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무도회(2)
밤하늘을 보며 아득한 표정을 연출하던 펠릭스는 과장스럽게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정리하더니 느끼한 표정으로 샴페인 잔을 들어보였다.
진짜 죽여 버리고 싶네.
일단 잘생겼다. 게다가 삐까번쩍한 것이 귀족임이 틀림없으니 그냥 알아서 죽어줬으면….
자기보다 잘나가는 남자를 보면 모두 죽었으면 하고 기도하던 버릇이 또 도졌다. 어쨌든 살생부 1순위에 올려놓을 자신이 있을 정도로 재수 없는 녀석이다.
“대공께선 연회에 지치실 때 쯤 항상 창가의 테라스를 찾으셨죠, 저 펠릭스가 대공저하의 산뜻한 바람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여기까지 들게 된 휘진은 과연 자신이 저 사람을 죽여도 괜찮은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일 이 세계에서 살인이 신상에 별로 지장이 없다면 죽여 두는 편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그보다 자네는 어디론가 사라져있겠나? 지금은 약혼자끼리의 오붓한 밀회가 있을 예정이니 말이네. 신사라면 눈치정도는 살필 줄 알아야지. 쯧.”
펠릭스는 마치 벌레를 보는 표정으로 깔보며 말했다.
휘진이라는 작자는 처음 보는 인물인데다가 피부와 머리카락, 눈의 색깔로 미루어 보았을 때 대륙 동부 제도(諸島) 출신일 확률이 높았다.
설령 제도의 귀족이라 한들, 이곳 북해에선 자신이 직위로 찍어 누를 자신이 있던 것이다.
한편 휘진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약혼자라니… 그런 말은 없지 않았는가? 아니 그보다 저런 새끼가 약혼자라고? 소중한 베아트레아 대공의?
“뭔 개소리하고 자빠졌냐, 모친출타 한 새끼야.”
“휘진 경…!!!”
생각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분노는 즉각 쌍욕으로 변해 날아갔고 휘진의 지나치게 흥분한 모습을 본 대공이 황급히 그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휘진에게 대공은 엄격한 눈동자로 쏘아붙였다.
“휘진 경, 펠릭스 경에게 제대로 사과하도록 하게. 아무리 이 몸이 그대의 응석을 받아주었다 한들 지금의 발언은 도를 넘었네.”
“하…하지만 저 새끼가 대공님 보고… 약혼자라고…”
“사실이네.”
이게 뭔 88년도 드라마 같은 전개인가.
요즘에도 시대착오적으로 감추어져있던 약혼자가 등장하는 어설픈 전개 드라마가 가끔 있다. 그런 걸 볼 때면 휘진은 혀를 쯧쯧 차며 욕 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 본인의 일로 닥치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다.
어딘가 허망하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려는 휘진의 말을 대공은 단칼에 잘라버렸다.
“미안하네, 펠릭스. 이자가 아직 내 아래에서 일한지 오래되지 않아 실수를 범한 모양이군. 내 가신의 무례는 대신 사과하지. 휘진 경 그대는 근신하고 있게. 곧 찾아가 이번 일에 책임을 물을 것이야.”
속히 퇴장을 요구받은 휘진은 터덜터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무례한 녀석이로군요.”
아무래도 찜찜한 듯 펠릭스는 얼굴을 찌푸리며 샴페인을 원샷 해 버린다.
“너무 기분나빠하진 말게나, 가끔 주제도 모르고 주인에게 마음을 품는 개가 있는 경우이니 말이네.”
“뭐, 대공저하처럼 아름다운 주군을 둔 수하로서 당연지사의 마음일수도 있겠습니다만…마음에 들진 않는군요.”
휘진에겐 미안하지만 이 남자는 반드시 사로잡아야하는 인물이다.
어떤 식으로든 트러블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대공은 장갑을 벗고 펠릭스에게 열쇠를 주었다.
“조금은 넓은 마음을 갖게, 그대도 오늘 그대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거지 않나?”
“하하하, 그렇다면 기꺼이 용서하도록 하겠습니다.”
“본성의 8층, 내 방으로 오는 길까지 초를 켜두겠네 2시가 넘으면 들어오게나.”
열쇠를 잡은 펠릭스는 주체할 수 없는 웃음에 입 꼬리를 씰룩이며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대공의 모습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실실 웃음을 흘렸다.
◈ ◈ ◈
연회석을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휘진은 하얗게 타서 재가 된 몰골이었다.
대공님의 약혼 선언은 그 정도의 쇼크다.
이곳이 판타지 세상이긴 해도 대공은 최고 권력자이니 정약 결혼따위에 엮여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것인가?
펠릭스라 했던가? 그 밥맛 떨어지는 놈과 대공님이 침대에서 뒹구는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다.
먼발치의 꽃을 바라보는 느낌만으로 행복을 느끼던 대공의 몸을 그 놈이 더듬는 것도 모자라 섹스까지 한다고?
“저…저기…”
목욕을 끝내고 막 나온 리리엘은 갑작스럽게 방문을 부술 듯이 들어와 혼자 중얼거리는 휘진은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일을 하고 올 터이니 방을 잘 지키고 있어라, 만약 다시 돌아왔을 때 없다면 어떻게든 찾아서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수치심을 느끼게 해주겠다던 휘진의 엄포에 별 수 없이 시간을 때우고 있기를 3시간.
밤에나 올 것이라 말했던 휘진이 갑작스럽게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무슨 일이죠?”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리리엘은 조심스러운 어투로 휘진에게 다가왔다.
리리엘의 입장으로서는 단순히 불안했을 뿐이다.
눈앞에 이 남자는 자신을 겁간하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을 뿐 아니라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향후의 입막음과 종속화까지 시도했다.
일단 자신에게 저항할 수단이 없고 이 남자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리리엘로서는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야 하는 상대이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으니 적당히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추는 것이 신상에 이로우리라.
“시끄러 말 걸지 마.”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사방으로 그 분노가 튀게 되는 법이다. 특히 자신보다 확실한 약자가 상대일 땐.
휘진은 치솟는 분노를 그대로 리리엘에게 쏘아 올리기 직전, 가까스로 스스로를 컨트롤 해 내었다.
이 토끼 아가씨에게 화풀이를 한다 한들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리라.
이 스트레스를 이 아가씨의 몸으로 해소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웃, 하지만 그런 표정 지으면서 아무것도 물어보지 말라니.”
“응?”
“당신 표정 굉장히 화나 있는 걸요. 무섭다구요.”
리리엘은 겁이 많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발끈하는 성격도, 겉으로 강해 보이려는 면모도, 호기심도 많은 복잡한 아가씨다.
그러기에 휘진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토라진 듯 투정을 부린다. 그리고 이내 가슴 앞으로 두 갈래로 내려 묶은 주홍색의 머리카락을 꼼지락 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당신 같은 사람은 최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정도는 말 해 줄 수 있지 않나요? 제가 도울 수도 있구요.”
“네년이 날 도와줄 수 있는 건 내 아래 깔려서 앙앙 거리는 정도니까 닥쳐주련? 아님 지금 당장 나한테 도움이 돼 볼래?”
“머…멋대로 남의 몸을 주무른 사람이 잘도 그렇게 말하네요.”
허, 하고 기가 차는 느낌이다. 아까까지 그렇게나 괴롭힘 당하고도 학습 능력이 없는 건지 아님 이미 체념을 해 버린 것인지.
설마 이상한 취향에 눈 뜨고 괴롭힘 당하고 싶어서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닐 테지?
“너 펠릭스라는 새끼에 대해서 알아?”
“펠릭스라면… 북해 남부의 트리니다드 펠릭스 후작 말인가요?”
“아마 그렇겠지.”
“저는 북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트리니다드의 젊은 가주라는 것 정도는 알아요. 일단 중앙과 분리된 북해의 여러 가문들 중에 가장 중앙과 교류과 활발한 곳이니까요.”
쉬운 설명을 위해 허공의 마법진으로 지도까지 보여주며 간단하게 설명해주는 리리엘.
대충 약식으로 표현을 해보자면.
…슈펜하우져 성(북해의 최전방)…
….(충분한 거리)…
…트리니다드 가문(북해의 최남방)….
…대륙중앙 정부(황실)….
라는 듯 싶다.
영지의 크기 같은 건 무시한, 정말 간단한 표현이긴 하지만…. 하여튼 트리니다드 가문은 중앙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중앙에게나 북해에게나 중요한 관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펠릭스 후작은 젊은 남자로 알고 있는데…. 대체,왜…?”
리리엘은 금빛으로 빛나던 마법진을 휙 하고 소실시키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휘진을 바라보았다.
“너 지금 내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저에겐 그 외에는 상정할 수조차 없는데요?”
신랄한 돌려 까기에 솔직히 조금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하지만 남색가로 오해받는 일은 피하고 싶었기에 리리엘의 엉덩이를 팡 때려주는 것으로 응징했다.
근데 어디까지 말해야하지?
당장 녀석을 암살하고 싶은 심정이다만 실제로 사람을 죽여 본 적도 없을뿐더러 시간을 멈춘다고 해서 진짜 죽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펠릭스 후작은 왜요? 연회에서 다투기라도 했나요?”
“그래 그 개새끼한테 쪽 당하고 쫓겨났다 속 시원하냐?”
“자세히 듣고 싶은 이야기네요.”
미쳤다고 이 토끼에게 상담을 하려들었나 싶다.
생각해보니 토끼로서는 휘진의 일이 잘 풀리는 것 보다 일이 꼬이는 편이 즐거울 것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뻔뻔하게 새초롬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자니 그래도 머리까지 차올랐던 열이 조금은 내려가는 듯 했다.
“토끼 아가씨.”
“제대로 미스 키스엘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미스 키스엘 일단은 고맙고, 이따 밤에 보자. 난 급하게 가 볼 데가 생겨서.”
“부디 대실패 기원할게요.”
베에 하고 혀를 내미는 리리엘을 뒤로 한 채 휘진은 타타라의 연구동으로 달려갔다.
◈ ◈ ◈
“휘진 경!!”
급하게 복도를 달려가고 있을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리스?”
뒤에서 휘진을 부른 것은 파티용 드레스를 입은 아리스였다.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었다. 연회에도 참가하지 않았었는데 어째서 저런 옷차림인 걸까?
“잠시 시간 괜찮겠습니까?”
“아…미안 지금은 좀 바뻐.”
“꼭 부탁드립니다.”
아리스는 꾸벅하고 가슴부분을 누른 채 고개를 숙여 부탁을 한다.
지금 당장 타타라에게 달려가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뭐 아리스가 저렇게까지 부탁을 한다면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아리스가 휘진과 함께 향한 곳은 성 안에 있는 바(Bar)이다.
고급 살롱의 분위기가 나는 바는 현대의 고급 바에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정도로 호화로웠다.
대화를 위해서인지 어둑한 분위기에 테이블에 놓여 있는 향초에서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올라온다.
“슈펜하우져 성의 고위 인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바입니다. 아무래도 북해인들은 술을 좋아하니까요. 저도, 대공님도 애용하죠. 온갖 미주를 무료로 마실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나랑 술이 그렇게 먹고 싶었어?”
아니나 다를까 아리스의 부탁은 자신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머리를 굴려보자 대충은 감이 올 듯도 하다.
딱히 아리스가 휘진에게 호감을 품거나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낌새가 있었으면 온갖 여자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휘진이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냉정히 말하자면 아리스가 품은 마음은 적당한 호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따라서, 이런 이벤트는 아무래도 갑작스럽다. 작위적인 냄새가 난다.
“대공님의 명령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