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토끼 요리(2)
“푸흐흐흡!!!”
자는 사람 뺨을 때려 깨우게 된다면 이렇게 되는 건가.
아까 묶어 두었던 자칭 귀머거리 할아범은 수면향을 몇 십분 동안 들이켜서인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나도 2시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기에 초조해진 휘진은 리리엘에게 이 일을 맡기기로 했다. 역시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자고 있던 던 리리엘을 깨웠다.
“이봐, 저 할아범 좀 깨워봐.”
막 잠에서 깬 리리엘은 해롱해롱 거리는 상태에 자신의 온 몸이 오줌으로 덮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주문을 외우더니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씻고 나니 잠도 깨어버린 것인지 제법 또렷하게 영창을 외우며 화가의 잠을 깨웠다.
하지만 화가 영감은 도통 깰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주문을 외워도 잘 깨지 않는다니…”
“네가 변변찮은 거겠지.”
당황스러워하는 리리엘을 동글게 말아 엎드리게 한 채 휘진은 그 위에 걸터앉았다.
타타라의 특제 수면향이라 그럴 테지만 뭐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힉, 하는 무거운 신음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하기로 한다. 그 와중에 그녀의 무릎이 다치지 않게 옷을 깔아준 섬세함도 보여줬으니.
이 이상의 양보는 불필요하다.
이제부터는 화가가 귀머거리냐 아니냐를 알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제 영감이 간신히 정신을 차려가는 눈치다. 화공에게 휘진이 말을 걸었다.
눈은 검은 천으로 칭칭 감아 놓은 상태.
“자자, 혼란스럽겠지만 귀머거리 화공아저씨? 미녀도 아닌데 너무 잠꾸러기인 것 아니야? 당신 때문에 공연 시간을 놓쳐서 대공님이 야한 복장으로 춤추는 인생 공연을 못 보게 되었거든?”
“으브브…으버어우어…”
귀머거리를 연기하려는 듯 화공은 발버둥을 치며 뜻이 없는 이상한 단어들을 내뱉었지만 휘진은 무시하고 할 말을 이어갔다.
“자, 그러니까 쉽고 빠르게 가자. 당신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내 말이 들리겠지. 그럼 아무 말이나 제대로 해줘. 반면에 당신이 귀머거리이거나 귀머거리인 척을 하고 싶다면 대답을 하지 않을 테고. 평소의 나라면 인자하게 고문을 하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네.
3초 안에 아무 말이나 하도록 해. 대답을 한다면 살려줄게. 아님 영원히 귀머거리인 채로 죽던가. 묘비 정도는 세워주지.“
실제로는 죽일 배짱도 없지만 사실 귀가 들린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휘진은 앞으로의 일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나, 둘…”
“자…잠깐 기다려주게.”
화가가 쉽게 입을 열어버린… 뭐, 이런 싱거운 취조였다고 한다.
◈ ◈ ◈
저녁시간이 가까워지자 북해 사방에서 날아온 공선들이 슈펜하우져의 제 1 군함 선착장의 회색빛 하늘을 덮었다.
순양함과 순양전함 급의 공선 수십 척이 하늘을 가득 매우며 이른 밤 선사하는 장관이었다.
각 함선에는 영지를 상징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고 인도함(引導艦)의 인계에 따라 선착장으로 천천히 나선을 그리며 착륙했다.
“노심 출력 저하!”
“마력 노심 출력 저하!”
공선 전체에 부력을 전달하는 마력 노심이 천천히 정지함에 따라 막중한 중량을 가진 공선은 바닷물을 가두어 만든 거대한 선착장에 파도를 일으키며 착륙한다.
군함은 프리깃이 대부분인 목조 상선과는 다르게 철갑선이여서 충분한 수심이 확보된 전용 선착장이 필요하다.
각 전함에는 북해 각지의 영주들이 타고 있는지라 조금의 사고도 큰 문책으로 이어질 수 있다. 때문에 선착장의 병사들과 공선 갑판 위의 사병들 모두 날카롭게 날이 서 있는 상태이다.
“노심 완전 정지!!!”
“정지!!!”
배의 밑면이 어느 정도 수면에 잠겼을 때 엔진의 소리가 완전히 꺼지며 철퍽하고 배가 완전히 착륙했다.
이제 배에 있는 중요한 손님을 내려주고는 선착장의 사이드로 빠져 정박할 것이다.
순양함 급 군함, 또는 2급 함선 300 척이 정박 가능하고 동시에 10척이 이착륙할 수 있는 제 1 군함 선착장인 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베아트레아 대공은 선착장 대공요새의 마력활강주포(魔力滑降主砲)가 설치된 첨탑에서 그 관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넓디넓은 바닷물로 가득 차 있는 인공호수를 굽어보는 듯한 구조물로, 이미 몇 번이나 전쟁을 겪고 보수를 거듭했기 때문에 흉터투성이의 역전의 용사로 보였다.
첨탑이라 해도 창살조차 존재하지 않는 창문을 통해 차가운 바람이 귀곡성을 내며 휘몰아쳤지만 대공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하품을 했다.
다른 영주들이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만 3대 영주 중 이미 도착해 있는 엠버 카친을 제외한 이들을 마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여주기에 불과하지만 정치라는 것은 사실 절반 이상이 보여주기다.
지금같이 협력이 필요 할 때에는 적극적으로 맞이해 우호적인 관계임을 비추고, 반대로 대립하고 있을 때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면서 적당한 불안감을 조성한다.
무슨 어린아이들 장난 같다고도 생각을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허나 그닥 의미 없는 보여주기라도 많은 이들이 암묵적으로 그 룰에 익숙해진 이상 웃어넘길 수 없다.
“쓸데없이 호화로운 배들이군.”
영지에서 출발한 군함들은 대부분 기함(旗艦)으로 실제 전쟁에서 지휘관이 타는, 쉽게 말해 방어에 몰빵 찍은 떡 장갑 함선이다.
어차피 주포를 달지 않으니 중량에 여유가 생기고 그 만큼 장갑을 덧대게 되는데, 이게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또 무슨 고약한 유행인 것인지 장갑의 표면에 금칠을 하거나 조각을 새기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졌다.
“자기과시와 사치 없이는 자신의 명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속물들이니까요.”
“오늘따라 신랄한 일침이구나.”
연회의 호위에 걸맞게 예복 위로 약식의 갑주를 걸친 아리스는 비아냥거렸다.
금이 마력의 전도에 가장 적합한 금속이기 때문에 수많은 마공학 관련 기기에 코어부품으로서 활용되는 것은 맞지만 저런 식으로 배 외부에 도금하는 것은 예산낭비 그 자체이다.
제대로 보급도 받지 못해 죽어간 병사들이 수두룩했던 지난 루블 왕국과의 전쟁에서 병사들이 저 배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한숨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좋은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없군요.”
“이해하네. 자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역겨움이겠지.”
베아트레아 대공이 당금의 귀족들을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만큼 아리스도 기성 귀족들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권력의 암투장에 발을 담그기 전이라는 사실은 아리스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이다.
“몸은 좀 어떤가?”
“지금은 무고합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일할 필욘 없네. 자네는 대체할 수 없는 우수한 부하야.”
“이미 제 검과 목숨은 대공님께 신명을 다했습니다. 이제 와서 부서지는 것이 두렵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대체할 수 없다’는 말이 그저 능력이 아닌, 감정적인 유대의 영역이라 말한다면 이 충성스럽고 고지식한 여기사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대공은 엷게 미소를 띠웠다.
“이번 연회가 끝난다면 넉넉하게 휴가를 줄 테니 해안 별장이라도 찾아 휴식을 취하게나. 그대의 노고에 대한 치하라고 생각해두고.”
“그런 명이라면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으며 자로 잰 듯한 경례를 보이는 아리스.
그와 동시에 붉은 뿔 고동의 신호음이 3번 크게 울렸다.
“3대 가문의 기함이 행차하셨나보군. 나가봐야겠네.”
“네, 곧바로 준비를.”
흘끗 창밖을 향한 대공의 시야엔 잿빛의 하늘에 비스듬히 기대어 하강중인 금빛의 범선이 걸려있었다.
◈ ◈ ◈
선착장부터 대합실까지는 폭이 3M나 되는 레드카펫이 쭉 깔려있었다.
중앙에선 무시 받고 촌뜨기로 격하당하기 십상이나, 그래도 대영지의 영주들과 콧대 높으신 귀족들이다.
소금과 바닷물이 얼어 자글거리는 진흙을 밟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하는 귀족들도 여럿 있었기에 대공이 마련한 작은 배려였다.
물론 합리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만…
레드 카펫의 좌우로는 검과 방패를 든 중장갑의 기사들이 도열해있다. 드레스의 끝자락을 끌며 베아트레아 대공은 북해 3대 맹주였던 트리니다드의 영주 펠릭스에게로 다가갔다.
막 가교에서 레드카펫으로 발을 내딛은 것은 굉장히 젊은 청년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뚜렷한 이목구비와 화사한 분위기까지 이미 사교에서 여러 아녀자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고 있는 트리니다드 펠릭스 후작.
루블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트리니다드 가문의 가주가 된, 베아트레아 대공의 솔직한 평가에 따르자면 겉멋만 잔뜩 든 나르시시스트이다.
“트리니다드 펠릭스, 베아트레아 아슌푸틀 대공저하의 명을 받들어 지금 이곳에 당도했나이다.”
요즘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것인지 한 쪽 무릎을 멋들어지게 꿇고 모자를 벗어 우아한 폼으로 인사하는 펠릭스. 떨떠름함을 애써 숨긴 베아트레아 대공은 한 쪽 손을 내밀었다.
그 손등 위에 입맞춤을 한 펠릭스는 다시 연극배우와 같은 모양새로 몸을 일으켜 다시 한 번 모자를 쓰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작년에 뵈었을 때보다 한층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대공 저하의 미모 앞에서는 고색창연한 달빛마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이 몸이 먼저 부끄러워 고개가 숙여질 것 같네만…”
상대하기 어려운 타입이다.
소름이 쭈뼛 돋는 대사이건만 펠릭스의 얼굴에는 그 어떤 불편함도 없다. 저런 대사를 언제나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전부터 느껴왔던 것이지만 이 펠릭스라는 대공보다 3살 연상의 청년은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눈치 없는데다가 잘난 맛에 살아가는 전형적인 젊은 벼락출세 귀족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30대 중 후반에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는 다른 후계자들에 비해 거의 10년은 빠르게 분에 넘치는 자리에 앉게 되자 눈에 뵈는 것이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자신을 무슨 북해 정치계에 폭풍을 불어오게 할 젊고 유망한 신예 귀족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실상은 가주의 권력마저 기존 공신들에게 야금야금 빼앗기고 친중앙파의 가신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바보다.
“손이 너무 거치시군요… 밤낮으로 공무에 시달리는 대공 저하의 노고를 생각하니 절로 눈물이 맺힙니다.”
‘얘 좀 어떻게 해보게’
정말로 눈물을 글썽거리는 이 미청년은 사모의 마음으로 활활 불타는 눈으로 대공을 바라보았고, 대공은 눈가에 경련을 진정시키며 아리스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바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일단 안에 들어서 차라도 한잔 드시죠.”
“알겠습니다 레이디, 저에게 이런 바람 따위 그다지 문제가 되진 않지만 대공께선 힘드실 수 있겠군요.”
아리스의 중재를 받은 펠릭스는 연극배우와 같은 걸음걸이와 행동으로 성큼성큼 걸어 대합실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