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양손의 꽃(4)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것이 너무 많아 암살을 시도해 올 위험을 간과한 채 가벼운 마음으로 휘진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만약 그가 죽어버렸다면 얼마나 많은 후회를 떠안았을까?
“리리엘만 대장급으로 보이는 녀석을 추격하다 당했어, 심하지는 않고. 타타라가 완벽하게 회복시켰데.”
“지금 양호하다는 얘기인가?”
“잘 자고 있더라.”
‘잘 자고 있다’는 휘진의 말에 대공의 눈가가 살짝 올라갔다.
안 그래도 신경 쓰이는 소문이 있던 차이다.
문안을 갔을 때도 같은 방에서 서성이는 토끼귀의 수인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여지없이 미인이었다.
어디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여자를 꼬셔대는지…
“그녀와도 애인 관계인가? 북해는 초행이라면서 상상 이상으로 발이 넓군.”
“너무 그러지마 내 마음 속 NO.1은 대공님이니까.”
찔리는 부분이 굉장히 많은 휘진은 난색을 표했다.
한편으로 타타라와의 관계는 이미 들켰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하다.
“키스엘 가문의 장녀와는 도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건가?”
“별 거 아닌 사이라니까 그러네.”
대공이 둘 사이를 은근히 궁금해 하는 모양이다. 설마 질투라도 하는가 싶어 뿌듯한 마음도 든다.
그렇더라도 지금은 뭔가 화제를 돌려야만 할 타이밍인 것 같다.
“얘기는 들었어. 약혼은 취소되었다며?”
“연회도 성공리에 끝났고 말이네.”
“그래, 그런 밥맛인 녀석이랑 대공님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애초에 계약 관계로 이루어진 사이였을 뿐이고 사심은 없었다네. 허나 그대에게 이 몸의 남자관계를 추궁 받는 것은 불편하군. 자네야 말로 날 좋아라 따라다니면서 이 여자 저 여자 만나지 않는가?”
뾰족하게 날이 선 목소리가 양심을 쿡쿡 찌른다. 하지만 시간 정지 능력을 갖고 이 정도 횡포에 그친 점은 칭찬해야 해 주지 않을까?
그렇다고 시간 정지 능력을 여기서 말해버릴 수도 없으니 곤란한 노릇이다.
잠시 할 말이 없어 땅만 쳐다보고 있는 휘진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대공은 어쩔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 내 잘못은 그대의 줏대 없음과 등가교환 하도록 하지.”
“잉?”
“앞으로 날 좋아하고 싶거든 다른 여자완 놀아나지 말게.”
“나 대공님을 이성으로 좋아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에?”
대공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굉장히 불편한 정적 가운데 대공은 혼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민망함이 이 정도로 사람을 몰아넣을 수 있는지에 실시간으로 관람하는 느낌이다.
물론 휘진이 방금 한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대공이 가끔씩 뭔가 혼자 다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을 풍기는 걸 볼 때마다 놀리고 싶던 차에 한 번 질러보았다.
졸지에 혼자 설레발을 친 꼴이 된 대공님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럴…리가…”
평소와 그다지 달라 보이는 점이 없어보일지도 모르지만 백금발을 넘긴 귀 부분이 새빨갛게 변하고 있다.
“그 전까진 아니었는데 지금 반해 버린 것 같아.”
“역시 그렇지 않은가!!”
지금까지 대공님을 만나온 시간 중에 가장 큰 목소리로 말하며 대공님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원망 어린 눈빛으로 투닥투닥 가슴을 때리며 ‘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고 난리인 겐가!’ 같은 말을 한다.
이제야 장난인 걸 간파한 건가?
역시 노련한 척해도 어쩐지 애 같은 부분이 있는 대공님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랜만에 느끼는 썸씽의 감각이라 휘진은 마치 순수했던 학창시절로 돌아간 양 향수에 잠겼다.
휘진의 장난에 토라진 듯한 표정을 짓던 대공이었지만 민망함이 가라앉아 얼굴이 원래 색으로 돌아올 때 쯤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말이네, 내가 그대로 펠릭스와의 약혼을 공표하고 정말로 혼인했더라면 그대는 어쩔 셈이었는가?”
“굉장히 속상해하며 대공님의 정부 자리를 노렸겠지?”
“그대가 대륙어에 능통하다는 것은 알고 있네. 정부의 의미를 헷갈린 것은 아니겠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바람의 상대라도 될 작정이었다.
물론 기회를 틈 타 펠릭스는 어떻게든 죽였을 거지만.
“어째서인가? 이쯤 되면 나야말로 묻고 싶네. 자네는 어째서 날 따르는가?”
“몰라.”
‘가슴이 시키니까’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대사 면전에서 할 수는 없다.
휘진이 부끄러워하는 만큼 아슌푸틀 역시 멋쩍은 것인지 연신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꺼내왔다.
“자네 북해의 민담 ‘행복바라기’를 아는가?”
“다행히 처음 듣지.”
“한 번 들어보겠나?”
“대공 님의 얘기라면 무엇이든 즐겁게 들을 수 있다고.”
그의 모습에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웃은 대공은, 나이트가운의 끝자락을 정리하고 근처에 있던 벤치에 기대어 앉았다.
“둘이 있을 때는 아슌푸틀이라고 불러도 좋네.”
“응?”
“내 이름일세. 베아트레아 아슌푸틀.”
발음이 굉장히 어려운데다가 어쩐지 강아지의 품종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입 밖에 낼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대공님이 벤치에 닿지 않는 발을 붕붕 흔든다.
아슌푸틀은 뭔가 민망하거나 부끄러울 때 동작이 커지는 듯하다. 평소에는 나긋나긋하고도 위엄 있게 절제된 몸동작만을 보여주는데 말이다.
“알겠어, 아슌푸틀.”
“역시 조금은 낯 간지럽군.”
정말로 간지러운 듯 웃으며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 세상엔 모두가 자신의 지위와 재물에 만족하고 그 어떠한 갈등과 분노도 없이 평화 속에 살고 있었네. 그러나 단 지하실에 갇힌 행복바라기만큼은 그러지 못했다네.
그는 쓸쓸한 지하 감옥에서 차가운 바닥에 몸을 누이고 딱딱한 빵 하나와 더러운 물 한 컵으로 하루를 연명할 뿐이었네.”
“왜 그녀석만 불행했는데?”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가 불행 속에 떠올린 행복하고 싶다라는 희망이 바깥의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비법이었으니까. 세상 모든 사람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외면했다네. 그가 불행해야만 자신들의 행복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를 골방에서 데리고 나왔지. 그와 동시에 세상은 지금처럼 혼란과 죄악에 가득 차버렸다는 이야기일세.”
동화로 들려주기엔 너무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이다.
“씁쓸한 이야기네. 행복바라기가 행복하게 되어서 모두가 자신의 불행을 찾았다는 말이지?”
“그렇지. 만약 그대가 행복바라기 앞 소녀였다면 어떻게 했을 텐가?”
“나는 구하지 않겠어. 왜냐면 행복바라기가 얻을 행복의 양보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의 총량이 더 클 테니까.”
판타지 내에서는 주로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는 건가 싶은 담화였다.
현대에 와선 얘기 도중 꺼냈다가는 금세 어색해지거나 대화가 단절 될 것 같은 주제를, 마치 좋아하는 영화의 내용을 논할 때처럼 주고받는다.
지금만 해도 대공은 휘진의 말에 한참이나 답을 하지 않고 정원 어딘가에 있던 벌꿀주를 나눠주었다.
“이번에 진상 받은 남부의 벌꿀주라네. 100M가 넘는 나무의 목청을 따서 만들었다더군.”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공은 굉장한 애주가였다.
식사 중에도 포도주를 곁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대화가 길어진다 싶으면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술을 꺼내왔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바라기의 얘기를 들으면 소녀를 비난하지. 실제로 이 민담이 주는 교훈도 섣부른 동정심에 책임지지 못할 결과를 얻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니까. 말하자면 공리적인 관점에서 소녀의 어리석음을 지탄하는 게야.”
대공과 함께 잔을 들어 절반을 비웠다. 산뜻한 금빛의 액체가 혀 위를 방울처럼 굴러가며 적시는 것이 느껴진다.
술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휘진이 먹기에도 맛있는 고급 술.
이세계로 와서 다행이다.
현대로 돌아가 인증 사진을 올린다면 많이들 부러워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게 있어서 정의란 소녀의 행동과 같은 것이야. 공리적인 관점에서 재단하는 것이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없지. 상황과 조건을 따진 정의, 상대적인 원칙은 정의가 될 수 없어. 설령 그 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올바르지 못한 일을 보면 바로 잡고 그 대가를 감수하는 것, 절대적인 황금의 원칙, 그것이 정의라네.”
“어려운 얘기네.”
“그렇지, 어려울 수밖에 없고 어려워야만 하네. 갈등 속에서 원칙을 찾고 끝없는 고도의 일반화를 거쳐 정제해야만 감미로운 정의가 되지. 바로 이 술처럼.”
솔직히 말하자면 슬슬 대화를 따라가기가 벅차지고 있다.
과연 이세계라지만 이 어린 나이에 이런 업적을 달성한, 그리고 아마도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업적을 지닌 사람은 일반인과는 생각의 궤를 달리하는 것일까?
휘진은 여태 정의가 무엇이고 올바른 삶의 자세란 무엇인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사실 나 좋으면 그만인 것이 정의 아닌가?
“대공님은 틀림없이 좋은 통치자가 될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만 세상은 이상적으로만 흘러가진 않더군.”
“군주는 짐승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싸워야한다.”
“그 말대로지.”
언젠가 교양 때 배워두었던 구절을 그대로 읊었고 대공은 그에 동의했다.
뭔가 유식한 대화를 나누게 되니 무식한 밑바닥을 들키는 것이 싫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뒤지게 된다.
굉장히 빠른 페이스로 마셔 벌써 비워버린 술잔을 채우고 서로 건배했다.
술에 취해서인지 하늘빛의 눈동자가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워 보인다.
“외줄타기와 같은 거야. 그 절묘한 밸런스 중에 발을 한 번이라도 헛딛는다면 결과는 정해진다네. 영락하거나, 내 안의 괴물에 삼켜지거나.”
대공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휘진의 잔 역시 부드럽게 뺏어 들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인 건가? 싶어 달콤한 술의 뒷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아쉬움을 느낄 때.
“그러니 내가 발을 헛딛으려할 때 기탄없는 질책으로 날 잡아주게. 그것이 내가 그대에게 허락한 유일하고 귀중한 책무라네.”
어쩌면 지금 당장의 형편 좋은 거짓말.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자기기만 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마치 단단히 손을 잡고 있는 듯한 기묘한 안정감이 마음에 테두리를 두른다.
“그대와 함께 테라스로 향했던 날은 실은 부탁할 일이 있어서였네.”
“어떤 일인데?”
대공은 손목에 있던 머리끈으로 머리를 젖혔다. 그리고는 나이트가운의 양 끝자락을 걷어 올리고 어깨를 감싸던 실크 케이프를 벗어 던진다.
“한 곡 추실까요? 젠틀맨?”
우아한 몸짓으로 손을 내밀며 대공이 에스코트를 부탁했다.
사교댄스라면 어제 잠깐 연회에서 구경한 것 말고는 생경하지만 거절할 수 없다.
무려 대공님의 손을 합법적으로 붙잡고 몸을 밀착할 수 있는 기회.
그 손을 맞잡으며,
“영광입니다 레이디.”
라고 말하는 수밖에.
반주도 없이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를 음악 삼아 서로의 발을 밟아대며 어설픈 춤을 추었다는 그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