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음모(5)
리리엘의 발밑에서 뻗어나간 마법진은 순식간의 골목 모든 건물의 벽을 기어올라 감쌌다.
어차피 상대의 동선을 예측해 미리 연금술을 발동하는 트랩 형식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무리 이쪽에서 점 혹은 선에 해당하는 공격을 쏟아봤자 상대는 체술의 달인, 맞아주지 않는다.
특히 특이한 궤적이나 완급조절을 거치는 움직임을 선행해 미리 타격을 가하는 데에도 애로사항이 꽃피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면, 즉 산탄에 의한 공격이다.
일전에 휘진에게 가했던 마법진의 몇 배에 해당하는 동조의식을 전개 및 발동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현재 그녀 자신이 사용가능한 거울나라의 병사 중 가장 강력한 순백의 기사와 순홍의 기사를 각각 양 옆에 소환해 냈다.
만약 가면녀가 저 무식할 정도의 산탄의 폭풍 속에서 운이 좋게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기다리는 것은 붉은 기사의 일격. 마력 포에 준하는 무시무시한 관통력을 가진 리리엘이 갖고 있는 최강의 창이 기다리고 있다.
만에 하나 이마저 극복해 반격을 해 온다더라도 절대적인 방어력을 자랑하는 하얀 기사가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순백의 기사가 리리엘의 앞에서 거대한 방패를 펼쳐 산탄에 휘말리는 것에 대비하고, 한계까지 축적된 마력이 임계값을 넘겨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폭발하기 직전.
가면녀의 발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회전.
발끝에서 발목을 타고 허리를 축으로 삼아 전신으로 뻗어나간 맹렬한 회전은 물리법칙의 사슬을 여기서 끊어 보이겠다는 양 불과 콤마 초 만에 신체 전체를 휘감는 회오리가 되었다.
직선으로 들어오는 힘의 방향을 틀어 공격을 튕겨내는 화경의 진수가 검은 옷자락에서 펼쳐진다.
떨어지는 소나기마저 전부 튕겨낼 수준의 움직임은 리리엘에겐 그저 가면녀의 신체가 일순 부풀었다 줄어드는 정도로 보였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던 강화된 건물 파편들이 철판을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불똥을 튀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괴물…”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다.
수 십 개의 크래모어가 터진 것과 비슷한 수준의 공격을 맨몸으로 그것도 상처하나 없이 막아낸다는 것은 리리엘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선다.
눈앞의 적에게서 등골을 얼게 하는 오싹함을 느끼면서도 리리엘은 반사적으로 붉은 기사를 장착한 자신의 오른팔을 내밀었다.
붉은 기사는 리리엘의 오른쪽 팔을 감싸는 마상창을 경계로 한 몸이 되어있다.
하나의 검 자루를 나란히 쥔 자세 그대로 마상창의 끝에 매달려있던 주홍색의 마력이 아지랑이를 피웠다.
그때 가면녀가 회전하기 바로 직전 던졌던 단도 중 한 자루가 느릿한 곡선을 그리며 리리엘의 얼굴로 날아온다.
공격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공격을 신속한 반응 속도와 견고한 방어력을 가진 하얀 기사가 놓칠 리 없었다.
하얀색의 거대한 방패로 특이한 모양의 단도를 내리치는 순간 이변은 일어났다.
“어…라?”
갑자기 지면이 기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면이 자신에게 돌진한다는 느낌이었다.
리리엘의 몸이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고 그녀의 오른팔을 따라 직선으로 조준하던 붉은 기사의 창 역시 허무하게 바닥에 일격을 꽂는 것으로 그 소임이 다했다.
마치 강력한 레이져로 지져버린 것처럼 모래마저 녹이며 일직선으로 활활 타오르는 불의 장벽을 만들기야 했지만 이것은 명백한 오조준, 오발이다.
바닥에 몸이 허물어지기 직전 땅을 간신히 짚으며 얼굴을 박는 것을 모면한 리리엘은 그제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두통과 매스꺼움을 느꼈다.
그 원인은 가면녀가 던진 단도.
하얀 기사의 방패와 부딪힌 단도가 기묘한 소리를 내며 리리엘의 달팽이관을 뒤흔든 것이다.
리리엘은 가면녀가 사용하던 단검의 칼날 받이 부분이 소리굽쇠의 형상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설마하니 소리를 이용한 공격일 줄은…’
그와 동시에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가면녀와 하얀 기사의 방패가 격돌했다. 하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대지의 힘을 끌어올려 그 중심을 잡고 있는 하얀 기사는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가면녀의 공격을 막아섰다. 그는 동시에 놀랍도록 우수한 자율방어체제로 가면녀가 리리엘에게 접근 하는 것을 모조리 차단했다.
리리엘은 곧장 하얀 기사에게 추가적인 명령을 내려 자신의 주변에 진공 층을 만들어 소리를 차단했다.
하얀 기사는 비단 물리적인 충격뿐 아니라 추가적인 커멘드에 의해 마법, 주술, 연금술, 각종 오염상황에 대해서도 대처가 가능한…, 그야말로 천의무봉의 방패였다.
소리는 어쨌거나 매질이 필요한 파동이다. 두텁게 만들어진 진공의 층은 완벽하게 모든 음파를 차단해 내었다.
간신히 리리엘이 바닥에서 무릎을 때고 일어서 반격을 개시하려 할 때였다.
억지스럽다 싶을 정도로 하얀 기사의 방어 범위의 틈을 노려 던진 단도가 리리엘의 발밑에 꽂힌다.
“울어라.”
그리고 가면녀의 목소리와 함께 단도는 폭음을 방출한다.
“꺄아아악!!!!”
그리고 그 음파의 공명은 좁디좁은 진공 벽이 쳐진 리리엘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오롯이 그녀의 심장으로 향했다.
“커…커허어억…끄으윽…!!!”
가슴을 쥐며 고통스러워하는 토인의 앞에서 가면녀는 아까 튕겨져 나갔던 단도를 다시 주워들었다.
소리가 퍼져나갈 곳도 없이 한 곳에서 폭발했으니 좁은 동굴에서 음공을 사용한 것 이상의 효과가 나왔을 것이다.
심장 박동에 맞춰 공명을 일으킨 음파는 즉시 심정지를 일으켰다.
소리자체의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파동을 얼마나 상대방의 심장소리에 겹치는 가가 중요할 뿐. 그런 의미에서 리리엘이 만들어낸 음파를 차단하는 진공 벽은 자충수였던 셈이다.
밖에서 소리가 나가지 못한다는 말은 안에서도 밖으로 음파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으니 말이다.
이대로 확인사살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이미 실력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남자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술자가 죽어가는 지금도 완벽하게 자율동작을 유지하고 있는 하얀 기사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을 마크하고 있다.
반면 곳곳에 그 회로를 뻗었던 마법진은 꺼질 듯 점멸하고 있다.
어차피 확실하게 심장이 멎은 이상 생명은 길어야 5분…. 이 경우는 확인사살이 필요 없다고 판단한 여우가면은 즉시 자리를 이탈했다.
◈ ◈ ◈
‘평화롭다.’
물속에서 한 없이 가라앉는 느낌을 느낀다.
시끌벅적한 세상의 잡음도 이곳에만큼은 발을 들이지 못하는지….
스스로의 혈액이 도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고요 속에서 리리엘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의식의 흐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리리엘이 생전 살아오며 품었던 기억들을 파라노마처럼 펼쳐내고 있었다.
가문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인정받았던 날, 이바나의 이름을 계승하게 되었던 날, 자성마법을 연구하며 대 학자의 칭호를 받았던 날, 가문의 어려움을 몸소 느끼고 북해로 떠났던 날, 그리고 거기서 만났던 무뢰한.
“어차피 너도 지배당하는 걸 원하고 있을 뿐이잖아?”
아무런 소음도 없는 고요한 공간이었을 터인데.
꼴도 보기 싫은 그 인간은 어째서인지 무음의 장막을 찢고 빈정거렸다.
몸을 억지로 취하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협박과 굴욕을 선사했던 일생일대의 원수.
만약 3번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절대로, 반드시 적으로 만나고 싶은 재수 없는 쓰레기다.
“오직 나만이 너에게 진정한 쾌락을 줄 수 있어.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가식을 발가벗기고 오로지 지배당하는 것만이 허락된 비참한 환희 속에서 암컷의 기쁨을 깨닫게 해줄게.”
‘또 뭐라는 거죠, 저 인간은…’
재수 없어.
짜증나.
안식을 방해하는 그의 모습이 싫어 손을 휘젓자 그는 물웅덩이 위의 구름이 잔물결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저는 키스엘 리리엘 이바나, 긍지 높은 달 토끼의 이름을 잇는 대학자.’
“그래? 그렇다면 긍지 높으신 달토끼 님이 왜 그렇게 자위를 하고 계신 겨?”
‘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자신은 그대로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스스로의 음부를 더듬고 있었다.
‘이…이건 아니에요!!!’
어느새 성큼 다가온 그가 손목을 붙잡는다. 정신을 차리고 확인한 상대는 휘진이다.
한 손에 움켜잡히는 가느다란 손목 완력으로는 절대로 저항할 수 없는 어른 남자의 힘.
어쩐지 숨이 가빠온다.
“절대 잊지 마, 넌 나에게 지배당하는 걸 원하고 있어. 단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을 뿐이지.”
‘그런 일…!!!’
무언가 반응을 하려던 리리엘의 의식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함께 갑자기 밝은 빛으로 뒤덮였다.
◈ ◈ ◈
“하아 하아… 당신도 참~ 의식을 잃은 여자아이 앞에서 섹스라니 무슨 정신이야?”
“정정하지, 정확히는 ‘애널 섹스’다.”
“하으읏…!!! 자…잠시만!! 조금만 천천히…”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감고 있자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리리엘은 물음표를 띠우면서도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일단은 몸 어디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이 솜에 젖은 듯이 무거웠기 때문이다.
“이 구멍을 나 혼자 그것도 최초로 개발할 수 있게 되어서 영광이라고. 이렇게 쫀득쫀득하게 달라붙는 점막을 내버려두다니 딴 놈들은 눈이 삐었구먼?”
“으으… 기분이 이상해에에… 하앙♡”
“그 대단한 아신이 결국 후장 쑤셔지면서 느껴버리다니. 암컷은 어쩔 수 없는 암컷이구먼?”
“그건 전부 당신 탓이자나아아앗…!! 거기…♡ 거기가 좋아…!!!”
아무래도 잘못된 곳에서 잠이 들어버린 듯싶다.
그런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까까지 꿈속에서 들었던 원수 중의 원수 휘진의 목소리, 그리고 그가 말하는 다른 한 사람은 아신…이라고?????
“보여질까봐 흥분하는 거 다 알고 있거든? 이 녀석 당신을 만나기 위해 북해에 왔다더라? 널 추앙하는 사람의 눈앞에서 뒷구멍에 자지를 박고 있는 느낌은 어때?”
“….쿠우웃!!!!”
“앞은 벌써 홍수네.”
질퍽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대 시트가 찢어지는 소리가 같이 들렸다.
거칠어지다 못해 흐느끼는 소리처럼 되어버린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토록 우아해 보였던 타타타 타타라 님이라니.
리리엘은 충격을 받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 둘의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좋아 지금 제대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환청이 들리는 것일 수도 있다.
아주 조금만 눈을 떠서 확인해 보는 거다.
살이 부딪히는 소리에 조금씩 홍조를 띄우며 리리엘은 실눈을 떠서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토끼 아가씨 깨어났네?”
“바로 들켜 버렸어욧!!!”
“어라? 일어났어? 옷 벗어 너도 같이하자.”
“흐아앙!!! 난 맨날 이런 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