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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57화 (57/154)

57화 기사님과 마사지로 놀아보자(3)

아리스는 브랜디를 진하게 탄 홍차를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대로라면 일주일 정도 휴가를 다녀올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일이 되어버렸기에 휴가를 반납하고 오늘도 늦은 밤까지 근무를 하던 차였다.

집무실에서 나서자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리스의 전속 메이드가 보였다.

얼굴에 주근깨가 있지만 귀여운 상.

이제는 제법 정이 들은 미미라는 아이였다.

최근 바쁜 자신의 일정을 따라다니느라 피로가 쌓인 것일 테지.

“많이 피곤하니?”

“엇… 죄송합니다.”

평소라면 얼굴이 빨개지며 하이 톤으로 답했을 소녀의 목소리가 졸음에 잠겨 나른하다.

“방으로 돌아가도 좋다니까 고집을 부리는구나. 들어가서 쉬렴.”

“아니에요. 잠은 지금까지 잔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리스 님의 목욕 시중까지만 완수하고 돌아가 취침하겠습니다.”

“그럼, 목욕 용품을 챙겨서 오겠니? 난 먼저 몸을 씻고 있을 테니.”

어차피 말린다고 해서 들을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리스는 상냥한 목소리로 미미를 보내고 먼저 대욕탕으로 향했다.

성내의 공동 욕탕은 2개로 나뉘어있다.

하나는 사용인들을 위한 욕탕.

사용인들이 신분이 높은 사람의 주변에 머무는 만큼, 청결 유지를 필수적으로 권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 목욕탕이다.

다른 하나는 성내의 귀족이나 귀빈들만이 이용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중앙 욕탕이었다.

온천수를 일시적으로 받아 식혀 사용하는 사용인들의 욕탕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하 온천수를 마법으로 온도 조절 해 반신욕이 가능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탕이니 말이다.

아리스가 사용하는 욕실은 당연히 중앙 욕탕이다.

벗은 옷가지를 선반에 내려놓고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히 품어져 나오는 욕실의 문을 열었다.

촛불 외엔 조명이 없어서 어둑어둑 한데다가 수증기까지 잔뜩 올라와 시야 분간이 어렵다.

이는 귀족들이 서로의 나신을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 없게끔 조성된 의도적인 장치였다.

여담이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구조 덕에 발을 헛디뎌 뜨거운 온천수에 풍덩 빠지게 되는 일도 빈번하다.

아리스가 야근을 끝내는 시간.

2시를 넘어갔기 때문에 욕탕엔 역시나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들려서 아리스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리는 장소로 향한다.

욕조마다 대리석으로 세워진 벽이 있어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뒤로 넘어가야한다.

이 시간에 목욕을 하는 사람이 달리 있다니.

잠깐 인사라도 해둘까 해, 다가간 아리스는 이내 비명을 삼켜야했다.

“으앗!!! 뭐야!!!”

“…당신이야 말로 여길 들어오다니… 미쳤나요?”

아리스는 상대를 향해 경멸을 듬뿍 담아 노려봐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흥얼거리며 욕조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는 것은 휘진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대공의 총애를 받는다하지만 여탕에 이런 식으로 들어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이다.

“무…무슨 소리야… 혹시 여기 여탕?”

이 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해야 할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아리스의 표정을 보고 휘진은 설마 하며 물었다. 아리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뻔히 대문에 쓰여 있을 텐데요. 남자 욕탕이라면 완전 반대편에 있습니다만.”

“미안 나 문맹이야.”

“….”

거짓말로 둘러댄 것이 아니지만 아리스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당황했다.

귀족이 문맹이라…

대륙어에 능통한 휘진이 글은 모른다는 건 미심쩍다.

“아리스 님?”

이때 미미의 목소리가 들리자 당황한 것은 휘진보다는 아리스였다.

그녀는 다급하게 욕탕에 들어와 몸을 반쯤 담근 뒤 휘진에게 밀착하고 그를 가슴에 품듯이 가렸다.

그 관경이 휘진이 입장에선 어떻게 보였냐면…

베스 타월로 둘둘 말았으나 전혀 커버하지 못하는 가슴의 윗부분과 어깨, 그리고 서양인다운 곧은 쇄골이 아름다운 향연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위로 전부다 정리되지 못한 금발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그리고 타월이 물에 젖은 탓에 깨끗한 가슴과는 미묘하게 색이 다른 피부가 힐끗 힐끗 엿보인다.

아리스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가슴이 미묘하게 얼굴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하는 장관이었다.

“미밋… 윽, 오늘은 목욕시중은 됐으니 빨리 가서 쉬렴.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기를.”

워낙 당황한 지라 혀를 멋지게 씹고 허둥지둥 댄 아리스.

미미의 시야에선 아리스가 욕조에 몸을 반쯤 담군 채 웅크리고 있는 정도로만 보일 뿐이었다.

게다가 워낙 어둡고 숨이 막힐 정도로 수증기도 많은지라 그녀의 아래 숨겨진 휘진에게까진 시선이 닿지 못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미미는 세면 용품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당황한 모양이네. 아리스 경이 이 정도로 놀라는 모습 처음일지도 모르겠는데?”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원래대로라면 놀란 것도 사실이고 그 때문에 자신의 반나체를 보인 것도 사실이니 철저하게 추궁을 했을 터이지만 휘진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다.

아리스는 휘진에게 약을 먹여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리타이어 시킨 전적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불과 며칠 전에.

그 생각이 마치 목에 가시에 걸린 것처럼 그를 편하게 대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보다 슬슬 보이려 하는데?”

“!!!!”

“숨겨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더 이상의 서비스는 필요 없어.”

아리스는 휘진의 코끝에 거의 닿을 듯 말듯 한 자신의 가슴을 보고는 황급히 물러서 가슴을 여며 매었다.

욕조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물에 젖은 타월은 매혹적으로 아리스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물의 요정 같은 느낌이려나.

들어갈 곳과 나올 것이 확실히 구분 되어있는 나이스 바디다.

아무튼 당장에라도 고함을 칠 줄 알았던 아리스가 도리어 자신을 숨겨주기까지 하자 의아해진 휘진이 물었다.

“생각보다 화내지 않네?”

“당신에겐 빚이 두 개나 있으니까요.”

하나는 대련에서의 소원 한 가지, 다른 하나는 휘진에게 약을 먹인 잘못이다.

“당신처럼 강한 남자가 무방비하게 약에 당했다는 것은 그 만큼 저를 신뢰하고 있었다는 말이겠죠.”

“모처럼 생긴 동료였는데. 배신은 좀 쇼킹이었지.”

“윽…!!!”

아리스의 청명한 얼굴이 비통함으로 일그러졌다.

그녀에게 있어선 명령이건 아니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수행했다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인 듯 했다.

휘진은 허리춤에 타월을 두르고 욕조에서 일어나 한 걸음씩 아리스에게 다가갔다.

“게다가 용의주도하게 이쪽을 찾아내기까지 해서 재워버리다니.”

“그건…”

“아무리 명령이었대도 속이 많이 쓰렸다고.”

아리스는 휘진의 한 마디마다 조금씩 뒷걸음질 쳤고 이윽고 탕과 탕을 나누는 대리석 벽에 이르렀다.

언제나 자신감과 올곧음으로 가득했던 아리스의 표정이 수치심과 미안함에 흩어지며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게다가 두 사람의 키 차이가 꽤나 나서 가까이 붙어 벽치기 자세가 되어버린다. 아리스는 휘진의 머리 하나 아래의 높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우물쭈물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저는…”

“하지만 용서하기로 했어. 어차피 명령이었을 뿐이고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네가 막아준 덕에 깽판은 막았잖아.”

“억지로 배려해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어떤 지탄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니까요.”

“그 마음이면 된 거야.”

휘진은 쿨하게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아리스의 턱 밑을 슬쩍 받쳐 들어 그녀의 비색의 눈동자와 눈을 맞추었다.

역시나 예쁘다.

주연 급답게, 금발에 벽안이라는 다소 평범하고 흔하게 넘어갈 수 있는 비쥬얼을 완벽한 균형미라는 이름으로 소화해 내고 있다.

보드라워 보이는 입술과 열기 탓인지 살짝 얼굴에 어린 홍조, 파르르 떨리는 눈망울까지.

배우를 했다면 절대로 기사가 아닌 공주의 역을 맡았을 미모이다.

이런 아가씨가 기사라니… 세상엔 자신의 진면목을 사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하지만… 애초에 약속한 소원하나는 잊지 않았겠지?”

“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아들이죠.”

“너 벌주려고 소원 들이댄 거 아니거든.”

“후후, 그런 점은 믿고 있었습니다.”

아리스는 가벼운 미소를 띠우며 자연스럽게 휘진의 손을 턱밑에서 치우고 그 민망한 자세에서 빠져나오려 했으나…

“그러니까 마사지를 하게 해줘.”

아리스가 나오려는 경로를 예측해 다시 한 번 벽으로 아리스를 몰아넣은 휘진이다. 그리고는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네?”

아리스의 고개가 기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마사지라…함은?”

수상쩍은 버섯을 보는 표정으로 휘진의 말을 따라하는 아리스.

마사지를 하게 해 달라는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하는 모양이다.

“오랜 격무로 지쳐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이지. 내가 성심 성의껏 뭉친 근육을 풀어줄게 이래 뵈도 자신 있으니까 맡겨달라고.”

“그거라면, 당신에겐 아무런 이득이 없지 않나요?”

“이득과 손해만 따지며 살자면 세상은 너무 각박하잖아.”

모처럼 얻은 기회를 두고 순전히 동료를 위해 봉사할 것을 선언하다니. 아리스는 감명 받은 표정으로 휘진을 바라보았다.

“과거 제 짧은 견식이 부끄러워 지는 군요. 휘진 경이야 말로 기사의 귀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칭찬은 그만 둬.”

시커먼 흑심을 저 정도까지 눈치 채지 못하다니, 참 순진하네. 여차하면 경멸스런 눈초리를 받으며 마사지를 강행할 각오였던 휘진으로서는 횡제가 따로 없다. 나름 노림수가 성공했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아리스도 바보가 아니니 마사지가 시작된다면 알아차릴 것이다.

그때 돌변하며 쏟아질 아리스의 매도를 생각하니 그건 그것대로 이 업계의 포상이다.

“자, 일단 여기 엎드려 볼래?”

“잠깐… 설마하니 지금 여기서 즉시 하는 건가요? 이 차림새로?”

“아니? 타월을 치워야하긴 하지만 엉덩이정도는 가려주려고.”

“즉시, 즉각, 당장 죽어주셨으면 합니다.”

이럴 줄 알았다.

순식간에 매섭게 좁아진 아리스의 눈총은 날카로운 칼이 온몸을 난자하는 것처럼 흉흉했다.

온몸의 모공으로 탄산수가 들어오는 듯한 찌릿함.

미안하지만 데미지는 없다!

“네 몸에 특별히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네 건강을 생각했을 뿐인데… 자의식 과잉 아니야?”

“실로 부아가 치미는 말이네요. 게다가 완전 당신을 위해서 아닙니까?”

아리스는 기사로서의 자긍심과 휘진에게의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겠지만… 휘진은 그녀가 이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아리스가 여기에 올 줄도 몰랐고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이긴 하지만 즉각적으로 짜낸 흉계는 효과적이었다.

“…어디에 엎드리면 됩니까?”

“이쪽입니다 고객님.”

최고급 욕탕이라 그런지, 때 마침 누워서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침대가 따로 배치되어 있었다.

휘진의 허리 정도의 높이로 되어있는 대리석 침대는 고급스러운 타월로 감싸여 있었다.

아리스는 머뭇머뭇 거리긴 했지만 순순히 침대에 몸을 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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