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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64화 (64/154)

64화 비밀작전(1)

“도대체 저는… 왜 끌고 온 거에요.”

“심심하잖아.”

“히이으으… 예상했던 대답이라 화가 나는데 더 기운이 빠져요오…”

“어쩔 수 없잖아?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질 않았는걸.”

리리엘을 사절의 일원으로 끼워 넣은 것은 일방적인 휘진의 계획이었다.

타타라는 아신인 데다가 원체 움직이기를 귀찮아하니 데려갈 수 없고, 반편이이기는 해도 뛰어난 연금술 능력을 가진 리리엘을 데려온 것이다.

물론 반편이라는 말을 리리엘이 듣는다면 방방 뛰겠지만.

언제까지 이 비행을 해야 하는 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직선거리라면 훨씬 빨랐을 것이지만 루블 왕국의 공군 수비병의 검문을 피하고자 이리저리 돌고 돌았기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이 추가된 것이다.

게다가 휘진의 정지 능력은 공선에선 아무런 쓸모가 없다.

공선끼리의 전투에서는 순전히 마법과 마포의 성능에 의존하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하늘을 나는 능력이 없는 한 휘진이 활약할 곳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불안하기 짝이 없었지만 며칠간 평탄하게 펼쳐진 하늘을 보고 있자니 지금은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한 쪽 눈을 검은 안대로 가린, 누가 봐도 해적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선장이 조타실에서 갑판으로 내려왔다.

“지도의 좌표 상으로는 여기입니다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선장의 말을 들은 휘진은 아래를 내려 보았다.

빽빽할 정도 자라난 나무들과 그 위를 새하얗게 덮은 안개는 마지 숲을 잔잔한 바다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리스는 나침반과 좌표계, 지도를 확인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 준비.”

그리하여 엘프 족과 휘진의 경사스러운 첫 만남이 시작… 될까?

◈          ◈          ◈

공선의 승강기를 통해 숲으로 내려온 휘진은 숲의 웅대한 모습에 감탄해야 했다.

한 그루 한 그루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큰 나무들.

공룡시대의 원시림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수목의 향연.

워낙 커다란 나무이기 때문인지 숲의 내부는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울 정도다.

밖에서 봐봤자 ‘복사 +붙여넣기’를 반복한 듯한 부감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미아가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든다.

엘프는커녕 인적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데?”

-슉슉슉!!!

휘진의 혼잣말에 회답하듯.

수십 개의 화살이 일제히 일행의 발밑에 꽂혔다.

침입자를 허락하지 않는 원주민의 견제사격 같다.

아리스는 즉각 칼을 뽑아 들었고, 리리엘 역시 주변에 마법진을 전개했다.

“싸울 의사는 없습니다! 저희는 베아트레아 대공이 보낸 사절입니다!”

아리스의 목소리가 검은 숲에서 메아리쳤다.

공격을 멈춘 것을 보면 확실히 전해진 모양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로부터 로브를 뒤집어쓴 여러 인영이 떨어졌다.

저격수가 길리슈트를 입듯이 올이 듬성듬성한 로브는 나뭇가지나 나뭇잎들로 위장되어 있다.

“여기는 네 놈들이 발을 들일 곳이 아니다.”

“붉은 돌 왕국의 전(前) 섭정, 아헤브람님을 찾아왔습니다.”

남녀 가리지 않고 큰 키에 날씬한 체형.

후드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귀는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 손에 든 것도 전부 활이다.

숲에 살고, 선남선녀에, 활을 들고 있는 판타지 종족은?

당연히 엘프다.

분명 자기소개를 했음에도 분명하고 엘프들은 팽팽하게 겨눈 시위를 놓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인간왕의 배신에 의해 왕국을 잃고,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은 자들이다.

인간에 대한 적개심은 이미 한계치에 달했다.

그들의 뾰족한 귀에 루블 왕국의 인간이고 우리는 제국의 인간이다, 라는 말이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다.

엘프들이 지금 당장 활을 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아리스의 입에서 아헤브람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저항군을 자처하고 있는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존경받는 위대한 현자.

“이야기 들은 바 없다.”

젊은 엘프 무리의 한 가운데에 서있던 여자가 후드를 벗으며 걸어 나왔다.

레몬에이드 정도로 연한 금발이 양 갈래로 나뉘어 내려와 있고 그 아래로 영롱한 보라색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난다.

그 외모는 어지간한 배우보다도 급이 높다.

과연 엘프라는 이름에 걸맞게 북유럽 계통 미녀의 극치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뿌듯해지는 외모와는 다르게 낭랑한 목소리에 맺힌 것은 의심, 적의 뿐.

아마도 그 그룹의 리더인 듯한 그녀가 그런 태도를 취하자 다른 이들에게서도 흉흉한 분위기가 피어올랐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멈춘 것은 늙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멈추게. 네시아.”

“아헤브람 님!”

엘프 장로라는 표현이 더 이상 어울릴 수 없는 아헤브람의 제지에 네시아는 토끼눈이 되었다.

대립한 일행의 사이에 끼어 든 아헤브람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시오. 슐레스비 왕국의 친우들이여. 베아트레아 대공은 무고하시오?”

“마찬가지로 루블 왕국이 골치입니다.”

“붉은 돌 왕국의 장로, 아헤브람이라 하오.”

“처음 뵙겠습니다. 푸른 매 기사단의 단장 쉬펜 아리스라고 합니다.”

쓴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받는 아리스.

모양새를 보아하니 다른 엘프들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전혀 설명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눈앞의 관경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네시아에게 아헤브람이 선수를 쳤다.

“저들은 나의 벗 베아트레아 대공의 사절이네.”

“여기는 선조들이 묻힌 위대한 숲의 성지입니다! 어찌 인간이 발을 들이도록 할 수 있습니까!”

“베아트레아 공작은 선조께서도 인정한 숲의 동반자네.”

목소리를 높여 힐난하는 네시아의 말에도 아헤브람은 엄격하게 하나하나 맞받아쳤다.

애초에 이런 중대 사항을 혼자 결정할 권리는 아헤브람에게 없다.

그가 섭정으로서 붉은 돌 왕국을 통치한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네시아가 그 왕위를 물려받아 여왕이 된 상태이다.

“저들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저들은 인간입니다. 우리의 동포를 죽이고, 겁탈하고, 모욕한 루블 왕국의 인간 왕과 같은 인간이요!”

오래 지난 것도 아니고 불과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아무리 오랜 세월 세상을 지켜보는 엘프라고 하더라도 감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술렁거리는 여론은 차츰 네시아에게 기울고 있었다.

잃은 자들의 증오란 산불과 같다.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불태우는 가장 강렬한 감정 중 한 가지.

이미 거기에 이성은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물러서세요. 일단 장로님의 요청을 받아온 손님인 만큼 거칠게 대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즉각 공선을 타고 돌아가 주시죠.”

“네시아. 아무리 그대라 한들 이런 횡포는 용납할 수 없네. 당장 수호대를 데리고 제자리로 돌아가게.”

“저희야 말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헤브람의 만류에도 당장이라도 전투가 일어날 상황이다. 긴장의 한 가운데에서 뜻밖에 휘진이 나섰다.

“어이, 아가씨.”

“뭣?!”

이런 상황에서 설마 태연자약하게 말을 걸어올 줄이야.

네시아는 분노의 정도가 커지면 헛웃음이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정중한 말도 아닌 ‘어이, 아가씨’라니.

설마 지금 이 상황에서도 베아트레아 대공의 사절이라는 것이 방패막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무른 생각이다.

“너희들은 모두 머저리야.”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화를 참지 못한 네시아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목숨을 걷어갈 정도 단순한 위협사격이다. 하지만 상대의 귓불을 긁어내는 정도의 부상정도 줄 생각이었다.

분명 눈앞의 변변찮아 보이는 사내의 귓가를 스쳐야 할 화살은 맥없이 허공을 가른다.

그리고 눈앞에서 사라진 남자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목에서 서늘하게 느껴지는 단도의 촉감.

그와 동시에 주변을 둘러싼 모든 엘프들이 일제히 휘진을 향해 활을 겨눈다.

“다시 한 번 말해줄게. 너희들은 전부 멍청이들이야. 눈앞 상대의 기량을 확인하지도 않고 선공을 한데다가 뒤를 내줄 정도로.”

“모두 멈춰라!”

“휘진 경!”

휘진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아리스에게 눈빛으로 ‘가만히 있어’를 말했다.

아헤브람과 아리스의 만류에도 대치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휘진도 단도를 치울 생각이 없었고, 눈앞에서 자신들의 리더가 위협을 받는 것을 보고 활을 내릴 만큼 젊은 엘프들이 온건주의자인 것도 아니었다.

“엘프의 얘기는 들었어. 인간이 밉겠지. 너희들의 나라를 침략해 강제로 빼앗은 인간들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겠지.”

생각보다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휘진의 모습에 모두가 주춤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애초에 대화를 할 수 있는 타이밍은 어설픈 도발로 지나갔다.

“왜 대공이 우리를 너희에게 보냈다고 생각하지? 바다 건너 전혀 다른 종족에 불과한 너희를 방관해도 그 누구에게도 비난 받지 않을 베아트레아 대공은 어째서 너희를 도우려 하는 거지?”

“인간의 도움 따위 필요 없고 부탁한 적도 없다!”

“대공은 너희들의 비극에 책임을 느끼고 있어. 적국이라 한들 인간이 저지른 일에 너희 엘프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일말의 책임이라도 져야한다는 양심을 가진 분이지. 그래서 너희를 돕고자 우리를 보낸 거야.”

물론 실상은 다르다.

대공은 단순히 루블 왕국에 대한 견제구를 던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어떤 정보도 없는 이들을 상대로는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는 것만으로도 진실이 되는 법.

“그런 대공의 양심과 호의마저도 인간의 악독함일 뿐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우리를 죽여. 그리고 기뻐하도록 해. 그토록 증오하던 인간을 세 명이나 죽였으니까.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하더라도 흡족하게 웃으면서 자랑스러워할 수 있겠네.”

-달그락

단도를 떨어뜨리고 가슴을 벌려 보이는 휘진의 말투에는 묘한 박력이 묻어나고 있다.

세상에는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군대에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깨달을 겨를조차 없이 파묻힌 자신의 재능.

휘진의 경우엔 선동이었다.

“나 역시 너희 엘프에겐 조금도 피해를 끼친 적이 없어. 한 적도 없는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만큼 대단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곳에 왔어. 어째서라고 생각해?”

“….”

어느새 휘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엘프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당장은 반론할 수 없는 말과 인간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 사이에서 얼굴을 찌푸리는가하면,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다.

“정의다.”

“정의?”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와 정의가 거대한 권력을 가진 불의 앞에 억압당하고 유린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지.”

생각도 못한 휘진의 말에 아리스마저 경악했다.

항상 생각 없고 바보 같은 모습을 보였기에 내심 철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진중한 인물이었던가?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거짓말이라고는 상상도하지 못할 정도로 열의를 띠는 휘진의 말.

과연 남우주연상급이다.

“너희들이 인간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인간으로서의 의분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서 있어.”

주먹을 꽉 쥔 휘진의 뒤에서 리리엘이 조그맣게 ‘위선자…’라고 하는 속삭임이 들려왔지만 무시한다.

“우리는 너희에게 힘을 주러 온 거야. 자유를 위한 투쟁, 그 싸움을 위한 힘을.”

마침 타이밍 좋게 공선의 승강기를 통해서 천막에 덮여있는 ‘그것’이 천천히 내려왔다.

연출로서도 최적이다.

“너희를 핍박하는 악독한 루블 왕국. 그 놈들의 목덜미에 박아 넣을 수 있는 약자로서의 송곳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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