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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34화 (34/154)

34화 귀여운 토끼 아가씨(2)

재미도 있고 하니 더 추리를 해보도록 할까.

케이스 2의 경우 더 이상 추론할 여지가 없으니 케이스 1로 가보았다.

대공님이 휫센 상단의 속내를 의심하고 있다 친다면 덫을 놓은 것일 수도 있다.

상대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가장 빠르게 알아내는 방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보안과 직결되는 화공을 구하는 문제를 의탁함에 의해 상대를 완전히 믿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정보’라는 미끼를 뿌린다.

원래 사냥하려는 자는 자신이 사냥 당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희박해지기 마련.

이런 간단한 장치를 통해서 원래는 굉장히 복잡하게 추측해야 할 ‘과연 휫센은 정말 대공의 편인가’라는 명제를 ‘화가가 귀머거리인 것이 참 이냐 거짓이냐’에 따른 이원적인 분류를 통해 간단히 판단할 수 있다.

“소름이네. 대공님 너무 머리 좋은 거 아니야?”

거기에 3개월이란 시간 동안 상단 쪽에 혼동을 줄 수 있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단 측에서는 대공님이 아무런 대응이 없는 이상 귀머거리 화가가 스파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물론 이렇게까지 추리대로 모든 일이 일어났겠냐마는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임무는 3개월 간 공을 들인 낚싯대를 확인하는 작업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전개상 아무래도 대어일 느낌이 팍팍 든다.

“이렇게까지 추리를 했는데 그저 좋을 대로 작두를 탄 것에 그친다면 상당히 부끄러울 것 같거든?”

할아범은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 몇 번이나 모퉁이를 돌았다.

걸음이 이상할 정도로 빠른데다가 무의미 할 정도로 구불구불 거리는 골목의 틈새를 파고 들었기 때문에 정말 많이 시간을 멈추어야 했다.

말하자면 할렘가 같은 곳이라고 해야 하나.

몰골이 영 말이 아닌 노숙자들이나 때가 잔뜩 낀 사람들이 술병과 함께 바닥에 너부러져있다.

추위를 막기 위해서 인지 건물 사이사이 쳐 놓은 천막 같은 것 때문에 시야의 확보도 어렵다.

낮인데도 매우 어둡고.

이거 입질이 크게 오는 것 같다.

제대로 된 화가가 이런 하렘의 골목 깊숙이 파고들 일은 없을 것이다.

뭐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다라는 시시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언제 괴한이 튀어나와 돈을 뺏어갈지 모르는 곳을 귀머거리인 노인네가 혼자 걸어가려 한다?

명백히 이상하다.

슬슬 인적이 드물어졌을 때 휘진은 바닥에 놓여 있던 술병 하나를 손에 들고 조용히 노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힘껏 돌담을 향해 병을 던진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사방으로 비산하는 파편.

아주 조금이면 된다.

어떤 이유로 이런 골목까지 파고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뒤에서 갑작스레 큰 소리가 들리면 불안감 때문이라도 뒤를 돌아보기 마련이다.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설령 완전히 돌아보는 것이 아니더라도 깜짝 놀랐을 때 사람의 신체 경직 정도만 보아도 사실의 여부는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그때였다.

“당신 뭐하는 거죠?”

“으힛, 깜짝아!”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휘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로브를 뒤집어 쓴 여자. 후드를 깊게 눌러 써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양 갈래로 묶어 어깨 앞으로 내린 주홍색의 머리카락과 딱 봐도 아름다울 듯한 하관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골목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과 분위기.

그간 대공님을 보며 느껴왔던 태생 본연의 고귀함과 화려함이 전해져 온다.

물론 대공님에 비하면 세발의 피 정도이기는 하지만.

“노인을 위협하는 불한당에겐 정의의 마법을 내려주겠어요!”

“엥? 저기 오해야.”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상황증거가 확실한 상황에서 발뺌할 생각인가요?”

“무슨 전개지 이거.”

마력을 끌어올린 것인지 헐렁헐렁한 로브가 세찬 바람에 흩날리며 후드 아래 묻혀 있던 단정한 얼굴이 드러난다.

눈동자는 머리카락과 같은 오렌지 색.

불의를 참지 못하고 열정에 불타는 눈동자가 당당하게 빛난다.

예쁘다.

사실 전후관계가 어찌됐건 그거면 됐다.

“일단은 당신을 제압하겠습니다.”

“쉽게는 안될 텐데…”

손 근처에 마법진 으로 추정되는 것이 떠오르며 수많은 문자의 열이 그 위를 순환하듯이 회전한다.

일단은 설명이 필요한 것도 같지만 휘진은 오해를 풀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쪽이 오해를 해서 공격을 해주는 편이 여러모로 사정이 좋다.

휘진은 재빨리 시간을 멈춘 채 잠시 생각 타임을 가졌다.

일단 이 여자는 휘진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얼굴도 반반하니 마음껏 모처럼 가지고 놀아보는 건 어떨까?

마침 시험해 볼 것도 있고.

시간 정지를 하고 엉망진창으로 섹스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런데 그것보다는 중간 중간 시간 정지를 풀면서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자신의 몸이 더럽혀져가는 걸 알아차린 저 여자의 반응이 궁금하단 말이지.

어설픈 정의감이 악당에게 잘못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몸으로 똑똑히 새겨주고 싶다.

“그럼 저 영감은 어쩐다…”

휘진은 근처에 적당히 밧줄로 쓸 만한 천으로 화가의 손과 발을 꽁꽁 묶은 뒤 막다른 골목 상자들 틈에 처박아 놨다.

사실 병을 깨뜨릴 때 갑자기 여자가 나타난 통에 영감의 반응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일단 유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기로 하고 어제 아리스에게 쓰다 남은 수면향까지 옆에 피워주고 왔다.

오늘 아침도 두 탕이나 했건만 아직 성욕은 건재하다.

일단 뭔가를 발사 하려는 듯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여자의 옆으로 다가섰다. 여자의 후드만 벗기고 슬쩍 옆으로 물러선 뒤 시간 정지를 피했다.

◈          ◈          ◈

키스엘 리리엘.

저명한 연금술사이자 마공학자.

왕설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한 직후 수많은 국가와 학원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소위 천재라 불리는 족속이다.

달 토끼의 피를 이어 받은 토인(兎人)이자 마도계의 명문가인 키스엘 후작가의 장녀.

자라며 가문의 역사를 다시 쓸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미 17살에 ‘대학자’의 칭호를 얻었다.

리리엘에겐 숨을 쉬듯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듯 우수하며, 당연한 듯 누구보다 좋은 성과를 내고, 당연한 듯 주변의 어떤 경쟁자보다 앞서 있다.

때문에 특별히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거나 우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은 천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자신에게 재능을 주었고 그 재능을 갈고 닦아 마도계의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야 말로 사명으로 여겼다.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일관하며 더욱 더 주변에서의 존경을 끌어 모았다.

거기에 마치 한 송이 꽃과 같은 미모 또한 나날이 눈부셔졌다. 그녀를 향한 존경의 정도는 추앙으로 격상하여 무수히 많은 구혼 요청과 대시를 받아왔으나 그 누구에게도 눈길 한번 보낸 적 없다.

오로지 마법을 위한 일생을 보내며 정진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결국 한계에 맞부딪혔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분야의 최고라는 타타타 타타라라는 아신을 만나기 위해 이 먼 북해까지 향한 것이다.

쉬운 여정은 아니었지만 결국 베아트레아 대공의 치하에 있는 슈펜하우져에 도착했다.

그 이후 길을 잃어 으슥한 곳까지 들어오던 중,

이곳에서 노인에게 유리병을 던져 위협을 가하는 불한당을 마주한 것이다.

마도의 길을 걷는 자.

자신의 힘을 일신의 욕망이 아닌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에 사용하라.

숱하게 스승에게 듣고 들었던 말을 리리엘은 마음 깊숙이 새기고 있다.

이런 트러블 따위 피해갈 생각도 없다. 저 앞에 비리비리해 보이는 청년을 따끔하게 혼내주기 위해 마법을 장전하고 그대로 발사.

“어라?”

“이쁘장한 얼굴인데 감추기는 아깝잖아? 어랍쇼? 토끼 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아무런 마력의 흔들림도 없이 바로 지척에서.

어느새 후드는 벗겨져 토인족 특유의 연분홍 빛 토끼귀가 삐죽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대학자라는 칭호는 그저 책을 읽고 이론으로만 마법을 익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리리엘은 재빨리 발로 땅을 그으며 영창을 외웠다.

“붙잡아라, 대지여.”

단 두 소절의 영창.

그녀는 이미 영창의 길이에 구애받지 않는 고위 마법사이지만 지금 같은 근접전에서 느긋하게 영창을 외거나 마법진을 만들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녀의 발이 스쳐 지나간 곳의 흙이 꿈틀거리더니 손의 형상을 취하며 남자가 서 있는 쪽으로 무섭게 달려들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쓸데없는 짓이야. 그리고 공격은 네가 먼저 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마법을 사용한 ‘반대 편’에서 들려온다.

리리엘은 오한을 느껴야했다.

이러한 기묘함은 그 어떤 상대에게도 느껴본 적이 없다. 도대체 어떤 마법을 사용하는 것일까.

환각계열? 이미 실전되었다고 전해지는 공간 이동?

그렇다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마력의 파동은 무엇인가.

“엘티메이트 킥!”

“쿠흑!!!”

그는 발을 뻗어 리리엘을 걷어찼다.

순간 배에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에 리리엘의 몸이 공중에서 휘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지만 미리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마법기사가 아닌 이상에야 버텨낼 수 없다.

그리 대단치 않은 발차기 정도라고 하더라도 단련하지 않은 학자가 받아내기엔 무리인 것이다.

리리엘은 대굴대굴 굴러서 그대로 벽에 등을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마력으로 수호장을 전개해 등 뒤로부터의 충격은 완화시켰다. 하지만 성인 남자의 전력을 다한 발차기가 복부에 꽂힌 이상 제대로 신체가 기능할리 없다.

“게으흐흑…”

배를 부여잡고 눈물이 맺힌 눈으로 자신의 앞에 불한당을 노려본다. 척추까지 삐걱거리는 듯한 통증에 두 귀가 파르르 떨린다. 반쯤 열려 덜덜 떨리는 입가에는 침이 흘렀다.

리리엘은 자신이 경솔했음을 인정했다.

상대가 끽해봐야 불한당일 것이라고 생각한 건 오판이었다.

안일하게도 자신의 특기 분야가 아닌 마법으로 싸움에 임했으며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는 데에도 소홀했다.

하다못해 첫 공격을 회피 당했을 때 방어에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썼더라면 지금같이 크리티컬한 일격을 허용하진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사람한테 마법이나 쓰고 말이지. 깜짝 놀랐다구.”

양손을 벌려 보이며 너스레를 떠는 남자의 모습에 리리엘은 입술을 깨물고는 자신의 품에 있는 연금촉매를 사용하려 했다.

땅에 깨뜨려 수호골렘을 만든 뒤 시간을 벌 셈이었다.

그러나.

“어이쿠 어이쿠, 안 되지.”

분명 손에 들려있을 터였던 연 노란색의 액체가 달려있던 앰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귀신에 홀린 느낌이다.

손에서 앰플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땐 병을 바닥에 던지려던 순간이었다.

즉, 손에 들고 빼앗기는 그 순간까지도 자각하지 못했을 만큼이나 빠르다.

남자가 추가타를 가해오지 않았기 때문에 리리엘은 조심스럽게 벽을 딛고 일어섰다.

아직 충격이 전부 가시지 않아 몸을 꼿꼿이 펴는 것만으로도 당기는 듯한 통증이 전해져왔지만 당당히 허리를 핀다.

이런 악당의 앞에서 굴하는 일 따위 절대로 없다. 몸이 부러질지언정 마음은 부러지지 않은 채 있는 힘껏 저항하리라.

리리엘이 짚고 있던 벽에 순식간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퍼져나갔다. 연금술의 기본, 동조의 술식이다.

마치 예술작품인 양 아름다운 마법문양은 벽의 내부까지 침투해 단순한 돌덩어리에 불과한 돌 벽을 리리엘의 간섭이 용이하도록 변화한다.

빠른 시간 안에 졸속으로 처리된 마법진이지만 리리엘에게나 졸속일 뿐 놀라운 기술이다. 단 1초도 걸리지 않고 펼쳐져나간 동조의 식에 삼중의 연성(鍊成)과 이중의 변화(變化), 또 다시 삼중의 전개(展開)가 새겨져있다. 웬만한 연금술사라면 보고도 믿지 못할 것이다.

연성의 성질은 경화, 변화의 성질은 폭발과 분쇄, 전개의 방식은 세 번을 나눠 축차로.

마력노심으로부터 흘러넘치는 마력은 리리엘의 마법회로 내부를 돌며 팽창, 가속화 되었고 이제 팔과 연결된 벽의 마법진을 기동시키기만 하면 크레모아가 폭발하는 것처럼, 강철보다 단단해진 벽들의 조각이 이 일대를 휘갈길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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