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귀여운 토끼 아가씨(1)
“그대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군.”
“그럼 해명을 해보시지. 안 그러면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릴 테니까.”
대공님은 자신의 은발을 부끄러운 듯이 쓸어내리며 화가에게 잠깐 멈추라는 손짓을 하고는 담비 털로 된 모피를 덮고 의자에 앉았다. 저런 옷차림이면 아무리 벽난로를 틀어놓아도 추울 법하다.
“북해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영령이 되어버린 전사들을 위해 위령제를 지낸다네.”
“대공님이 자처해서 이런 옷차림의 초상화를 그리는 이유는?”
“위령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무녀(舞女)의 역할은 대대로 병사와 기사들의 투표로 결정되네만… 이번엔 이 사람들이 이 몸을 지명했지 뭔가.”
“엄청난 이유구먼…”
아무리 편해 보인다지만 북해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대공님을 이런 복장의 무녀로 투표해서 뽑아버리다니 뒷일이 무섭지도 않은건가.
뭔가 장성급 아래로 불벼락이 떨어졌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뭐 이쪽이야 눈 호강만 하면 그만이니 상관없다만.
“병사들 사기 진작 시킬 겸 병사 월간지를 나눠주며 조사를 시행한 것인데… 아무래도 조금 가볍게 다뤄지다 보니 결국 이렇게까지 커져버렸군.”
병사들도 설마하는 심정에 재미로 투표를 한 것도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무려 95%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대공님이 ‘올해의 무녀’로 간택되었다고 한다.
내가 아는 직위 절대주의의 봉건제와는 뭔가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오히려 이거 유저들이 장난으로 밀어붙인 이벤트에 어울려주는 게임사 정도의 가벼움이 아닌가.
“그래도 좋은 거야? 그래도 대공의 위엄이라던 지 있는데.”
“위정자들의 다툼에 휘말려 죽어가는 병사가 수천수만이었다네. 그들의 요구가 장난이든 진심이든 중요하지 않다네. 내가 웃음거리가 되면서라도 영령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춤 정도가 아니라 더한 것도 가능하지.”
가볍게 물어본 질문에 생각보다 진지한 대답이 돌아와 버렸다.
그보다 춤도 추는 건가… 이런 복장으로 춤을 추면 그야말로 눈 둘 곳이 난처해진다.
어느 곳 위주로 봐야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지 고민이 된다.
“그렇다면 그림은?”
“병사들의 위령비가 있는 곳에 걸리게 된다네.”
“그야 이런 그림이 앞에 있으면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불끈 불끈한 상태가 되어 구천을 떠돌지 않을까? 적당히 인큐버스 같은 게 되어서 말이다.
대공님은 머리 위에 조금 비뚤어진 티아라를 바로잡은 뒤 모피로 몸을 둘둘 말았다.
“그림 구경해 봐도 될까?”
“좋을 대로 하게나.”
대공님의 허락을 받은 휘진은 나이가 60은 족히 될 것 같은 등이 굽은 화가에게 다가섰다.
“그림 좀 보겠습니다.”
“….”
말을 걸어보았지만 이쪽을 신경 쓰는 기색조차 없다. 그저 무표정으로 거의 완성에 가까운 그림을 붓으로 덧칠하며 마무리 작업을 계속할 뿐. 집중력이라는 건가? 사다리 위에 올라가 있어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지만 대단한 열정이 느껴진다.
“아, 깜빡했군. 그자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네. 3개월이나 걸리는 작품이다 보니, 공무에 영향이 가지 않으려면 모델을 하면서 여러 가지 보고를 받아야 해서 말이네. 휫센에게 부탁해 귀머거리 화공을 구했네.”
“보안 때문이구나?”
“그런 셈이지.”
대공님과 이야기 하며 근처에 다가가자 화가는 그제야 휘진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그림을 감상하기 편하게끔 사다리에서 내려와 옆으로 물러섰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예술 작품을 보는 안목도 없고.”
그래도 지금 이 작품을 꼭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무려 대공님의 전신 그림인 것이다. 그것도 굉장한 하이 퀄리티의.
침대 앞에 붙여 놓는다면 근사한 장식이 될 듯싶었다.
“너무 그렇게 보고 있지는 말게나. 아무래도 권력자의 그림이란 부끄러울 정도로 실물보다 아름답게 그려지니 이해해주게.”
“아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야. 이런 그림 대공님의 실제 아름다움에 10분의 1도 못 미친다고.”
“아무리 귀가 들리지 않는 화공의 앞이라지만 말이 너무 가볍군.”
“그런 의미는 아닌데…”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는가 싶었지만 대공님도 어디까지나 말장난인 모양이다. 쩔쩔 매는 휘진을 향해 만족한 듯 한 미소를 짓는 걸 보니 말이다. 더불어 칭찬에도 아주 약한 모습을 여러 번 보여주신다.
“오늘 저녁부터는 그대도 수고가 많겠군. 그대의 능력을 살려 잘 중재해주길 바라네. 매해 다툼이 있는 만큼 아마 일감이 부족하진 않을게야.”
“아아, 오늘 연회 말이지? 걱정 말고 맡겨둬 대공님의 성 안에서 싸움을 일으키는 불한당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너무 열을 올리지는 말게나.”
무언가 당부를 하려다 입을 다문다. 그 이상은 능력에 대한 불신으로 내비쳐진다고 생각했는지 대공님은 말을 아끼고는 화가에게 다시 손짓을 했다.
대공은 마치 기도하는 자세로 하늘에 두 팔을 벌리고는 말했다.
“더 할 얘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해도 좋네. 마침 무료하던 차에 잘되었군.”
“그럼 오늘은 솔직하게 서로의 심정을 터놓기로 할까? 대공님은 왜 나를 가신으로 세워준 거야?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수상쩍기 그지없는 인물이었을 텐데.”
매사에 안일하게 생각하며 넘어가는 휘진이지만 분명히 대공의 태도는 정상에서도 그리고 대공의 성격에서도 벗어나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한 자신의 능력에 매료되어 유능한 부하를 늘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짐작을 했다.
하지만 요 며칠 관찰한 결과 대공님의 측근이라고 불릴 정도의 인물은 단 2명, 아리스와 타타라 정도.
나머지는 철저하게 업무와 상하관계로 얽혀있는 관계뿐이다.
그런데 거기에 자신이 그렇게 쉽게 끼어든다는 것은 기묘할 정도로 위화감을 느끼던 터였다.
단순히 능력 위주로 주변에 사람을 두는 사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으니까.
더불어 모델이 되는 동안 화가를 통해 이야기가 새어나갈까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과연 출신도 이력도 불분명한 자신을 최측근으로서 옆에 둔다? 그것도 모조리 이쪽 사정에 맞춰서? 쉽사리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과연 그대가 그리 느낄 만도 하군.”
대공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만 저렇게 예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용당하더라도 기꺼이 기쁨에 겨워할 자신이 생긴다.
스스로가 참 단순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에게 떠받들리며 살아오다보면 많은 것들이 보이게 된다네. 이 몸을 단순히 이용하려는 자,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자,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뒤에서는 칼을 가는 자. 그렇게 많은 것들을 보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 누구도 진심으로 믿기 힘들어지지. 심지어 혈육이라 하더라도.
다가오는 모든 자를 경계하고 이성적인 판단의 잣대로 헤아리려하니 너무 지치더군. 나는 이해관계를 초월한 단 한사람의 친우를 원했을 뿐이라네.
이성과 합리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번 정도는 직감에, 스스로의 신뢰에 완전히 마음을 맡기고 의탁할 수 있는 관계가 너무나도 절실했지.”
대공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내 앞에 나타난 게 그대라네. 그래서 이번 한 번 정도는 운명에 맡기기로 했네. 난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모르네.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도, 어떠한 가치관과 사상을 갖고 있는지도 짐작할 도리가 없네. 그러나 믿기로 했네.
너무나도 어리석지. 누군가에겐 정말로 훌륭한 먹잇감 일게야. 이토록 무방비하고 허술한 조치 이제껏 해 본적이 없으니 파고 드려한다면 어디까지나 여지가 있겠지.
그러나 그대가 말했던 것처럼 나의 편이 되어준다면 정말 기쁠 거라고 생각한 것. 그게 전부네.”
조금도 지어내는 기색이나 거짓말하는 기색 없이 대공님은 담담하게 털어 놓는다.
높으신 사람도 참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해는 30퍼센트 정도 밖에 안가지만. 잠시지만 대공님을 오해했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 지금 대공님의 표정은 쓸쓸해 보였다.
“자네도 내가 바보 같나?”
휘진은 일단 대공님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뭔가 있어 보일 수 있는 어필 타임이다.
“대공님, 대공님의 결단이 결코 헛되지 않은 거야. 그 믿음에 난 보답하겠어. 대공님이 날 먼저 배신하지 않는 한 절대 배신하지 않을 거야.”
“전제조건까지 없었더라면 참 멋진 말이었을 게야.”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정중한 휘진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대공님은 입가를 가리고 방이 환하게 느껴질 정도로 밝게 웃으셨다.
여전히 즐거운 듯이 웃음을 짓는 대공님이 휘진을 조용히 손짓으로 불렀다. 가까이 다가온 휘진의 귀를 조심스럽게 당기더니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다.
“그렇다면 그대의 말을 믿고 한 가지 일을 부탁해도 될까?”
차가운 손과는 정반대로 뜨거울 정도의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며 대공님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향긋한 향기가 코 안을 가득 메웠다.
“저 화공을 미행해. ‘저자가 정말로 귀머거리인지’를 확인해주게.”
이렇게나 믿어 주신다는데 그 정도는 보답을 해야겠지!
대공님의 따스한 숨결을 선 보수로 받은 셈치고 휘진은 퀘스트를 받아 들였다.
◈ ◈ ◈
고민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휘진은 화가를 추적하기로 했다.
이제 슬슬 이곳에서 멋진 활약을 벌일 때도 되었다.
대공의 인생샷들이 큰 힘이 되었다. 모델로 선 대공의 모습들을 핸드폰에 고이 모셔둔 것이다.
“그럼 추측을 해보자.”
대공님이 괜히 귀머거리 화가의 뒤를 캐라는 의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정보는 3가지.
하나, 휫센 상단에서 대공님의 요구에 따라 귀머거리의 화가를 제공했다.
둘, 휫센 상단은 대공님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북해의 최대 상단이다.
셋, 대공님은 귀머거리 화가의 장애 여부에 의문을 품고 있다.
아마도 대공과 상단의 관계는 마냥 우호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일시적으로 협력한 조력자 정도의 관계 일 것이다.
휫센 상단에서 귀머거리라고 대공님을 속이고 화가를 소개한 이유가 있다면?
쉽게 말하면 스파이를 보낸 것이다.
요 3개월 간 많은 정보 들이 화가의 귀에 들어가고 그대로 휫센 상단으로 전해졌다면 이정도로 좋은 스파이는 없으리라.
두 번째 가정은 휫센 상단의 의도와는 다르게 제 3세력이 화가를 휫센 상단을 통해 침투 시킨 경우.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목표는 정보의 수집으로 매 한가지다.
결국 화가의 장애 여부를 밝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누가 화가를 보냈는지는 어차피 화가가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가설들이다.
가도를 따라 거르며 티가 나지 않게 화가의 뒤를 쫓는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는지 뒤도 보지 않고 바쁜 걸음으로 나아가는 할아범. 금방이라도 인파에 파묻혀 사라졌기 때문에 틈틈이 시간을 멈춰가며 뒤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