木)이 얽히고 얽혀 집의 형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자…잠시만요.”
“왜? 처음부터 이걸 바라고 그렇게 까불거린 거 맞잖아?”
배정 받은 숙소로 여느 때처럼 리리엘의 옷가지를 싹 다 벗긴 채 노출 아닌 노출플레이를 즐긴 휘진은 리리엘을 침대에 던져놓았다.
“적어도 문은 닫고 해야 할 것 아니에요!”
행여 목소리가 새어나갈까 속삭이듯이 빠르게 말하는 리리엘의 말대로, 휘진은 방문을 닫지 않았다.
아닌 척은 하지만 노출을 싫어하면서도 흥분해버리는 리리엘의 성벽을 강제로 각성시키기 위함이다.
“아무래도 좋아. 들키면 부끄러움은 온전히 네 몫이니까.”
“지…진심인가요?”
“당연히 진심이지.”
큰 집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지 ‘口 ’자 형태의 원룸구조이다.
따라서 누군가 앞을 지나가거나 한다면 이 19금 장면을 모자이크도 없이 보게 되는 것이다.
망토아래서 꼼지락거리는 리리엘의 얼굴에 단숨에 홍조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