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토끼 요리(3)
“빨리 빨리 걸어와.”
“조…조금만 천천히 걸어주세요.”
거의 뛰다시피 성으로 향하는 휘진의 뒤를 리리엘은 잰걸음으로 쫓았다.
장시간 영하의 온도에서 알몸으로 있었던 데다가 (심지어 몸 위로 오줌을 싸지고 방치 당했다) 이리저리 맞은 곳이 욱신거려서 평소보다 더욱 체력이 달리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속옷도 전부 몰수당해 헐렁거리는 로브 아래로는 완전 알몸이다.
가뜩이나 걸음걸이에 신경을 쓰이는 와중에 하반신을 시리게 스쳐가는 바람이 무척이나 야속하게 느껴졌다.
회복마술을 사용하며 쫓아가지 않았다면 진즉 쓰러졌을 것이다.
휘진에게는 이 거추장스러운 토끼 아가씨를 적당한 곳에 버리고 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기엔 너무나도 훌륭한 여자이다.
강한척하는 주제에 사실은 심약하다는 설정에 마음껏 괴롭혀도 좋을 명분까지!
게다가 적당히 공포심도 심어 주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해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데리고 와버린 것이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건가요?”
숨 가쁘게 따라오는 리리엘은 무척이나 부끄러운 모양인지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 있었다.
그 후드를 살짝 들추더니 오렌지색의 아름다운 눈동자로 이쪽을 흘깃 올려본다.
“슈펜하우져 성이다. 이제부터 넌 내 노예가 될 예정이니까. 목숨을 노리려 했던 자객 주제에 불만은 없겠지?”
“그…그런 게 아니… 꺄악!!!”
리리엘이 말대꾸를 하려는 순간 휘진은 로브의 아랫자락을 아이스케키하듯 휙하고 들췄다.
아직 멍 자국이 남아있는 둥그런 리리엘의 엉덩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찹살떡 같이 만지기 좋은 생김새이다.
리리엘은 대로 한 가운데에서 하반신의 알몸이 드러난 충격에 옷자락을 잡고 주저앉았다.
이런 수치 겪어본 적 없다.
드러난 맨살이 온통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핀다.
“너…너무하지 않나요?”
“옷을 싹 다 벗기고 산책시키기 전에 서두르지? 아니면 자위로 처녀막을 박살내는 발정토끼답게 공개 섹스라도 하고 싶은 거야?”
“히익…”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토끼 아가씨를 상대로는 굉장히 찰지게 겁을 줄 수가 있다.
인간 상성이라는 것일까…
당장 알몸을 공개하고 싶진 않았는지 리리엘은 몸을 일으켜 쫄랑 쫄랑 휘진을 따라왔다.
며칠 지내지도 않았건만 휘진이 대공의 손님이라는 것은 이미 성내부의 대부분이 알고 있다.
슈펜하우져의 본성을 지키는 경비병 또한 휘진의 얼굴을 알고 별다른 신분조회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리리엘이라는 정체불명의 동행이 있어서인지 멈칫하는 반응이었다.
“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지만 내 지인이라 말이야. 어떻게 안 될까?”
“휘진 경, 저로서도 그냥 보내드리고 싶습니다만… 오늘은 정기연회의 일로 한층 엄중한 신분확인을 명령받았습니다.”
경비병은 난처한 표정으로 나와 리리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때 쭈그리로만 알고 있던 리리엘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 이름은 키스엘 리리엘 이바나. 키스엘 후작가의 장녀입니다. 연회에 초대받진 못했지만 베아트레아 대공께 인사를 드리고 싶군요.”
당당한 목소리와 태도에는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서려있다.
이런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아가씨가 지금은 전신 누드인 상태로 로브만 입고 있다는 걸 경비병은 상상이나 할까?
키스엘이란 말에 경비병의 얼굴 살짝 경탄의 기색이 피었다.
대륙 동부의 마도명가(魔道名家).
이름 뒤에 달 토끼의 후계임을 나타내는 ‘이바나’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은 본가에서도 정통 후계자임이 분명했다.
“키스엘 후작 영애셨군요. 실례지만 신분을 증명할만한 것을…”
“알겠습니다.”
리리엘은 습관적으로 로브자락을 들춰 가문의 증표를 보이려했으나…
“콜록 콜록…!!!”
“아… 맞아…,”
당황해버린 경비병의 사레들린 소리와 리리엘의 당혹성이 겹친다.
그렇다. 습관처럼 품 안의 증표를 보이려 했지만 지금은 옷을 전부 몰수당한 상태란 것을 잠시 잊었다. 로브의 자락을 젖히는 것으로 리리엘의 뽀얀 젖가슴이 경비병의 시야에 생생이 비춰진 것이다.
“아…아…아니… 지금 건!!”
당황해 패닉 상태인 리리엘의 머리를 두어 번 토닥이고는 휘진이 나섰다.
“뭐, 보시다시피 이런 관계라서 말이야. 소문이 퍼지는 건원하지 않으니 이걸로 괜찮을까?”
휘진은 로브의 후드 부분을 슬쩍 들춰 리리엘의 토끼 귀를 보여줌과 동시에 반짝 거리는 은화를 건넸다.
이런 걸 받으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며 극구 거부하는 경비병의 손에 은화를 꽉 쥐어주며 리리엘과 함께 성문을 통과해 회랑에 도착했다.
단 둘이 되었을 때 리리엘이 툴툴 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이런 관계라는 말인가요? 이제 아셨나 보지만 저는 키스엘 가문의 정식 후계자입니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무례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베아트레아 대공께 항의하겠습니다.”
울분에 찬 듯 울먹거리면서도, 아직 기저에 깔린 공포심에 머뭇머뭇 말하는 리리엘.
휘진은 갑자기 이게 뭔 말인가 싶었다.
그러니까 아까까지 휘진이 했던 짓들이 자신의 고귀한 정체를 모르기 때문에 벌인 만용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 자신에게 손대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일지도 모른다.
“음, 역시 죽여 버렸어야 했나.”
휘진의 한탄어린 한숨에 리리엘은 아차 싶었다.
비록 상대가 자신의 가문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곳이 주변인의 이목을 신경써야하는 성안이라 할지라도 달라질 사람이 아니다. 이 미친 사람은 뭔 짓을 할지 모른다.
어쩌면 생김새와는 다르게 사람을 죽이고도 묻고 지나갈 정도로 뒷배경이 있는 자일지도.
리리엘은 지식은 뛰어났어도 지혜는 부족했기에 마음을 조금이라도 방심해 버린 순간 생각을 앞질러 사고를 쳐버릴 때가 있다.
“내 말에 복종하겠다는 건 거짓말이었나? 토깽아…”
“그…그…그건…”
성큼성큼 다가서는 휘진 앞에 리리엘은 그야말로 뱀 앞에 토끼처럼 몸이 굳어 바들바들 떨었다.
이제 막 서서히 용기와 의지로 차오르려던 두 눈동자가 아까까지 그녀를 지배하던 공포라는 감정으로 뒤덮인다.
“벗어.”
“지금…제…제…말을 들으신 거 맞죠? 이건 명백히 귀족 모욕죄입니다.”
“벗어.”
“여…여기는 사람들이…볼 지도 모르고…”
“벗으라고 존만한 토깽이 년아.”
문답이 오갈 때마다 한걸음씩 가까워진 휘진에게서 뒷걸음질 친 리리엘이지만 그 뒤는 단단한 돌벽이다.
차마 눈을 마주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벌써부터 로브의 자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저렇게 심약한 주제에 어떻게 반항할 엄두를 냈던 건지… 휘진은 기가 찼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년쯤은 여기서 죽여 버린 다음 방부처리해서 오나홀로 써버릴 수도 있어. 쓰다 질릴 때쯤이면 성 안에 전시해 줄 테니 더 개겨 보던가.”
이젠 허세도 자유자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연기의 길로 나갔으면 남우주연상을 휩쓸었을 휘진의 광기 앞에서 리리엘은 한낱 철부지 여자아이에 불과했다.
휘진이 삐쭉 솟은 두 귀를 우격다짐으로 잡자 리리엘은 허겁지겁 로브를 벗어 던졌다.
사르륵하고 벗겨지는 로브.
새하얀 나신이 공공장소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젖꼭지 근처에 파르스름한 멍 자국이 남아있어, 조금 비정상 적일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리얼하게 색정을 풍겼다.
“버…벗었습니다…꺄아!!”
앙증맞은 꼬리가 달린 엉덩이를 찰지게 때리자 귀여운 비명을 지르는 리리엘.
포동포동한 엉덩이는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여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자, 그럼 산책 시작해 볼까?”
“저…저기 정말로 이렇게… 갈건가요?”
“응, 나한테 까불었잖아. 덤으로 만나는 남자마다 네 보지를 맛보게 해 줄 거야. 슈펜하우져 맛집으로 만들어 줄게.”
물론 여자를 공유하는 취미가 1도 없는 휘진으로서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이지만 새파랗게 질린 리리엘의 얼굴을 보자 역시 공갈은 치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가볼까?”
“히익…!!! 저…젖꼭지는… 쿠우우우…”
목줄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기온 때문인지 단단하게 발기한 리리엘의 유두를 잡고 이끌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원뿔형으로 늘어난 가슴이란 건 참을 수가 없다. 가학성을 자극한단 말야.
안 그래도 멍이 들어 잡는 것만으로 통증이 느껴지는 유두였지만 저항할 생각은 이미 저만치 날아간 뒤이다.
회랑에서 벗어나 휘진의 방이 있는 복도 쪽으로 나오자 리리엘이 비부를 숨기며 비척비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고 본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창밖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엿볼 도리는 없다. 그렇더라도 아직 해가 전부 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유두를 잡힌 채 알몸으로 성 내부를 산책한다는 것은 리리엘에게 전에 없던 수치심을 주는 행위였다.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주변의 조그마한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이 정말 사냥이라도 당하는 토끼 같다.
다음엔 눈까지 가려버리면 더 재밌겠다 생각하며 휘진은 아쉬운 대로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자 그럼. 아쉬운 대로 2차 씨받이를 시작해볼까?”
안도로 다리가 풀리려는 리리엘의 몸을 다시 경직시키는 것은 손가락을 질구 내부에 깊숙이 쑤시며 말하는 휘진의 흥분에 찬 목소리였다.
◈ ◈ ◈
웅장한 군악대 연주와 함께 위령제는 끝으로 접어들었다.
북해의 용사들을 해마다 기리는 행사다. 위령제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자들의 슬픔을 웃음과 즐거움으로 승화시키는데 의의를 둔다.
그런 분위기에서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는 위령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이다.
성지내의 군인은 물론 상인들도 시민들까지 모두가 손꼽으며 1년 내내 기다리는 가장 큰 축제가 바로 위령제.
북해는 전반적으로 날씨가 춥고 오락거리가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발달한 것이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술과 춤, 그리고 노래.
병사와 시민들에게는 볼거리와 오락거리, 그리고 음주가무를 즐길 수 있는 명목이 생기니 좋고 상인들에겐 잔뜩 물건을 팔 호재이다.
이제 준비된 순서는 모두가 기다리는 위령제의 꽃, 무녀의 춤이다.
원래는 유명한 무희가 무대에 오르는 것이 보통이지만 올해에는 특별히 베아트레아 대공의 춤사위를 볼 수 있다.
이런 특별이벤트이기 때문인지 성내 광장은 이미 평소보다 1.5배는 붐비고 있는데다가 돈에 여유가 있는 상인들은 공선까지 수배해 특별 좌석을 마련했다.
원래는 본성의 안으로는 허가받은 군함 외엔 출입이 금지되지만오늘 같은 날은 특별히 허용된다. 수상한 짓을 하려 든다면 광장을 감싸고 있는 군함들로부터의 일제포격에 벌집에 될 테지만 말이다.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당연히 뒷사람들은 무대를 제대로 볼 수 없다. 때문에 영상을 비추는 특수한 마법 렌즈로 2대의 공선 사이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에도 상영되게 하였다.
춤곡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술에 취해 시끌거리는 군중들이 소란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인간이란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서는 도리어 탄성조차 잊게 되는 법이다.
무대 뒤의 장막을 걷으며 나타난 이는 북해의 여왕, 북해의 얼음 꽃 등 온갖 아름다운 수식어를 전부 가져버린 베일에 쌓였던 베아트레아 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