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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44화 (44/154)

44화 무도회(3)

평소처럼 평정을 가장하는 아리스에게 휘진이 묻자 아리스는 크게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경박하고 생각 없어 보이는 자이지만 가끔 이런 식으로 놓여있는 상황을 조합해 파악해 질문을 한다.

“그렇습니다만, 제 사심이 녹아 있는 것도 부정할 순 없군요.”

“걱정하지 마, 당장 대공님을 떠나갈 생각도 없고. 특별히 돌발 행동을 할 예정도 없으니까.”

“…놀랍군요. 다시 봤습니다.”

이 시점에서 대공이 자신에게 아리스를 보내온 연유라면 뻔하다.

대공님과 함께 대작을 하면서 무수히 많은 구애 요청을 선보인 이상, 휘진이 대공에게 호감을 품고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대공도 익히 알 것이다.

말하자면 휘진은 앞에서는 친구이지만 언제든지 그 이상의 자리를 넘보려 드는 남사친이다.

그런 휘진을 약혼자 앞이라고 매몰차게 쫓아냈으니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다.

애초 휘진과 대공의 관계는 애매하다.

봉건제의 세계관에 식객이라는 특이한 관계.

마음에 안 들면 튀어버리면 그만인 휘진의 프리한 포지션 또한 관계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대공께서 굉장히 미안해하고 계십니다.”

“펠릭스 그 놈팽이랑은 무슨 관계인거야?”

“대공님이 처음 북해에 당도하셨을 당시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트리니다드 가문의 원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펠릭스와의 거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칭조차 생략한 채 말하는 것을 보니 아리스 또한 놈에게 좋은 감정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게 정략결혼이라는 건가?”

“정확히는 약혼이죠. 대공을 보고 첫눈에 반한 펠릭스에게 3년 뒤에 결혼하자는 약속을 하고 이를 비밀로 했으니까요.”

“물릴 수는 없어?”

“과연 가만히 있을 까요? 안 그래도 트리니다드 가문은 중앙과 친분이 적지 않습니다. 북해 동맹을 탈퇴하고 그 쪽으로 붙어도 아무런 손해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득이죠. 트리니다드 가문이 아직 명목으로나마 대공을 지지하는 것은 순전히 대공과의 약혼 때문이니까요.”

아리스는 머리가 아픈 듯 온 더 락으로 따라 놓은 금빛의 술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촛불에 비친 금발이 반짝거리고 에메랄드의 눈동자가 애수에 젖어든다.

“원래는 이곳에서 대공님과 함께 술을 마시던 일이 많았는데 말이죠. 최근에 들어서 이런 저런 일로 바쁘신 데다 이제 곧 결혼이라니… 이런 게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일까요.”

“망쳐버리면 안 되는 건가? 펠릭스를 죽인다던가.”

“이 시점에서 펠릭스가 죽어버린 다면 트리니다드 가문을 더 이상 붙잡아 둘 명목이 사라집니다. 안 그래도 펠릭스의 고집으로 북해 동맹 측에 붙어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는 가신들이 많으니까요.”

사실 대공의 정치적인 입지까지 휘진이 생각해 줘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면, 설령 자신의 옆에 없어도 좋다는 둥 헛소리엔 동의할 수 없다.

사랑은 결국 이기적인 것이다.

마음까지 소모해 돌아오는 것이 자기만족 밖에 없다면 그 누가 사랑에 죽고 살겠는가?

“휘진 경은 대공님을 사모하시는 거죠?”

“그렇지, 뭐.”

“어째서인가요?”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마음의 결심이 섰다.

자신의 능력을 십분 활용해 대공을 위해 헌신한다.

트리니다드 가문과 문제가 생겨 대공이 곤란에 처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그 이상의 활약을 하면 된다.

모든 힘과 능력을 사용해 대공을 돕고 만약 그렇게 해도 안 된다면 그때 가서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면 될 일이다.

오늘은 살인마저 불사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술잔에 술을 모두 털어 놓은 휘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시는 건가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아리스는 휘진을 올려다보았다.

“약혼자 새끼 조지러. 미안해 아리스 나 역시 복잡한 건 생각 못 해. 만약 나 때문에 일이 그르치게 된다면 그 이상으로 보상할게.”

“정말… 대공님의 예상대로군요.”

아리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휘저었다.

그때 갑자기 들이킨 술이 화근이 된 것인지 휘진의 시야가 핑하고 돌았다.

“저야 말로 죄송합니다, 휘진 경. 저도… 이러고 싶진 않았어요.”

흔들거리는 시야.

마치 망막 앞으로 얕은 개울이 흐르는 것처럼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고 어지러움이 몰려온다.

“너…너…”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휘진을 조용히 받아 안으며 아리스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다시 일어나셨을 때는 연회가 끝나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부디 푹 쉬시길.”

그 말을 끝으로 휘진의 의식은 암전(暗轉)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왜 또 이렇게 빨리 오는 거죠?”

“?”

또 방치되어 심심해하던 리리엘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앞에 보이는 것은 초면의 여자.

금발에 에메랄드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다.

순간 리리엘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이 남자의 연인 인 것인가? 대롱대롱 휘진을 매달고 방을 찾은 모습은 그렇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둘 다 술 냄새도 풀풀 나고 말이다.

그 말인 즉 지금 저 여자에게 자신이 침대에 누워있는 불륜상대로 보인다는 것이다.

좋지 않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나는 리리엘에게 아리스는 묘한 시선을 보냈다.

“죄송하지만 신분을 밝혀주시겠습니까?”

당장 허리춤에 검은 없지만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들 흉흉한 분위기다.

적어도 리리엘은 그렇게 느꼈다.

“저기… 그… 저는 키스엘가의 장녀 리리엘이라고 하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극 공손체로 말한 리리엘.

“휘진 경과는 어떤 관계이시죠?”

그건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이다. 엄청 신경 쓰이기도 하고.

하지만 저 여자가 휘진과 어떤 관계라도 한들 휘진의 사회적 목숨을 박살낼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리리엘은 가지고 있다.

강간마이자 귀축 변태인 휘진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

과장이나 조작이 없어도 오늘 있던 일을 전부 전하는 것만으로 휘진을 엿 먹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 그냥 평범하게 오늘처음 만났어요. 네…뭐…”

“…그렇습니까.”

어째서 휘진을 감싸준 것일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한 리리엘은 휘진의 간호를 부탁받고 여자를 배웅했다.

“이… 민폐만 잔뜩 끼치는 파렴치한…”

분명 눈빛이 안 좋았다.

확실히 적의를 품은 눈동자였다.

울고 싶은 마음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리리엘은 침대에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있는 휘진의 뒷담화를 계속했다.

◈          ◈          ◈

베아트레아 대공은 자신의 방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첫날의 연회가 파한 뒤 화장을 지우고 머릿수건으로 머리를 꽁꽁 싸맨 채로 거품이 잔뜩 일어난 욕조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와인의 취기로 밀어내는 것.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알코올의 힘을 빌려 버텨 냈던가.

한때 한 잔만으로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시절은 이미 기억조차나지 않는 과거이다.

“바티스텡 거기 있겠지?”

“예, 대공저하.”

목을 넘어가는 루비 빛의 포도주는 코 안을 잔뜩 향긋하게 메운다.

바티스텡은 여느 때와 같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공에게 답했다.

“그대가 나였더라면 어떤 선택을 했겠는가?”

“저는 방관자. 저의 어떤 대답도 대공께서 원하는 답은 아닐 테지요.”

“과연. 너무 이기적인 질문을 해 버렸군.”

만약 바티스텡이 여기서 대공을 위로하려 들었더라도 그 심중을 헤아린 대공에겐 진심으로 위로가 될 수 없을 것이고, 반대로 대공의 잘못된 선택을 지적한들 이미 이 정도로 벌인 일, 되돌릴 방법은 이미 없다.

결국 듣고 싶은 대답만을 요구한 뻔뻔한 물음일 수밖에 없다.

“이제부턴 그대와도 작별이겠군. 지난 5년간 수고 많았네. 뭔가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주겠나?”

“아직 작별인사는 이릅니다. 어떤 형태로든 대공과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요.”

“이제 이렇게 느긋하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없지 않나. 괜찮으니 지금 말해두게.”

이제 곧 바티스텡이라는 인격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위에 덧씌워지듯 전혀 다른 모습과 사고방식을 갖는 바티스텡이 태어나게 된다.

대공을 향한 충성과 맹신은 그대로인 채이겠지만.

“저는 삶의 의미와 목표를 대공께 부여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대의 앞에 펼쳐진 길이 그 어떤 더러운 죄악의 길일지라도 당신의 신발과 지팡이가 되어 앞길에 함께할 수 있기를.”

대공의 욕실로 들어온 바티스텡은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충신의 예를 올렸다.

그 한 점의 흐림 없는 올곧은 충애(忠愛)는 번민으로 뒤척거리던 대공의 머릿속에 각오를 다잡아 주었다.

“고맙네. 나도 그대와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웠네.”

“이번 소풍도 즐거웠군요.”

바티스텡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대공의 입가에 애달픈 미소가 서렸다.

◈          ◈          ◈

달빛이 서린 성내의 복도.

회랑을 돌고 돌아 도착한 장소엔 차가운 달빛을 걷어내려는 듯 촛불의 행렬이 이어진다.

신성한 성지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만은 아니리라.

실제 펠릭스가 따라 걷는 이 길은 그가 바라마지 않던 신성한 초야(初夜)를 인도하는 표지판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흰 양복을 입고 한 손엔 장미꽃다발까지 든 펠릭스는 설레는 발걸음으로 서리가 찬 창문에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처음 대공을 만났을 때 그 모습이 얼마나 마음을 떨게 했던가?

그 이전의 펠릭스는 13살 사교계에 데뷔한 이후로 중앙까지 오가며 수많은 여자와 교류하고 살을 섞을 정도로 깊은 관계가 된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 청초한 자태.

전설 속의 얼음수정의 여신이 강림한 듯한 모습.

여자마저 홀리려는 듯 요요(妖妖)하게 빛나던 하늘색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숨을 멎었던 기억을 아직까지 잊지 못한다.

이제 막 소녀의 모습을 탈피하고 만개하려는 꽃 봉우리를 연상시키는, 베아트레아의 매력에 펠릭스는 빠져버렸다.

사랑이 아니라도 좋다.

그 가련한 육체를 품고, 그 입술을 탐한다.

마음은 그 뒤이다.

어차피 여자란 동물은 몸을 내어준 이상 마음까지도 빼앗기게 되어있다는 것이 펠릭스의 지론이었다.

거대한 목제 문 앞에 선 펠릭스는 은빛의 열쇠를 문에 넣고 가볍게 돌렸다.

이 순간을 고대하며 긴장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이내 심장이 쿵쿵 뛴다.

“어서 오게.”

“이런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공께 어울리는 장미를 찾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무리 화단을 뒤적여도 그대의 영롱한 모습에 비견 될 꽃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

이곳이 베아트레아의 프라이버시 공간인가.

특별히 훌륭할 정도로 신경을 쓴 모습은 아니지만 대공의 취향이 곳곳에서 묻어나왔다.

은은한 빛을 풍기는 촛불들과 네 사람은 뒹굴 수 있을 것 같은 침대는 검은 색의 천개가 몇 겹이나 드리워 있다.

향까지 피운 것인지 방 전체에서 향긋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비록 특별한 구색이 없는 방일지라도 대공이라는 존재만으로 이 공간의 분위기가 바뀌는 듯하다.

“허나 어인일로 저를 이 야심한 밤에 찾은 것인지. 저 펠릭스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두 팔을 벌려 너스레를 떠는 펠릭스의 앞에 검은 천개가 걷히더니 베아트레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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