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기사님과 마사지로 놀아보자(2)
공군함(空軍艦).
인류가 가진 마법과 마공학 기술을 집대성 해 빚어낸 최고의 폭력.
범선에서 돛의 개수를 줄이고 마력 노심으로 동력과 부력을 담당해 하늘에 띄운다.
단일 화력으로는 최강이지만 수상(水上)에서만 운용이 가능하다는 기존 함선의 명백한 단점을 배를 하늘에 띄운다는 것으로 완벽하게 해소했다. 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만으로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 버렸다.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수명을 가진 엘프들이 보유한 기사와 마법사는 하나하나가 모두 우수한 초 정예.
그런 엘프들을 숲으로 완전히 몰아넣고, 작금에 이르러 루블 왕국의 엘프 말살 및 식민화 정책이 가능한 것도 이 공군함의 힘이다.
구름이 많이 낀 오호트란 대호(大湖)의 위를 굽어보며 현두(舷頭)에 선 토렌스는 인간 왕 루블 토프키센과의 대화를 곱씹고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에 비해 흔들림이 적다고는 해도, 발작적인 돌풍에 흔들림이 큰 공선인 만큼 그 끄트머리에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것은 보통 담력으로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용기도 무엇도 아니다.
애초에 아신인 그가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 해도 죽거나 하지 않는다.
엘프들과의 전쟁도 싱겁게 끝이 나고 이제는 선착장에서 편하게 쉬고 있어야 할 제 1 급함 ‘비센’이 뜬금없이 왕성 동부 오호트란 대호의 위를 날고 있는 것은 반란진압 때문이었다.
주동자는 엘프 왕국인 붉은 돌 왕국의 전(前) 섭정과 그리고 그에 협력한 아신, 피닉스.
인간 왕의 정책에 따라 시행된 반 엘프 법령은, 무단으로 왕국의 숲을 점거하고 인간들에게 해악을 끼치는(이 점은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열등한 엘프들을 끌어 내리려는 정책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 왕은 엘프들의 인권을 박탈하고 노예화 했으며 그들의 숲을 불태우고 신목을 베어내었다.
지금은 모든 엘프의 왕국들이 지도에서 사라지고, 수많은 엘프들이 죽임을 당하고 노예가 되었다지만… 남은 잔당들이 모여 반기를 들고 다시 한 번 엘프의 해방과 왕국의 재건을 위해 뭉칠 것은 기정사실이다.
만약 여기까지였더라면 지금까지 엘프들과의 전쟁처럼 공군함대를 출동시켜 포격을 가하는 것만으로 족했으리라.
문제는 여기에 끼어 든 몽고메리 피닉스.
토렌스와도 구면인 아신이다.
언제나 약자의 편임을 자처하며 그 어떤 불의에도 굴하지 않는 그녀는 엘프들의 구심점이 되어, 반란 직후 출동한 4함대를 괴멸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골치 아프군…”
언제나 정의를 입에 달고 살던 시끄러운 소녀.
그 어떤 측에도 서지 않고 언제나 약자와 스스로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쪽에 서서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정의의 여신.
귀찮은 녀석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적으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때문에 토렌스는 스스로가 조금은 낙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드문 일이다.
100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대부분의 감정은 망각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한낱 옛 친우의 날개를 자신의 손으로 부러뜨리는 것에 주저하고 있다니.
도망쳐주면 좋겠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겠지.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지만, 세월도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각하, 전방에 적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현재 맹렬히 접근 중입니다.”
“본 함을 제외한 모든 함선을 물려라! 말려든다.”
굳은 표정으로 다가온 함장은 토렌스에게 경례를 한 뒤 보고했다.
여기서부터 보인다.
호수 위로 피어오른 물 안개위로 찬란하게 빛나는 빛을 내며 함대를 향해 날아오는 한 마리의 거대한 불새가.
양 날개를 펼치면 30M는 족히 되는 거대한 새가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함께 대기를 불사 지르며 접근하고 있었다.
그 불꽃은 때로는 황금처럼 때로는 석양처럼 빛났고 하나하나가 불덩이로 이루어진 깃털들이 추진력을 더하고 있었다.
토렌스의 등 뒤로 별안간 5M정도의 거대한 창이 생겨났다.
발끝에서 피어난 마력에 응하여 웅웅거리는 공명음을 내고 있다.
압축된 마력은 또 다시 주변의 마력을 끌어당긴다.
마법 학회에서는 이 현상을 ‘마력의 자기화’라고 정의 내렸다.
토렌스가 창을 비스듬히 꼬나 쥐자마자 함선의 마력 노심에 의존하고 있던 마력등과 부력장치에 막대한 부하가 가해졌다.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공선 전체가 흔들린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출력을 가진 무려 2개의 주포를 가진 1급함 ‘비센’이 고작 한 명의 마력에 제어권을 잃고 비틀거리는 것이다.
그 상황의 전율을 느끼면서도 함장은 현두에서 허공으로 몸을 던진 불패의 장군, 루블 왕국의 수호신인 토렌스의 뒤를 배웅했다.
◈ ◈ ◈
‘우선은 군부의 장악이네.’
주어진 것은 핏줄 뿐.
자신의 아비에게서 조차 버림 받았던 불운한 황태자는 첫 만남에서 그렇게 말했다.
서자로 태어난 천한 피, 왕의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첩의 자식이었다는 시시한 이유 하나로 궁중의 관리들에게 무시를 받았던 그는 황금 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며 순금의 왕좌의 드러누워 말했다.
이미 그 시점에서 토렌스는 토프키센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토렌스는 루블 왕국의 초대 국왕과의 ‘계약’에 묶여 무의미할 정도로 긴 시간을 왕국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리고 목격해 왔다.
인간이 권력 앞에서 어느 정도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
물보다 진하다는 피가 금빛의 잔에 담긴 권력이라는 감미로운 술에 비하면 맹맹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거기까지라면 토프키센도 지금까지의 황태자들과는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그의 위로 정식 후계를 받을 수 있었던 자식은 7명.
정상적인 방법으론 왕의 자리에 오르기는커녕 그들 중 하나가 옥좌에 오르는 순간 손가락질 한 번에 목이 날아갈 처지였다.
그러나 그가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성인이 되기 전 7년 간, 그를 제외한 모든 황태자들이 죽어갔다.
왕국 내에서의 권력 다툼엔 관여하지 않는다는 계약을 하고선 그 과정을 철저히 관찰자로서 지켜봤었던 토렌스다. 그는 토프키센이 왕좌에 오르기 전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모살을 준비하고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발판으로 삼아왔는지 지켜봐왔다.
주목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토프키센이 방법을 고를 때의 과정이었다.
그에게는 도의적, 도덕적인 굴레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곤충이 방법을 고르는 것처럼 ‘먹어치운다 또는 먹지 않는다’와 같은 단순한 선택.
그 어떤 인간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은 채 토프키센은 서자의 몸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왕좌를 차지하겠다는 목적을 그저 맛있는 사탕을 골라먹는 정도의 노력으로 해내었다.
“공공의 적이 필요해. 루블 왕국은 긴 전쟁으로 지친 대다가 왕이 바뀐 뒤로는 명백히 적의가 향할 곳이 없어 붕 떠있지. 그런 의미에서 엘프는 좋은 먹잇감이야.
우선 쓸데없을 정도로 곳곳에 왕국을 만들어서 교역로를 헝클어뜨리니 상인들의 미움을 받을 거고, 선민사상으로 인해 엄하게 얕잡아보였던 일반인들에게도 어필이 쉽지. 이놈들과 전쟁을 하면서 곳곳에 내 사람들을 심어 놓으면 군부에서도 강력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어. 전쟁은 승진을 만드니까 말이야.”
농담이라고 생각했건, 너무 쉽게만 생각한다고 여겼건 간에…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의 측근들은 군부 곳곳에 뿌리 내렸으며, 군부는 전쟁을 만들어주는 인간 왕에게 환호했다.
죄 없는 엘프들의 피를 양분으로 삼아, 토프키센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
대적하던 귀족들은 귀기어린 그의 가학성의 피해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여식들과 부인은 한계를 모르는 그의 성고문에 꺾여 떨어져갔다.
역사는 반복된다.
토렌스는 그 사실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청년은 어떠한가?
지금껏 광기어린 젊은 왕들의 말로처럼 반짝하며 빛나다 반역의 칼날에 이지러질 것인가.
아니면 이 지긋지긋한 지루함을 타파할 정도의 장대한 서사시를 써줄 것인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토렌스는 물었다.
“다음의 목표는 어디입니까?”
“글쎄, 아무래도 중앙 대륙의 북해겠지? 심심하게 끝난 전쟁은 용서할 수 없어. 그리고 북해엔 굉장한 여 공작이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 쪽을 괴롭혀줄 생각인데… 재밌지 않겠나?”
◈ ◈ ◈
정신을 차렸을 땐 어마어마한 열기를 가진 불새와 서로 눈이 마주칠 정도의 거리였다.
공중에서 자유낙하를 하는 토렌스와 자유자재로 비행을 하는 몽고메리.
공중전에서의 유·불리라면 이미 명확하다.
하지만 토렌스는 몸을 억지로 비틀고 자신의 창에 마력을 감았다.
일대의 마력량을 진공에 수렴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동화력. 길고 긴 창의 꼬리에서 날 끝까지 벼락이 치듯 푸른 번개가 흐른다.
‘일단은 무대를 바꿔볼까?’
“토레에엔스으으으!! 또 나쁜 짓이나 하고 말이야!!!”
불새는 거대한 위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아직 앳된 소녀의 목소리를 내며 토렌스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았다.
그야말로 물리법칙의 폭거.
공군함이라도 가볍게 폭발시킬 기세를 지닌 그녀는 가속에 가속을 거듭한다.
이미 양자의 거리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좁혀졌다.
아무리 마력을 두르고 있다한 들 ‘아신의 진심 어린 일격’을 받아내기엔 요원해보였다.
“떨어져라.”
주변의 마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것도 모자라 토렌스의 마력까지 뜯어낸 그의 창은 차라리 한 줄기의 섬광을 쥐고 있는 것처럼 빛이 났다.
토렌스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몽고메리를 보고 한 것은 간단했다.
인간이라면 그저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죽어버릴 정도의 강렬한 힘을 품은 창을 던진다.
한편 몽고메리는 그 공격을 피할 수도, 피할 생각도 없는 것처럼 주변에 4개의 불기둥을 이끌고 아음속으로 급 가속했다.
[-----------!!!!!]
소리의 영역을 벗어난 충격파.
아신과 아신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충분히 거리를 뒀던 공군함의 마력 노심과 순간 오작동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수차례에 걸쳐서 퍼져나간다.
한밤의 하늘을 대낮처럼 밝게 만드는 휘광과 함께 두 아신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아리스는 루블 왕국에 파견되어있는 스파이로부터 받은 서류를 내려놓고 안경을 벗었다.
“후우…”
루블 왕국의 인간 왕이 엘프 왕국들을 궤멸시키고, 그 뒤에 이어진 반란마저 성공적으로 제압했다는 보고였다.
어차피 북해는 바다를 건너야 있는 루블 왕국에 당장 직접적으로 수를 쓸 여력이 없다.
그럼에도 무서울 정도로 세를 불리고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굳히는 인간 왕 토프키센의 행보를 보자면 두려울 지경이었다.
특이사항이라 할 점은 아신 몽고메리 피닉스와 루블 왕국의 수호신인 토렌스와의 격돌.
꼬박 이틀에 걸친 혈투 끝에 제압당한 피닉스는 오호트란 대호에 가라앉아 봉인 당했다.
이로서 인간왕의 앞을 가로막을 변수는 완전히 사라졌다.
만약 피닉스가 토렌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엘프 연합들의 구심점이 되어주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벌 수 있었을 테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의미이겠죠…”
이제 남은 유예시간은 더욱 짧아졌다고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