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토끼 요리(1)
귀족의 여식이란 아비나 어미의 권위에 기대어 평민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여유와 낭비 속에 온실 속의 화초처럼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나 북해처럼 보수적인 분위기가 만연한 지역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일평생을 투쟁이나 정쟁(廷爭)과는 관계없는 안전지대에만 발을 두고 호화로운 사교파티나 즐기며 안락한 나태를 즐기다, 어느 날 일면식 없는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가꾸는 것을 행복이라 부르는 것이다.
베아트레아 아슌푸틀 대공.
지금은 그렇게 불리는 것이 더 익숙해져버렸지만 한 때 다른 이름이던 소녀 역시 그런 생활을 동경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이름조차 잊어버린 귀족 자제가 수줍게 건넨 꽃 한 송이에 가슴을 붙잡고 밤을 떨었던 그때가 있었다.
이제는 까마득한 일이다.
“이제는 제법 ‘유리구두’를 다룰 줄 알게 된 것 같네? 일대의 마력 제어권을 삼계에 진입해 빼앗아버리다니. 반칙이라구.”
“과찬이네. 그대가 보기엔 아이 장난 수준이겠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베아트레아는 타타라에게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왜 자꾸 어린 시절이 생각나느냐 하면 그 시절 그렇게나 입고 싶어 했던 어깨가 전부 드러난 파티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이려나.
곧 시작될 연회와 위령제를 위해 시종들에게 2시간 가까이 코디를 받고 온 뒤이다.
평소에 잘 하지 않는 화장도 잔뜩 해버리는 탓에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이다.
몸 굴곡을 강조하듯이 허리라인을 조이며 떨어지는 드레스 재단과 하늘색의 고급스러운 천은 곳곳에 자수가 놓여 기품 있게 몸을 휘감는다.
꽃받침 대 위의 꽃처럼 길게 뻗은 쇄골위로는 대공의 새하얀 은발이 단정히 매듭처럼 묶여 내려온다.
허벅지부터 사이드가 트여 내려온 길게 뻗은 발끝에는 유리로 만든 구두가 신겨져 있었다.
유리구두를 딛을 때마다 연못에 파문이 일듯 퍼져나가던 푸른 마력의 떨림은 이내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사라졌다.
“이제 ‘신기(神機)’의 컨트롤도 거의 완벽하구나. 다음의 아신이 되는 구도자는 역시 네가 아닐까 싶어.”
“그래야만 하지. 아직 이것저것 많이 남아 있긴 하다만 말이네.”
타타라는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베아트레아를 바라보며 소파에서 뒹굴뒹굴 굴러다녔다.
영원한 시간을 살아가야만 하는 아신에게, 그것도 호기심이 굉장히 많은 타타라에게 베아트레아라는 소녀는 굉장히 재미있는 유희의 일환이었다.
변해간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언젠가 정체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보다는 형형색색 만개하는, 혹은 영락해가는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이 즐겁지 않은가?
“방구석에서 엉엉 울던 소녀가 이렇게나 크다니 기특해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는 건 삼가게나, 시녀들이 애써 장식해준 거라네.”
마구 머리를 헝클며 머리를 쓰다듬는 타타라에게 대공은 입술을 조금 내민 채로 답했다.
베아트레아는 타타라가 과거를 들먹이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만 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공이야 부끄러운 기억이겠지만 이런 표정을 볼 수 있는 건 드문 일이니 말이다.
“으이구~ 귀여워 죽겠다니까.”
대공을 끌어안고 말랑말랑한 볼을 비비는 타타라. 대공은 귀찮다는 듯이 팔로 밀어내는 시늉을 했지만 결국 소파에 앉은 타타라의 품에 푹 안겨 인형처럼 보듬어졌다.
마음에 들든 않든, 일단은 타타라와의 계약사항인지라 거부할 도리는 없다.
그녀가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요구한 것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어린이 장난이라는 건 과한 겸손이야. 시작한지 몇 년 되지도 않은 애송이 마법사인 주제에 대마법사 수준의 마법이라니. 아신 자존심 상한다구우우.”
“이보다 더 강해지지 않으면 곤란하네.”
“그래도 좀 쉬어두는 게 어때? 하루에 4시간 밖에 안자면서 그마저도 거르는 날이 많고. 북해 관리에 마법 수련에 영지 관리에 음흉한 음모까지 상대하려면 도저히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나랑 침대에서 뒹굴 거리면서 놀자.”
“당분간은 힘들 것 같군.”
침대에 자신마저 눕히려는 타타라의 품에서 몸을 비틀며 벗어나온 베아트레아는 한숨을 쉬며 속편한 녀석이라는 눈빛으로 타타라를 쳐다보았다.
“아 왜에에.”
“오늘만 해도 만나야 할 각지 영주들만 5명이 넘는다네, 거기에 연회 참가, 심지어 팔자에 없는 춤 공연을 하게 생겼고. 중앙 금리에 관해서 재무경과도 약속이 있네. 그런 이 몸에게 탱자 탱자 같이 놀자 하는 겐가? 슈펜하우져 마법공학연구소장 타타타 타타라 경?”
은은하게 올라오는 분노의 기색에 풀네임으로 불린 타타라도 조금은 움찔했다.
“힝… 무서워… 오늘은 어디 갔는지 휘진도 보이지도 않는데. 심심하다구우우…”
“그럼 그대도 연회나 참가하게나. 휘진 경도 오늘은 바쁠 테니.”
“싫어 재미없어.”
한결같은 타타라의 어린아이 같은 투정에 한숨을 쉬면서도 이젠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대공이다.
“정 그러면 연회에서 휘진 경과 댄스라도 추지 그러나? 마음에 쏙 든 모양이던데.”
“뭐야 뭐야, 지금 표정 마치 친한 친구가 자신과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의심이 들어서 넌지시 떠보는 여자아이 같은 걸?”
“자네는 언제나 이상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단 말이지…”
장난스레 말하면서도 흘끗 전신거울을 보게 되는 것이 타타라의 묘한 말재간이다.
자신이 보기에 얼굴은 평소와 같았다. 그다지 의식을 하고 한 말도 아니었고.
그때 거울에 비친 타타라와 눈이 마주쳤다.
“역시, 뭔가 신경 쓰이는 거야?”
“그대도 꽤나 얕은 수작을 쓰는군.”
유도 심문 같은 걸 하다니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말로는 타타라의 연륜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가싶다.
우후후후 하는 표정을 보며 싱글벙글 웃어주는 타타라에게 반격을 하고 싶다만, 연륜도 실력도 못 따라가는 상황에서 어쩔 도리 없다.
“그보다 춤 연습은 잘 되어가고 있는 거야?”
“마음에 차지는 않는다만, 구색 정도는 갖추었다네.”
“음~ 그럼 보여주라!”
반 넘게 진심인 쌀쌀맞은 대공의 말투에도 타타라의 페이스는 전혀 무너지지 않는다.
여러 의미로 민폐다만.
짧은 마음속 투정은 ‘어쩔 수 없다’라는 답으로 끝난다.
“춤 선생을 불러서 3달이나 연습했네만, 솔직히 만족스럽지는 않군. 자네라면 춤에도 조예가 있었지.”
“암, 북해의 춤은 잘 모르지만 이레 뵈도 역사책엔 사교의 여왕이라고도 기록된 적이 있다구~.”
“그럼 모쪼록 조언을 부탁하지.”
노래도 없이 춤을 춘다는 것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다. 타타라는 대공이 추기로 한 노래의 박자를 박수로 치기 시작했다.
넓은 홀 같은 대공의 방에서 타타라의 박수에 맞춰 대공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이라면 아무래도 남부 지방의 열정적인 무희의 춤이 일등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세 사람이 모이면 술과 노래와 춤이 반드시 있다는 북해 역시 여러 춤이 기본적인 소양으로 자리 잡아 있는 곳이다.
“잠깐 잠깐, 이걸 정말로 아까 같은 옷을 입고 추겠다고?”
“?,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문제 있지!”
춤이 시작한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타타라가 다급히 대공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물었다.
위령제야 매번 하는 것이지만 타타라는 기본적으로 그런 것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춤을 보는 것은 처음일 것이다.
하지만 교태를 떠는 무희처럼 천박한 동작을 보자니 입이 떡 벌어졌다.
이런 춤을 추는 대공을 수 만 병사 앞에서 보여야 한다니… 타타라는 19금 뮤비를 내버린 걸그룹의 어머니가 되는 기분을 간접 체험했다.
“그런 야시시한 춤을 그보다 더 야시시한 옷을 입고 춘다는 게 말이 되는 거야?”
“전통일세.”
“이런 춤을 추기 전엔 나한테 상담을 했어야지!!!”
“자네 꽤나 휘진 경 같은 대사를 하는 군.”
처음에야 부끄럽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3개월 간의 연습과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무덤덤해진 대공과 춤을 처음 보게 된 타타라의 간의 인식차이였다.
“왜 그렇게 대화에서 휘진이 툭툭 튀어나오는 걸까?”
“아무래도 어떤 자인지 궁금하긴 하니 말이네. 타타라, 내게 줄 수 있는 정보 같은 건 없는가?”
“성적 취향이라던가?”
“… 됐네.”
타타라는 짖궂은 말로 일부러 대답을 피한다. 더 파고 들어봐야 정말 성적 취향 이외에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벌써 살을 맞댄 것인가…
아무래도 남자에겐 엄격한 정조관을 강요하지 않는 북해의 풍조인 만큼 대공도 마음이 맞는 남녀가 몸을 섞는 것을 그다지 불결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지만…
“괘씸한…”
어딘가 화가 나게 되는 것은 무슨 변덕인지, 남녀 관계에 대해 사실은 별로 아는 것이 없는 대공이 알아차릴 리 만무하다. 그런 대공의 반응을 즐거운 듯이 바라보던 타타라는 말을 이었다.
“한창일 때의 남자잖아? 조금은 놀아줘도 괜찮을까 싶어서.”
타타라는 대공의 좌우로 몸을 기웃기웃 기울이며 ‘질투나? 질투나?’라며 약을 올렸다.
사실 질투고 뭐고 할 것도 없다.
휘진은 자신의 식객에 불과하고 신하도 뭣도 아니다.
언제든 마음이 맞지 않으면 떠날 사람이고 연애 감정 둔 교류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리고 언젠가 이용해야 할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타타라의 깐죽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대공은 타타라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아…아하…놔워…”
“내일의 계획엔 차질이 없었으면 하네만. 연애 놀음이라면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해줬으면 좋겠네. 물론 굳이 장밋빛 얘기를 꺼낼 필요도 없네.”
“며…명쉼 하게습뉘돠…”
힘 조절 따위 없이 마력마저 담아 두 볼을 꽉 잡아당기는 탓에 타타라의 눈에 글썽 글썽 눈물이 맺혔다.
아무래도 너무 자극해버린 모양이다.
타타라로서도 아직까진 대공이 휘진을 향하는 마음을 확정지을 수 없다. 게다가 굳이 대공을 경쟁자 삼을 생각도 없다.
휘진이야 매력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누군가를 독점해야겠다는 욕심은 애진즉 사라진지 오래이기도 하고…
“아푸푸, 너무하잖아. 아프다구… 그래서 계획은 정말 그렇게 진행할 생각이야? 정말이지 피도 눈물도 없다니깐.”
“어쩔 수 없는 일이네. 말로 구슬리고 설득해서 내 사람으로 만들기엔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더 이상 기다려 줄 여력도 없어.”
“뭐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아신치고 제정신인 사람 없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아. 하지만 그게 너까지 미쳐야 한다는 말은 아니라고.”
타타라는 모처럼 진지한 얼굴로 베아트레아의 하늘색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선을 확실히 하도록 해.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떨어지고 말테니까. 그럼, 다음에 봐!”
결국 그 진지함도 3초를 넘기지 못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타타라는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