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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29화 (29/154)

29화 메이드 교육하기(1)

“먼저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킨 점 사과드립니다. 저희 측 불찰로 슈슈 양이 휘진 경의 관계자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 말이죠. 슈슈 양에게는 그간의 무례를 사과드리는 충분한 보상을 보내드렸습니다.”

휫센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실책을 인정하면서도 말이 급해지거나 스스로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다.

여유에서 묻어나오는 품격과 행동, 동작에서 저절로 불러일으키는 호감은 예상을 아득히 뛰어 넘는다. 왜 이 남자가 중책을 지고 대공님께 인정을 받는지 알 것 같았다.

“휘진 경께서 불량배들을 선처해 주셔서 약소한 부상만으로 끝냈다지만, 그럼에도 송구스러운 마음이 앞서 제가 따로 징계를 했습니다.”

대공님 밑으로 들어간 지 3일 정도 밖에 안 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정중하고 상세하게 설명할 것까지 있나 싶어 얼떨떨했다.

휘진이 무어라 대답을 하기 전에 휫센은 품속의 나무 상자를 꺼내었다.

“…!?”

말할 주도권을 모조리 휫센 쪽이 잡고 있는 느낌이다. 언제 어떤 타이밍에 말을 꺼내야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지 알고 있는 능숙한 대화법이다.

“으엑…”

휫센의 품속에서 나온 나무 상자에는 다수의 새끼손가락 들이 담겨 있었다. 대략 20개 남짓.

어제 때려눕힌 불량배의 숫자와 얼추 비슷하다.

그렇다면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징계가 아닌가 싶다. 어차피 어제 휘진이 몸소 응분의 대가를 치러주었다. 솔직히 이런 아스트랄한 사죄의 선물은 쇼크였다.

도대체 어떤 반응을 하면 좋을까? 손가락을 주어서 기쁘다고 눈을 빛내야 하는 건가.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지만 일처리는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베아트레아 대공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석연치 않으니까요.”

사람 손가락이 저렇게 우수수 담긴 나무 상자를 닫으며 휫센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 확실히 판타지이다.

더불어 확실히 장사치이다.

휘진과의 트러블이 그와 대공님과의 관계에 어느 정도나 영향을 끼칠지는 알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서 수하들의 손가락을 자르다니…

만일 휘진이 정말 분기탱천해서 휫센에게 따지려 들었다 해도 저 손가락들을 보면 화낼 타이밍을 잃었을 것이다.

같은 자리에 앉은 지 3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휫센의 용의주도함과 노련함 그리고 이 사람이 철저한 완벽주의자라는 것을 벌써부터 깨달은 느낌이 든다.

마냥 사람 좋은 행색을 하고 있지만 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도.

“대공님도 참 별일이시군요. 수하를 받아들이고 본성에 들인 것은 근 일 년 동안 처음 있는 일입니다.”

“저도 제가 왜 거기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듣기로는 경의 가공할 만한 무력에 감탄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사실무근인데요.”

대공님 측과 휫센 쪽에 어떤 커넥션으로 연락이 오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까지, 게다가 그 이유까지 알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 사람도 꽤나 대공님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으레 상인이란 정보에 큰 가치를 부여하니 그것만 따로 처리하는 부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전투에 전혀 재능이 없는 제가 보기에도 부지깽이하나로 나름 힘 좀 쓴다는 사내 17명을 큰 부상도 없이 때려눕히는 것 자체가 경이롭습니다.”

“큰 부상이 없던 건 우연의 일치입니다. 그냥 사정없이 후렸는데 걔네가 좀 단단했던 거죠.”

진심이었는데 농담으로 들은 것인지 휫센이 웃음을 지었다.

◈          ◈          ◈

상쾌한 아침이 밝았다.

어제 하루에 걸쳐 온몸에 쌓였던 피로는 과연 8시간의 숙면 정도로는 충분히 해소되지 못할 정도의 양이었나 보다. 눈을 뜬 지금도 첩첩히 누적된 피로감이 머리통을 울리는 느낌이다.

“담배도 다 떨어졌네.”

품에 남은 마지막 한 대를 입에 물며 휘진은 비몽사몽중의 각성 담배를 음미했다.

어디서든 사면 될 거다. 이김에 금연도 나쁘진 않겠지.

모처럼 좋은 능력을 갖게 되었는데 장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피며 창가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이고 있자니 슈슈 생각이 났다.

오늘 아침도 오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아직은 아픈 걸까.

사람을 간병해 본적은 별로 없지만 어제의 슈슈는 참말로 뜨거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귀찮아져서 대충 옷을 걸치고 아리스의 방으로 향했다.

“아리스 좋은 아침!”

스스로를 각성시키기 위해서라도 하이 텐션을 가장하며 벌컥 하고 아리스의 방문을 열어 재낀다.

“?!?!?!”

“좋아 이런 러브 코미디 같은 전개를 원했어.”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것은 브래지어만 차고 막 레깅스를 입고 있는 아리스였다.

폭신폭신한 느낌이 나는 하늘색과 흰 색의 조화가 절묘한 상하의 세트의 속옷이다.

레깅스는 검은 색.

외관보다는 실용성에 신경을 쓴 것인지 두꺼워 안이 전혀 비치지 않지만 아직 양쪽 모두 허벅지를 넘기지 않은 채 종아리 쪽에서 머물고 있다. 즉, 팬티가 전부 보인다.

“으…!”

아리스의 얼굴이 점차 붉어지더니 이내 새빨갛게 물들었다.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흰 빛이어서인지 혈색이 붉어지고 창백해지는 것이 아주 잘 보인다.

레깅스의 끝자락을 잡은 상태로, 한 발로 엉거주춤 서 있던 아리스는 갑작스러운 이벤트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침몰했다.

콰당하는 호쾌한 소리와 함께 온갖 물건이 문 쪽으로 날아왔다.

“나가!!! 당장 나가세요!!!”

“아, 미안 미안~ 옷 갈아입고 있을 줄은 몰랐지.”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이대로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          ◈          ◈

“대체 남녀 간의 도리에 대한 교육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미안 내가 온 곳은 그런 게 별로 없걸랑.”

10분 정도 후 나온 아리스는 갑옷 대신 예복이라고 불러 마땅할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덤으로 무단 주거 침입에 대한 벌로는 따귀를 한 대 맞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며 얼굴을 붉힌 채로 씩씩 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예의상 맞아 주었다.

“만약 당신이 조금만 방에 일찍 들어와 더한 것을 봐 버렸다면 사생결단을 냈을 겁니다.”

그래도 지금은 머리에 열이 가신 것인지 다시 흰 빛으로 돌아온 두 뺨을 퉁퉁 불리며 볼맨 소리를 하고 있다.

뭐 겨우 속옷만으로 이러는 것도 곤란한데. 이미 더한것도 많이 봐온 사이다.

일방적으로 본거지만.

“근데 어디 가는 거야?”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아침 식사입니다. 본래 대로라면 시종을 시켜 방으로 들여오겠지만… 오늘은 많이 바쁠 날이어서 직접 가려고 합니다.”

“뭔가 일이 있는 건가?”

아리스는 휘진의 반응에 아차 싶어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오늘부터 3일간 전 북부의 영주들과 성주들이 슈펜하우저 성에 모여 연회를 갖습니다. 매년 푸른 달이 뜨는 날이 연회의 시작일이죠.”

귀족들의 연회라… 뭔가 판타지하면 생각나는 나름 로망을 가득 담긴 이벤트이다.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북부는 원래 제국의 손이 닿기 힘들기 때문에 독자적인 체제 하에 각기 자치적인 통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공님이 그 모두를 하나로 묶어 내기 전에는 말이다.

“요컨대 유대 강화와 감시가 목적이란 말이죠.”

“확실히 매년 얼굴 볼 테니까 불러낸다고 하면 딴 맘먹긴 쉽지 않겠네.”

“말은 연회이지만 온갖 권모술수와 딴 생각을 품은 검은 너구리들이 가득한 전쟁터랍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절머리를 내는 아리스를 따라 어느새 요리사들이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식당에 도착했다.

아리스가 등장하자 모든 작업을 멈추고 고개를 조아리는 요리사들.

아리스는 손을 흔들어 그들의 인사에 화답한 뒤 주방 안으로 들어가 몇 가지 먹을 음식을 접시에 받아왔다.

“아침은 가능한 먹어두는 편이 건강에 좋습니다.”

“난 입이 텁텁해서 별로라고.”

“그럼 여기 이쪽에 피클을 먼저 드세요. 적당한 산미는 침샘을 자극해 입맛을 돋우니까요.”

토종 한국 입맛을 가진 휘진에게 아침부터 느끼한 음식은 거북했다.

샐러드와 잘게 잘려있는 닭 껍질을 와인에 졸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요리를 빵 사이에 껴서 한 입에 물었다.

찐득한 닭기름의 풍미와 지방에 샐러드의 산뜻한 맛이 그나마 빵의 퍽퍽함을 잡아주어 먹을 만 했다.

“그럼 너는 연회 기간 동안 경비라도 서는 건가?”

휘진처럼 샌드위치를 만들어 한껏 입에 베어 문 아리스. 입가를 오물조물 하는 게 귀엽다. 아침인데도 한 점의 흐트러짐 없이 빛나 마치 보석 같다.

어젯밤 아리스가 본의 아니게 보였던 추태와 겹쳐 생각하면 뭔가 뱃속이 뜨뜻해진다.

“아니요, 저는 대공님의 옆에서 호위와 시중을 겸합니다. 당신은 연회에 참석해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나 다른 문제가 생기거든 제게 일러주세요.”

“뭐? 나도 일해야 돼?”

“당연하죠, 식객이라고 스스로를 자처하신다면 지금이야 말로 당신이 일할 때입니다. 심심치 않게 서로 전쟁을 거듭했던 영지들도 있어서. 기사들끼리의 다툼이 없으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갑자기 일거리가 떨어졌다.

시간을 멈출 수 있으니 싸움 말리는 거야 쉽지만 업무를 가지고 연회에 임해야 한다는 건 부담되는 일이다.

뭔가 사건이 생기면 독박이잖아?

하지만 거부할 명목이 없기에 무언으로 수긍했다.

“그럼 타타라는 그 동안 뭐해?”

“타타라 씨는… 이런 귀찮은 일에는 일찌감치 떨어져 계시는 분인지라…”

“귀찮은 일이라는 자각은 있구나.”

“가식적인 웃음이나 서로의 심중을 헤아리는 눈치싸움 따위. 타타라 님이 눈길을 두지 않으시는 이유는 짐작이 갑니다.”

좋은 위정자는 드물다.

정치인을 얼마든지 견제할 수 있는 현대에도 그랬다. 봉건 사회 내에서 귀족이란 지위를 가진 영주 혹은 성주들이 부리는 횡포는 그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결벽마저 갖고 있는 듯한 아리스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휘진 정도의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이 봐도 거북할 테니까.

“오늘도 시종을 위해 병문안을 나서실 생각입니까?”

“어? 알고 있었네?”

“그렇게까지 일을 벌이면 모를 수가 없죠. 고작 하루 된 인연을 위해 병문안까지 가다니… 당신의 가치관을 잘 모르겠습니다.”

“타타라가 그러더라. 사람이 가까워지는데 시간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일단은 동의하도록 하죠.”

평온하고 아무 일 없던 식사를 끝내고 아리스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휘진은 슈슈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만일 상태가 괜찮다면 아침봉사를 받으러갈 요량이다.

◈          ◈          ◈

“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힘겨운 몸을 이끌고 나선 슈슈는 경악했다.

한 순간의 변덕이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휘진이 오늘도 과자 상자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야.”

“저…그…”

두 번이나 자신의 병문안을 온 주인에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슈슈의 어깨를 감싸고 휘진은 마치 제집인양 들어갔다.

방금까지 잠을 자고 있던 것인지 아직 잠기운이 덜 가신 듯 해롱해롱 풀린 눈동자. 마치 비녀를 꽂으려는 듯한, 쪽으로 만 둥글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삐쭉거리며 잔머리가 솟아있다.

슈슈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방에 휘진을 앉혀 놓은 채로 차를 끓여왔다.

비록 성에 있는 만큼 고급스런 차도 아니거니와 밀크티를 만들 우유조차 없지만 그래도 구색은 갖췄다.

“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슈슈는 약간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로 휘진에게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편해 보이는 파자마 자락이 가슴과 떨어지며 앙증맞은 가슴이 틈새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이스 앵글이다.

“아니야~ 나야 뭐 나 때문에 아픈 것 같아서. 마음에 무거움이 있으면 슈슈를 맘껏 괴롭힐 수 없으니까 자기만족 할 뿐이지.”

“우웃… 짓궂으세요.”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너스레를 떨자 슈슈는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정돈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상대가 호의를 베풀었기에 더욱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된 슈슈는 휘진과의 관계정립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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