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음모(3)
휘진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외출을 감행한다. 오랫동안 방치해버린 화가 할아버지를 찾아가기 위함이다.
원래는 연회가 끝나자마자 가볼 생각이었지만 아리스와 대공님의 함정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사이 도망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화가영감은 휫센 상단의 음모를 캐낼 수 있는 중요한 참고인이다.
서두르느라 제대로 취조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아직 물어볼 것이 많다.
“이런 점은 꽤나 성실하시네요… 삼일이나 잠들어놓고 일어나자마자 일이라니.”
“뭐 주인공인데 이 정도는 해 줘야 하지 않겠어?”
“…보통 주인공이 예쁜 여자에게 이런 심한 짓도 하나요?”
“뭐 어때? 재밌잖아.”
리리엘은 총총 잰걸음으로 휘진의 소매를 꽉 붙잡은 채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탐정놀이를 하러 가는 길에 리리엘에게 동행을 요구하고, 로브 외에 모든 의복을 벗을 것을 요구했을 뿐이다.
확실히 정상적인 요구는 아니다만 재밌지 않은가?
새침한 성격의 리리엘이 이쪽의 옷을 꽉 붙잡고 달라붙을 정도로 불안해하고 있다.
로브를 푹 눌러쓰고 주홍색의 앞머리로 최대한 눈을 가린 채, 간신히 허벅지 중간까지만 내려오는 로브자락을 자꾸 아래로 당기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다.
“그야 말로 하의실종. 패션계의 선구자로 만들어준 것뿐이야.”
“당신도 동참한다면 인정하죠.”
“내가 왜?”
“이이이익!!!”
이죽거리는 휘진의 놀림에 리리엘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분해했지만 어차피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데다가 제 쪽이 아쉬운 입장이었기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둘이 처음 만났던 골목에 들어서자 리리엘은 그나마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쪽은 인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휘진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도 죽도록 싫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여진다면 끔찍하다. 키스엘 후작가의 영애가 노출증이라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는 날엔 정말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할 자신이 있었다.
골목으로부터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영감의 집 앞.
휘진은 리리엘을 앞세웠다.
“들어가 봐. 충분히 주의하고 대비해서.”
“에? 제가 먼저 가는 건가요?”
“바보냐? 위험하잖아.”
“그럼 당신이 먼저…!! 에효… 알겠어요.”
당연하지만 화가 영감이 죽었을 가능성도 휘진은 충분히 염두에 두고 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참고인이 아무런 대비도 받지 못한 채 긴 시간동안 혼자 있었다면 입막음을 위해서라도 제거되었을 수 있다.
더욱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 자신을 죽여 입막음을 할 것까지 계산을 해 두었다면 매복을 하는 최적의 포지션은 이곳이다.
휘진은 시간을 멈출 수 있지만 그것이 만능을 의미하진 않는다.
운동신경도 신체의 내구도 모두 일반인 그 자체인 휘진에게 불의의 공격이나 습격, 독살 같은 것은 방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리리엘을 동행해 휘진이 방어할 수 없는 ‘정면승부 외의 것’에 대비한 것이다.
“이 대지를 딛고 선 모든 존재를 첨병으로, 이 공간을 둘러싼 모든 마력을 나의 휘하에, 진리의 장막에 내 언령(言令)을 던지니 명령에 응하라.”
리리엘은 영창을 중얼거리고는 화가 할아범의 집으로 손을 뻗었다.
발 아래로 뻗었던 마법진이 마치 가지를 치듯 순식간에 집 전체를 둘러싸고 주홍빛의 마력을 지닌 룬 문자로 도배했다.
리리엘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는 것처럼 주홍색의 마력이 흘러넘친다.
일정량 이상의 마력을 사용하면 술자의 눈을 뚫고 마력의 반사광이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집 안 구석구석 지하 30M까지 확실히 뻗은 마력의 촉각(觸角)은 눈으로 보는 것 이상의 정보를 전달해준다.
휘진이 자신을 앞세웠다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
마력에 의해 작동하는 부비트랩이나 매복까지 생각을 하며 철저하게 몇 차례나 집안을 확인했다.
“사람이… 죽어있어요…”
리리엘의 촉각에 테이블 위에 엎어지듯 쓰러져 있는 노인이 걸렸다.
술을 마시다가 변을 당한 것인지 테이블에 엎어져 있고 등에는 심장까지 관통해 들어간 창상이 있다.
호흡, 심박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은데다가 이미 체온도 영하에 근접하고 있다.
얼굴은 눈에 익다.
정황이 없어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분명 휘진과 첫 대면 때 그가 위협하려 했던 노인이다.
“역시 그런가.”
“역시라니… 당신…”
“함정은 있어?”
“없어요.”
휘진은 숨을 한차례 들이 마시고 초라한 나무문을 비틀어 열어 들어갔다.
방안에서 풍겨오는 냄새는 처음 맡아보는 죽음의 냄새.
부엌과 침실이 일체형으로 되어있는 조그마한 방이다. 노인 특유의 냄새가 오랫동안 방치된 시체의 냄새와 섞여 썩 좋지는 않았다.
생애 처음 시체를 보는 것이지만 충격은 크지 않다.
훼손 상태가 적은 것이라 그럴까. 아니면 역시 판타지로 보이기 때문일까.
바닥에 말라붙은 피를 피해 노인에게 다가가 주머니를 뒤졌지만 자질구레한 것들 외에는 단서가 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 분은 왜 죽은 거죠?”
“알짱거리지 말고 누가 죽였는지 알만한 단서 같은 거라도 찾아봐.”
그렇지 않아도 리리엘은 이미 방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다.
물리적인 게 아니라 마법적인 방면으로.
하지만 그 흔한 발자국이나 방어흔 같은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곳곳에 찍힌 지문이 있기는 하지만 이 집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의 것 외에는 어느 것도 나오지 않는다.
“피해요!!!”
노트나 이런 것들을 주워들던 도중 갑자기 들려온 리리엘의 목소리에 휘진은 시간을 멈추고 그대로 리리엘을 들쳐 메고 집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해서 벽난로 옆에 세워져 있던 부지깽이도 덤으로 획득했다.
그리고 시간정지 해체.
마치 거인이 발로로 찍어 누르기라도 한 듯이 허름한 목조건물이 단숨에 우지끈 소리와 함께 으깨진다.
“뭐야?”
“공격이에요.”
갑자기 이동을 했음에도 리리엘은 침착하게 답했다.
오호, 역시나 매복을 하고 있었던 건가?
역시 혼자 왔더라면 위험할 뻔 했다.
메케하게 번지는 흙먼지 사이로 흘깃흘깃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내가 암살자요, 라고 말하는 듯한 흑색일색의 복장이다.
전대물 졸개들이 입을 것 같은 옷을 입고 좁은 골목 구석구석, 심지어 거미처럼 벽에 붙어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포위라고 해야 하나.
보통 사람에게 둘러싸였다고 하면 앞 뒤 옆 정도이지만 저 치들은 이런 짓엔 이골이 난 놈들인지 2층 3층, 옥상과 벽면까지 말하자면 Z축까지 커버중이다.
숫자는 대충 10명.
리리엘이 상대할 수 있을까?
“불철주야 좆뺑이 까느라 고생들 많으쇼. 어디서 왔수?”
“….”
당연하지만 대답은 없다.
저런 놈들은 죽기 직전에도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아 적의 사기를 꺾는다고 무협지에서 들은 바 있다.
“리리엘 준비해.”
“예? 제가 싸워요?”
“로브도 벗고 싸우려면 맡아줄게.”
“그건 싫으니까. 엄호나 해주세요.”
리리엘은 순식간에 집으로 뻗어 있던 마법식을 거둬들이고 자신의 발밑에 전개했다.
연금술이 대체로 전투에 적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리리엘 정도의 실력을 가진 대마법사는 어지간한 기사와 맞붙어도 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리리엘의 주특기는 동조(同調)의 식을 이용한 공간의 장악이다.
연금술의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하며 간과하기 쉽지만 동조야말로 연금술의 처음이자 마지막.
얼마나 빠르고 면밀하게 동조의 식을 펼쳐내는가가 술자로서의 강함을 증명한다.
하지만 그 전까지 빈틈만으로도 암살자에겐 큰 먹잇감이리라.
그럼에도 리리엘이 고민하지 않고 동조의 식을 전개하는 것은 휘진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함을 가진 남자.
자신이 아는 그 누구를 가져다 붙여도 가뿐하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남자가 지켜준다면 15초 정도의 준비 시간은 문제없으리라.
◈ ◈ ◈
너무나도 안일했다고 생각했다.
명령을 받고 잠복하기를 나흘.
나타난 것은 애초에 기다리고 있던 남자와 동행인 여자.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있어서 제대로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꽤나 실력이 되는 연금술사가 분명하다.
최초의 일격으로 분쇄해 죽일 생각이었건만 어느 틈엔가 탈출한 목표는 무려 암살자의 눈앞에서 대규모의 마법진을 전개하려 하고 있다.
개인차는 있지만 대형 마법진이 완벽하게 전개되기 까지 걸리는 시간은 30초에서 1분.
암살자 앞에선 있으나 마나한 수호장을 전개하고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아무리 눈앞 남자를 믿고 있다 한들 이쪽은 10명.
손바닥하나로 빗줄기를 전부 막을 순 없다.
아무리 완벽히 방어하려해도 대거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닿는다.
눈짓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부하가 곧장 튀어나간다.
어두운 골목과 섞여 제대로 보이지 않은 코스튬. 벽을 밟고 달리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남자를 향해 쇄도한다.
고도로 훈련받은 암살대원들에겐 포위를 한 이후 목표에게 공격을 가하는 정해진 수순이 있다.
지금이 제 1격.
이 공격은 눈속임이다.
실제로는 매우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고 있지만 스쳐지나가는 정도의 무게중심이 실리지 않은 공격이다.
이후 상대의 자세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면 포위하고 있는 나머지 대원들로부터 5개의 나이프가 날아가게 된다.
설령 공격을 방어한다고 해도 정확히 그 빈틈을 파고들어 멀리서 공격을 가한 뒤 또 다시 자세가 무너진 상대에게 4명이 일제히 달려드는 식이다.
개인 개인이 특출나게 강하지는 않지만 마치 뱀이 먹이를 조여 죽이듯이 천천히 상대의 행동반경을 줄여나가고, 끝내는 그 독니를 목덜미에 꽂아 넣는 철저하게 ‘대 기사전’을 상정한 조직적인 움직임.
“엇차!!!”
옷이 펄럭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 나가던 남자는 휘진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순간 달려 나가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그리고 이후에 던져진 5개의 단도역시 새된 소리와 함께 불똥을 튀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흙바닥을 몇 번이나 굴러 엎어진 남자의 복면에서 붉은 색의 피가 얼어붙은 땅을 적셨다.
정적.
지금까지 몇 번이나 강한 적을 상대하고 동료를 잃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 일격과 이격이 이토록 허무하게 막혀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다. 각자 단검을 던진 5명의 부하 중 4명은 이미 남자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상정외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수많은 훈련과 실전이 몸을 먼저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멈춰…!!!”
목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것도 잊고 외친 다급한 목소리는 아까와 같이 허무하게 바닥을 나뒹구는 4명의 옷자락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명백히 이상하다.
방금의 움직임은 확실히 확인했다.
완전 정지 상태에서 전조가 전혀 없는 급가속과 감속.
마치 요괴에게 홀린 느낌이다.
누구나 구애받고 살아가는 물리법칙 속에서 저 남자만이 예외라는 듯이 유유히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구사한다.
철수해야 한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울렸다.
그러나,
“마법진 기동(起動)-거울나라.”
어두컴컴한 골목을 환하게 비추는 주황색의 마력광과 함께 리리엘의 영창이 입김과 함께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