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음모(2)
“펠릭스는 소아 성애자야, 거기에 지독한 새디스트지. 수많은 영지의 평민 여자아이들을 잡아와 성폭행하는 과정에서 목을 졸라 살해했어. 고작 본인의 쾌락을 위해서 말이야.
펠릭스를 정치적인 이유로 죽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렇다면 다른 관점에서 보는 거야. 당장 귀족이 아니었더라면 모두에게 비난받고 처형장에 끌려가야 했을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 권세 있는 귀족 가주라는 이유 하나로 주변 모두를 유린하고도 떳떳하게 살아가는 꼴이 역겨워서 죽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되는 거야.”
유혹하는 뱀과 같이 달콤한 타타라의 말들이 대공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녀가 제시하는 것은 형편 좋은 도피처였다.
악인의 방법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정의의 편에 서서 악인을 제거한 것으로 생각해버리자는.
“지금 위로해주려는 건가?”
“흐음, 이쯤 되면 슬슬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뻔하지,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거기에 내가 화를 내면 어떻게든 흐지부지 내 죄책감을 덜려했을 테니까.”
“거기까지 간파해 버리다니. 정말 많이 컸구나?”
후우하고 한숨을 쉰 대공은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켜 세워 부끄러워하는 척하는 타타라의 머리를 통 하고 내리쳤다.
“손해만 보는 바보 연기를 잘도 하려 드는군.”
“인간은 모두 겁쟁이라는 건 진심이야, 그 누구도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다는 것도. 다만…”
쩝하고 입술을 핥은 타타라는 마음에 드는 디저트를 봤을 때와 같은, 하트가 새겨진 눈동자로 나머지 말을 이었다.
“당신을 뺀다면.”
그것이 아신인 타타라가 일개 구도자(求道者)에 불과한 베아트레아 아슌푸틀을 지켜보는 이유였다.
◈ ◈ ◈
얼마간이나 잠을 잔걸까?
일어났을 때 느껴지는 뻐근함만으로 따지자면 족히 1년은 냉동수면 비슷한 걸 하다가 깬 느낌이다.
왜냐면 일으킬 때 허리가 부러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걸.
“앗! 주인님 일어나신건가요?”
일어나자마자 들리는 것은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조용하지만 뚜렷한 목소리.
트레이 위 항아리에 물수건을 빨고 있는 슈슈가 보인다.
“무…물 줘.”
“앗! 여…여기.”
엄청나게 찾아오는 갈증 탓에 휘진은 슈슈가 건넨 물을 받아 마셨다.
턱까지 질질 흘리면서 벌컥벌컥 들이킨 물을 슈슈가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닦는다.
그러고 보니 슈슈는 감기가 나아 직장으로 복귀한 모양이다. 업무복귀를 환영하고도 싶지만 그보다 급한 일이 생각난 휘진은 급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금방 쿠당탕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조심하세요! 3일 동안이나 주무셔서 아직 몸이…”
“뭐? 3일이나 잤다고?”
휘진은 아연해진 표정을 짓고는 슈슈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스의 흐릿한 얼굴.
대공과 펠릭스 사이에 깽판치자는 결심을 하고 나서려는 자신을 막아섰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친구의 추천으로 퇴직금까지 미리 당겨 올인 한 주식이 하루아침에 휴지조각이 된 이후 애들 데리고 친정으로 간 아내로부터 날아온 이혼장을 바라보는 가장의 표정으로 주저앉아있는 휘진을 보며 슈슈는 안절부절 했다.
“걱정하지마세요. 당신 여자 친구로부터 전언이에요. ‘미안해요, 대공저하와 펠릭스의 약혼은 취소되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베아트레아 대공저하로 부터의 전언입니다. ‘깨어났을 때쯤 나는 자고 있을 테니 나중에 얘기하자구나’라고.”
그때였다. 여태 어디에 있던 것인지, 보드라워 보이는 토끼귀를 쫑긋거리며 리리엘이 사뿐사뿐 걸어왔다.
마지막에 봤을 땐 여행복에 로브라는 편의성만을 신경 쓴 복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서 난 건지 모를 발랄한 당근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어설픈 성대모사까지 곁들어진 전언이라니 뭔가 귀엽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죠?”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여.”
머리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어벙한 표정을 짓는 휘진을 바라보며 리리엘은 더욱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 아신 타타타 타타라씨로부터의 마지막 전언입니다. ‘고맙지? 보상은 밤에 받을게’.”
휘진이 누워있는 동안 무려 4명에 달하는 여자가 다녀갔다.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이 여자친구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그저 동료였던 아리스.
그 이후 아리스의 당부대로 휘진을 간호(그냥 멀뚱멀뚱 지켜보다가 옆의 소파에서 잔)한 다음날 아침 찾아온 슈슈라는 전속 메이드.
그 오후에는 슈펜하우져 성의 성주이자 북해 동맹의 수장인 베아트레아 대공이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어제 저녁 쯤 휘진의 방을 들른 것은, 무려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 했던 ‘삼계를 가로지르는 푸른 강의 마녀’ 타타타 타타라.
방문했던 타타라는 손수 휘진의 몸 상태를 체크해 주더니 리리엘을 보며 묘한 눈웃음을 흘기고 ‘귀여운 아이네’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갔다.
분명 그녀를 만나기 위해 북해까지 머나먼 여정을 한 리리엘이었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만난 아신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어야 했다.
마법에 대해서 아무런 소양이 없는 휘진은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꽤나 높은 경지에 이른 리리엘으로선 아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아신의 힘, 특히 마력은 안으로 응축되어 거의 밖으로 표시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깊은 바다만큼이나 농도가 짙은 마력의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리리엘은 어째서 아신이 숭배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인지 단번에 이해해 버렸다.
그런 아신이 병문안과 검진까지 해주다니…
그저 파렴치하고 힘만 강한 강간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 가면 갈수록 대단한 쓰레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정말 그저 나쁘기만 한 사람일까?
전속 메이드라는 슈슈가 휘진을 간호할 때 짓던 애틋한 표정은 그저 악인일 뿐이라면 받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워낙 정성스럽게 수발을 드는 터라, 메이드에게 차마 휘진의 실체와 정체에 대해 물을 수 없어서 지켜보고만 있을 정도이다.
리리엘은 용기를 내어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 궁금증을 해결하기로 했다.
“아신 타타타 타타라 씨와는 어떤 관계인거죠?”
“섹스파트너.”
거기서 나온 두 여자의 반응은 깜짝 놀랄만한 것이었다.
“네?”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저 평범하게 놀란 슈슈와는 다르게 리리엘은 거의 경기를 일으키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다…당신 같은 사람이 뭐라고 그 위대한 아신 타타타 타타라 님이…”
“뭐가 그렇게 놀라워? 남녀 사이에 썸씽이 있을 수도 있는 거지.”
“아신과 인간의 관계를 평범하게 남녀 사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당신이 더 놀랍네요.”
이 사람 심지어 연인 관계도 아니라 섹스 파트너라고 했다.
사실 정확히 그게 어떤 관계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말로만 들어도 불경함이 하늘을 찌르는 발언 같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 자신이 가장 싫어하게 된 인물과 이렇고저런 관계라니…
좋아하던 아이돌이 매니저와 질펀한 섹스를 즐기고 호텔에서 나오는 사진을 본 팬클럽 회장의 느낌을 경험하고 있다.
“특히 뒤치기 자세를 좋아해 너처럼.”
엄밀히 말하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선 한 번밖에, 그것도 뒷구멍으로 밖에 해 본적이 없지만 뭔가 짓궂은 표현을 하고 싶어서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인데도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슈슈의 눈치를 보는 리리엘.
‘제…제정신인가요?’
‘뭐 어때, 슈슈도 알건 다 알고 있다고. 너처럼 내 전용이니까.’
귀를 당겨서 소곤소곤 말하는 탓에 강제로 몸이 기울어진 휘진이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리리엘은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되어버렸다.
휘진이 슈슈를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강압적으로 몸을 뺏고 억압하는 관계라면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으며 밤낮으로 간호할 수 있을까?
어리둥절하며 두 사람의 귓속말을 지켜보는 슈슈는 여느 때처럼 천진할 얼굴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 전용이라니 저는 그런 약속…’
‘날 위해서 19년 동안 준비된 오나…우웁…!’
‘쉿! 쉿! 쉿! 그런 거 몰라요!!!’
등짝을 팡팡 때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휘젓는 리리엘이 귀여워서 공개 수치는 봐주기로 했다.
“그보다 왜 안 도망갔어? 아직까지 여기에 남아 있을 줄은 예상도 못했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도망치고 싶었다구요. 하지만 당신이 도망치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서…”
물론 그런 마음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도망치지 않은 이유는 어떻게든 타타타 타타라와 말을 붙일 구실을 얻기 위해서다.
리리엘의 가문은 연금술로 유명한 마도명가 키스엘 후작가.
외부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문의 내부인인 데다가 차기 가주인 리리엘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피할 수 없는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개선이 되지 않는 가문의 연금술, 급부상하는 마공학(魔工學)에 의해 뒤처지기만 하는 상황.
게다가 가문의 경영문제까지 겹쳐 내외로 삐걱거리는 상태이다.
키스엘 가문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순수한 술자의 힘이 아닌 기계장치의 힘을 빌리는 것을 연금술의 수치로 여긴다.
이대로라면 남은 것은 과거의 영광뿐인 쭉정이 가문이 되어버리고 말리라.
그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차기 가주인 리리엘 자신이 위대한 성취를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리리엘의 북해행은 비단 본인의 욕심만이 아니라 가문의 미래를 걱정하는 차기 가주로서의 책임감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타타타 타타라는 지금껏 제자를 단 한 번도 들인 적 없기로 유명하다.
뿐만이 아니라 한 번 거절한 이후 계속 귀찮게 하는 마법사들에게는 분노의 철퇴를 내려친 일화가 여러 번.
리리엘은 그나마 타타라와 가까워 보이는 휘진에게 부탁을 하려 했던 것이다.
“저기…그…혹시 있잖아요…”
“편하게 말해, 어차피 들어줄 부탁이면 들어줄 거고 안 들어줄 부탁이면 어떻게 포장해도 거절할거니까.”
“후우… 타타라 님께 제자로 소개가 가능할까요?”
“뭐? 새로운 자살법이야? 그러지마 나이도 어린데.”
휘진은 눈치가 빠르다.
자신을 피하는 것이 당연한 리리엘이 3일간이나 그것도 방에서 어슬렁거리면서 기다린 데에는 뭔가 분명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휘진의 기억 속 그녀의 마지막 모습에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그를 향해 쏘아대는 빈정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가 아쉽고 어딘가 어려운 듯한 태도의 리리엘이다.
어색하게 귀를 만지는 모습이라던가, 애꿎은 땅바닥을 발끝으로 툭툭차는 모습은 부탁하기 애매한 상대에게 부탁을 하기 전 고민하는 모습 그 자체다.
“어떤 교육이든 감당할 자신이 있어요! 제발 한 번만 말이라도 꺼내주세요.”
휘진의 만류를 착각이라도 한 것인지 열심히 하겠다는 말 같은걸 한다.
“그래? 그럼 넌 뭘 해줄 건데?”
어차피 부탁해도 타타라가 들어줄지 말지는 미지수다. 그래도 특별한 관계인 휘진의 부탁이니 아마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단은 상대를 빨아 먹는 것이 정석.
휘진의 말에 리리엘은 준비해 두었던 말을 꺼냈다.
“당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를게요.”
“쿠히히히!!!”
“무…무서운 웃음 짓지 마세요!!! 제가 이 말을 하려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아요?”
싱글벙글 웃던 휘진은 흔쾌히 그녀의 제안에 응했다.
어차피 그간의 떡정도 있고 어느 정도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나쁘지 않은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좋아! 대신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없으니 당분간은 내 명령에 복종하는 걸 보고 결정해주지. 어차피 너는 나한테 빚이 있는 몸이야. 이번 부탁이 아니더라도 내 소유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고.”
“쳇… 쪼잔하긴…”
궁시렁거리는 리리엘을 사뿐히 무시한 채 휘진은 나갈 채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