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비밀회담(3)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묻고 싶네.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행동을 할 사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으니.”
“한 가지 부탁이 있어.”
토프키센은 주머니에서 돌돌 말려있던 양피지 지도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내가 만약에 말이야. 언제가 될지 모르는 먼 훗날이지만 제국을 대상으로 전쟁을 하게 된다면 슈펜하우져를 전초 기지로서 제공해 주었으면 해.”
당연하지만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베아트레아 대공이 상당히 독립권을 보장 받고는 있지만 이곳은 엄연히 제국에 속한 공작령의 개념이다.
그가 하는 말은 조국을 배신하고 적국에 매국 행위를 하라는, 루블 왕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라는 제안이다.
“어디까지나 가정이니까. 그리고 비공식적인 제안이니까 쉽게 쉽게 대답해도 좋아. 도의적인 굴레도 벗어 던지고 마음에 끌리는 대답을 하면 되는 거야.”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아리스의 오른 팔이 움찔 떨린다.
순간 놈을 당장 베어버리려 했는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하지만 대공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 대가는?”
“북해와 구 제국 전부에 대한 통치권 및 정치적인 자율권을 보장하지.”
펜으로 둥그렇게 제국 대륙 전부에 동그라미를 치는 토프키센.
어린아이 장난 같을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이다.
루블 왕국의 전력을 써서 제국을 정복한 뒤 여황제로 만들어주겠다니, 거기에 정치적 자율권을 보장한다는 말은 그야 말로 죽 쒀서 개주겠다는 것이다.
“제국 멍청이 녀석들은 당신의 진가를 몰라. 아무런 힘도 세력도 없던 상태에서 홀로 한 지역의 부흥을 이끈 전설인데도.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서 당신의 위업을 폄하하고 아직까지도 훼방을 놓지.”
마치 악마처럼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귓가에 속삭이는 토프키센.
이번에는 휘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중앙과 루블 왕국의 양면 견제에 서서히 힘이 부치는 북해의 상황에선 매혹적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전쟁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지? 유능한 적에겐 존경심을 품게 되면서도 무능한 아군은 적보다 더 증오하게 돼. 그 머저리 녀석들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지 않아?”
“감정대로만 움직이자면 지금껏 할 수 있는 일은 많았다네.”
“감정대로 하는 게 뭐가 나쁜데? 어차피 인간은 모두 세상이란 무대에서 춤추는 배우라고!”
“거절하지.”
생각보다 침착하고도 단호한 대공의 모습에 초조함을 느낀 것인지 열성적인 설득을 하던 토프키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째서지? 그 누구도 이 정도의 제안을 할 수는 없을 텐데.”
“공의 정치적인 소양과 전략 전술은 높게 평가 하고 존중하네. 허나 그대의 방식은 ‘내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엔 어울리지 않아.”
대공의 칼 같은 거절에 토프키센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표정으로 돌변한 그의 모습은 괴로움과 분노로 가득 찬 것으로도 보였다.
기형적으로 뒤틀리던 그의 얼굴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쩔 수 없네. 토렌스.”
루블 왕국의 수호신 토렌스의 손에서 기다란 뇌격이 뻗어 나온다.
물리적인 한계에 육박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는 대기.
“죽여 버려.”
선고와 같은 토프키센의 말끝이 흩어지기도 전에 토렌스는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대한 휘진의 반응은 기민했다.
토렌스의 창이 끝까지 휘둘러지기 전에 시간 정지에 성공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휘진이 아신의 일격에 반응해 시간을 멈추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
휘진이 시간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은 토렌스의 공격이 아닌 토프키센의 말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는 토렌스의 창에는 육안에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력의 격류가 일렁이고 있었다.
닿는 즉시 그 모든 것을 분쇄하는 파괴의 창.
공선조차도 떨어뜨리는 이세계 최강의 병기.
시간이 멈추는 정적 속에 휘진은 숨을 골랐다.
저 창이 만약 끝까지 휘둘러졌더라면 여기 있는 모두가 가루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솔직히 살인까지 할 용기는 없다.
그래도 저쪽에서 먼저 목숨을 노려온 이상 반쯤 불구로 만드는 것에 거부감은 없었다.
그때, 이변은 일어났다.
-파직… 파직…
분명히 멈추었을 터인 시간 속에서 들릴 리 없는 미약한 소리가 들려온다.
타타라의 가설에 따르면 휘진의 능력은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의 정지가 아니다.
원칙대로라면 그가 시간을 멈추는 즉시 많은 것을 느낄 수 없다.
빛이 움직이지 않으니 시각을 잃을 것이며.
공기가 진동하지 않으니 청각을 잃을 것이며.
열이 전도되지 않으니 촉감마저도 제한된다.
하지만 그가 시간을 멈추고도 모든 것을 자유롭게 누려 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단순한 시간의 정지가 아닌, ‘세계의 정지’이기 때문이다.
그의 주변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것을 정지하며 임의로 정지 대상을 규정짓는 능력.
정지 시켜 놓은 세상에서 본인만이 세계선의 예외로서 존재하는 신의 권능에 가까운 능력이다.
즉, 그가 정지 시켜놓은 세상은 휘진과 연관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떤 소리도 빛의 반사도 그 기능이 정지된다.
따라서 그와 전혀 동떨어져 있는 곳에서의 소리는 들릴 리가 없다.
들려서는 안 된다.
그 소리의 끝은 뇌격의 창의 첨단에서 들려왔다.
극한까지 압축된 마력의 수용돌이 부근이 마치 디스플레이의 픽셀이 깨진 것처럼 산발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뭐야, 이거…”
천천히 균열이 가듯이 허공의 균열을 수놓던 토렌스의 창이 점점 생동감을 찾아가며 일렁거릴 때마다 휘진은 마치 손에서 모래가 미끄러져가는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자신의 정지 능력이 ‘깨져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곧이어.
폭풍의 창이 테이블을 뒤집는다.
아신 최강의 일격을 받아 내기에 고작 2M의 거리는 너무 짧았다.
그 누구도 반응할 새 없이 폭풍의 창은 선두의 베아트레아 대공을 꿰뚫고 남은 후폭풍으로 일행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터였다.
“나도 어지간히 얕보인 모양인 걸?”
바라보는 것만으로 시력이 나빠질 것처럼 광채를 흩뿌리는 칼을 타타라는 손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에 떠 있는 벌집 모양의 배리어 이다.
-기이이이잉!!!
그라인더로 강철을 갈아내는 흉악한 사운드와 함께 아슬아슬하게 앞에서 정지한 토렌스의 창.
“제법 실력이 늘었군.”
“나라고 200년 동안 놀고 먹었는 줄 알아? 전력을 다하지도 않은 공격을 막지 못하면 아신이라 할 수 없지.”
신경전을 하는 두 아신을 배경으로 베아트레아는 느긋하게 와인으로 입술을 적셨다.
“모두 멈추게.”
베아트레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창문을 잔뜩 가리고 있던 암막 커튼들이 걷혔다.
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대공 요새의 첨탑.
그 유리창에 비치는 것은 첨탑을 향해 마력활강포를 겨누고 있는 공군함대였다.
포대에 맺힌 마력의 스파크가 육안으로 확인 될 정도의 거리이다.
보통 때라면 후폭풍에 함선이 말려들 수 있기 때문에 발포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즐거운 촌극이었네. 하지만 이쯤하면 될 것 같군. 전부 마포에 휘말려 폭사하는 우스꽝스러운 결말은 공도 원하지 않겠지?”
“하하하,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어디까지 예상한 거야?”
“최악의 수에 대비했을 뿐이라네.”
“마력의 기척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아무리 아신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풀 차징 된 마포를 받아내는 것은 무리다.
“물러서던가, 전부 여기서 죽던가… 인가? 과연 북해를 통합한 기책이 요행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어.”
서로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상황이다.
누군가 핸들을 꺾지 않는다면 모두 죽어버리는 치킨레이스.
옛날의 휘진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겁을 집어먹고 떨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거물들과 어울렸던 탓일까. 아니면 이 방안의 모든 인물이 안색하나 바뀌지 않고 여유를 지키고 있기 때문일까.
예상보다 마음에 파문이 일지 않는다.
마치 소설 속의 일을 보는 듯이 당사자가 아닌 관찰자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정말 당신이 발사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우자(愚者)는 경험을 통해 배우는 법이지. 그 배움을 쓸 일은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붉은 색 광기의 눈으로 노려보는 토프키센.
하늘 색 이지의 눈으로 노려보는 베아트레아.
너무나도 다른 사상을 가지고 서로 다른 두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은 서로가 결코 융화될 수 없는, 서로가 서로의 대척점임을 비로소 이해했다.
“토렌스.”
먼저 그 뜻을 굽힌 것은 토프키센이었다.
저 여자라면 정말로 자폭 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 그가 내린 판단이었다.
토프키센은 토렌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뺨을 호되게 때렸다.
찰진 소리와 함께 토렌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너무 진지한건 네 단점이야. 고지식하게 말하는 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니까 융통성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죄송합니다.”
토렌스는 전혀 죄송한 눈빛이 아니다. 아무래도 토프키센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농담과 토렌스의 과잉 충성으로 묻어갈 예정인가보다.
타타라는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섰고, 칼을 뽑아 들었던 아리스도 납도했다.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그 만큼 빨리 수습이 되었다.
“다음엔 볼 땐 적이겠네. 아쉬워라~”
“그땐 오늘 같은 무승부는 내지 않도록 하지.”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여기 오기 전에 군부에 명령을 하달했어. 내가 일주일 안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전 병력을 동원해 슈펜하우져 공작령을 치라고 말이야. 그 선두에는 토렌스가 서 있을 거고.”
“그런 말 하지 않아도, 비열한 짓거리를 할 생각은 없네.”
“어째 가슴이 찔리는 걸.”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드는 토렌스.
“다시 보는 그 날까지 몸 관리 잘하길 바래. 가능한 오랫동안 놀 수 있다면 좋을 테니.”
◈ ◈ ◈
토렌스가 다녀온 날도 벌써 6일이나 지났다.
그래서 지금이 어디냐 하면.
루블 왕국의 상공, 그것도 공선을 통해 영공에 무단 침입해 비행중이다.
‘이렇게 된 이상 루블 왕국에서도 직접적인 마수를 뻗쳐 올 걸세.’라고 말한 대공이 휘진에과 아리스에게 비밀리에 내린 명령.
바로 엘프의 붉은 돌 왕국의 잔존 세력, 즉 엘프 해방군과 접촉하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공을 포섭하는 데 실패한 토프키센이 정치적 경제적 보복을 가해올 것이니 선빵을 친다는 말이다.
루블 왕국의 상선으로 위장한 조그마한 배는 벌써 며칠 째 이륙과 착륙을 반복하며 하늘을 가르는 중이다.
비행기라면 타 본적이 있지만 비행선은 처음.
생각지도 못한 멀미에 휘진은 아직도 난간을 붙잡고 속을 달래고 있었다.
“아우아우아우…”
옆에는 휘진이 데리고 온 리리엘이 있었다.
평소와 같은 산뜻한 드레스 차림에 깊숙이 눌러 쓴 후드.
귀여운 토끼 귀를 감추는 것은 좀 아깝지만, 루블 왕국은 수인에 대한 차별이 특히나 심하기 때문에 굳이 눈에 띌 필요는 없었다.
휘진과 마찬가지로 공선을 처음 타는 것인지 뱃멀미에 해롱거리는 중이다.
“아리스는 완전 멀쩡하네.”
“저는 원래 지휘관 출신이었습니다. 1년의 절반은 하늘에 있었죠.”
“나라면 지금 월급 3배를 줘도 못 할 거야…”
“돈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명이죠.”
어째서인지 확 멀어져 버린 아리스와의 거리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와 애널 섹스를 한 뒤 거의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아리스도 부끄러운 것이 있기는 한지 일방적으로 적대하는 스탠스는 아니지만 미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