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대작(1)
잠을 자고 일어났다.
장소는 시트가 잔뜩 찢어진 침대 위.
폭풍의 시간이 흘러가고 피로감에 타타라와 함께 시트가 찢어진 침대위에 몸을 눕힌 뒤 3분 만에 잠들어 버렸다.
부지런하지 않던 사람이 부지런하게 살았을 땐 그 만큼의 반동이 있는 법이다.
이대로 침대와 하나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멀리하고 휘진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둡다.
잠시만 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밤이 되어 버린 모양이다.
타타라의 애널은 정기 뿐 아니라 영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쫀득거려서 체력을 모두 소진했다.
같이 잠들었던 타타라는 없다.
대신 테이블 위에 꼬부랑한 글씨로 써진 쪽지가 있다. 굉장히 기품 있고 절도 있는 필체.
아무래도 타타라가 남겨 놓은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쪽 글을 읽지 못한다.
“흐음…”
잠자기 직전까지 추가분의 섹스를 졸라대는 타타라에게 시달려야 했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지 아니면 너무 과격하게 흥분을 한 것인지 한 발 만으로도 체력이 모두 소진되어서 만약 타타라의 그 쫄깃해 보이는 육립에 거시기를 넣었다면 지금쯤 복상사했을 테지.
지금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흐으음…”
허나 눈앞에 보이는 타타라의 벗어놓은 팬티를 모른 척 지나치는 것 또한 도리가 아닌 듯싶다.
아까 섹스 때 입었던 것을 그대로 벗어 놓은 모양이다.
검은 색 레이스에 꽃무늬로 자수가 놓인 씨스루 팬티.
타타라의 보지와 맞붙어있던 곳엔 애액이 잔뜩 묻었던 흔적이 보인다.
이런 팬티를 보고 그냥 지나친다는 것은 아무래도 신사로서 실격이다.
“흐으으으으음….”
비록 전혀 성관계가 아니라지만 사랑의 흔적, 페르몬 그 자체가 묻어 있는데다 여자의 가장 은밀한 신체와 달라붙었던 직물.
이것을 사용해 딸딸이를 치는 것은 사실 성관계에 가장 가까운 유사성행위가 아닐까.
그래서 휘진은 타타라의 팬티를 거시기에 감싸고 그대로 한발 싸 주었다.
뭐 이런 걸로 화내진 않겠지.
◈ ◈ ◈
게임에 비유하자면 HP가 10% 미만인 상태로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란 남자는 분위기를 타면 정도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단점이란 말이지…”
머릿속으로는 이거까지 한발 빼면 빈사라고 생각을 하더라도 정작 행동은 정 반대로 하는 것이 문제다.
이런 점에서는 전혀 자제력이 없을지도 모른다.
방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려던 찰나 누군가 앞을 가로막았다.
그 어떤 인기척도 기색도 느끼지 못했다.
역시나 휘진에게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못할 판타지 최약체일지도 모른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이 인왕의 자세로 버티고 서있는 노인.
흰 장갑에 단안경과 잘빠진 양복을 입고 근엄한 자태가 심히 판타지스럽다.
노인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인상이 강렬하다.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불똥이 튈 것 같고 양복 너머로도 잘 단련된 근육이 엿보였다.
게다가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기다란 흉터는 어딘가의 맹장으로 보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집사장 바티스텡 이라고 합니다. 베아트레아 대공님의 명을 받들어 모시러 왔습니다.”
중후한 중저음의 음성은 노후한 기색 없이 두껍고 울림이 좋다. 뭔가 남자로서 압도되는 느낌이다.
도대체 어딜 봐서 집사장이라는 거지?
여기 집사장의 주 업무가 북진정벌인가요.
어쨌거나 대공님이 만나고 싶다는데 휘진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조심스럽게 앞서가는 할아버지를 쫓아서 룰루랄라 뒤를 따랐다.
집사에게 가장 중요시되는 덕목이 침묵이라는 고리타분한 규범을 아주 잘 따르고 계신가보다.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10분이 넘는 거리를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성의 가장 중심부이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방이었다.
휘진의 방이 3층이라면 여기는 8층 쯤 된다.
“대공저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게.”
나무 문 사이로 목소리가 들리고 휘진은 바티스텡이 열어준 문틈으로 들어갔다.
이 야심한 밤에 이 몸을 찾으시다니 대공님께서 밤이 외롭기라도 하신건가?
일말의 기대감을 하고 들어갔을 때 보이는 것은 기대 이상의 눈 호강이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네.”
대공님은 순흑의 네글리제를 입고 계셨다.
북해의 다른 옷들처럼 아주 겹겹이 얇은 천을 쌓은 옷이지만 워낙에 얇은 천들인 탓에 대공님의 배라던가, 허벅지 아래 라인이라든가 살결이 은은한 촛불을 받아 비쳤다.
물론 주요 부위 같은 곳에는 천을 두껍게 덧대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게 되어있지만. 섹시한 배꼽 같은 걸 내놓으신다면 너무 감사하다.
“침대의 천개를 두르신 것 같은 패션이네요.”
오랜만에 보는 대공님의 모습이 반가워 은근히 남심을 자극하는 잠옷을 샅샅이 훑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정작 대공과 눈이 마주친 휘진은 제대로 눈길을 주지도 못했다.
그래서 의미 없는 말로 뻘쭘함을 표현했다.
설마 이거 사랑이란 건가.
“그렇게 어려워 할 것 없네, 가릴 곳은 전부 가렸으니.”
대공은 네글리제의 자락을 살짝 들어 보이며 휘진을 향해 소탈하게 웃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반달처럼 예쁘게 휘어진 눈 아래로는 건강한 홍조가 떠 올라있다.
“언제나 그런 패션으로 자는 거야?”
“밤늦게 손님을 맞아서 말이네.
순간적으로 당황해 존댓말이 나왔지만 간신히 제정신 부여잡고 원래대로 말했다.
그런데 밤손님?
말이 잘 이어지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야심한 밤에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라면 좀 더 공적인 옷차림을 차리는 것이 대공의 품격에 맞지 않을까?
불쑥 치미는 불안감에 입을 다물고 있자 먼저 말을 걸어오는 대공.
“어째서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인가? 그저 미인계를 적당히 활용했을 뿐인 것이네만.”
“대공님의 몸에 한 터럭만큼이라도 손을 댄 놈팡이가 있으면 지옥까지 쫓아가 불살라 버릴 테니 알려줘.”
진심이다.
감히 대공님의 몸에 손을 대는 놈이 있다니 그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놈팡이가 있으면 내가 먼저 목을 칠 것이니 걱정 말게나.”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없었던 듯싶지만 동시에 광역 딜을 맞아 버렸다. 대공님, 대공님 앞에 예비 사형수가 있사옵니다.
대공님은 침대에서 일어나 바로 옆에 테이블에 슬쩍 몸을 기대었다.
살짝 취기가 돈 듯 몽환적으로 풀린 두 눈동자가 요정의 것처럼 반짝인다.
“받게.”
대공님은 비어있던 와인 잔에 붉은 색의 와인을 채우고는 건네주었다.
일단 와인 병에는 절반 정도 밖에 와인이 남아 있지 않았다.
거기에 이렇게나 술기운과 시너지를 내는 매혹적인 분위기를 내고 있는걸 보니 아마 먼저 한 잔 걸치고 있으셨던 모양이다.
“잠깐 술친구가 필요했네.”
“그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와인 잔을 주는 대공님과 손이 살짝 맞닿았을 뿐인데도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짜릿함을 느꼈다.
이런 미인과 살결이 닿는다니.
그것도 그녀의 방안에서 술잔을 들고.
설마 벌써부터 각이 뜬 건가 두근 두근 했다.
벽에 걸린 시계마저 떡각 떡각 흘러가는 듯하다.
휘진은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고 와서 대공님의 앞에 앉은 뒤 호쾌하게 와인을 원 샷 했다.
도저히 술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맛있다고 생각했다.
씁쓰레한 알콜의 향을 향긋한 포도향이 흔적도 없이 잡아준다.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술을 대라면 주저 없이 이 이름 모를 포도주를 말할 것이다.
“누구랑 만난거야?”
“엠버 카친이라는 사내네. 이 몸이 오기 전까지 북해의 3대 맹주 중 하나였던 프로로븐의 성주였지. 예전에 그의 조력이 필요해 3번이나 찾아갔지만 문전박대 당했었네.”
대공님은 쓴 웃음을 지으며 비어있는 내 잔에 술을 마저 채워주신다.
“그런데 밤에 찾는다고 하자마자 바로 승낙하더군. 몸이 목적이었겠지.”
“대공님은 보석보다 아름다우니까. 그렇게 수작을 부릴 만도 하지.”
“후후, 이제 3년이 지나 위치가 완전히 바뀌었군. 애가 탈거야. 주 생산 수단인 철광인 고갈되고 있는데다가 뜻하지 않은 종전으로 필요 없어진 쇳덩이만 잔뜩 떠안았으니.”
“으응, 으응. 대공님은 그런 나쁜 성주를 쪽쪽 빨아먹기만 하면 된 거라고.”
대공님이 북해의 변경백과 대공이라는 허울뿐인 직위를 얻고 슈펜하우저 성에 들어왔을 때. 북해는 이미 루블 왕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실질적으로 3개의 가문으로 분할되어 통치되고 있었다.
기묘한 경쟁구도와 연달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북해의 세 맹주들을 협상의 테이블에 올리고 의견을 조율하며 막대한 이익을 얻어간 것이 북해 통치의 첫걸음이었다.
대공님은 역사서의 한 장면 같은 이야기를 설명해 주셨다.
이런 건 그다지 궁금하지 않는데…
그래도 앞으로 대공님의 밑에서 일하는데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 같기에 경청했다.
“그럼 대공님 설마 성주랑…같이 잤던 건 아니지?”
“날 음해하는 세력들은 그 사건을 일컬어 두고두고 ‘가랑이를 벌려 성사시키는 계약’이라고 하더군. 하지만 사실 무근이네. 그렇게 다리를 벌리는 것만으로 일이 해결되었다면 내가 그렇게 고생했을 이유도 없겠지.”
휘진이었더라면 대공님과 폭풍 섹스에 영토고 이권이고 전부 팔아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실제로 만약 대공이 아무런 준비 없이 어설픈 유혹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으면 몸은 몸대로 더럽히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리라.
말하자면 밤에 만나자고 부탁한 것은 상대를 협상으로 유도하기 위한 미끼였던 셈이다.
“따라서 아직 순결한 몸이라네. 이 몸의 순결은 비싼 값에 팔릴 테니 아껴두는 편이 좋지.”
와인 잔의 모서리를 섬세한 손끝으로 매만지는 대공님의 표정은 어딘가 쓸쓸했고 애수로 가득했다.
대공님이 어떤 사정으로 어떻게 대공이라는 칭호를 얻고 이 자리까지 올라오게 되었는지는 전부 설명 듣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없지만.
지금 보는 저 표정은 의지할 곳이 필요한 나이 그대로의 쓸쓸한 소녀의 표정이었다.
휘진은 당장 대공을 안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강제로 억제한다.
지금 안아버리면 그림 이상해지는 건 뻔하다. 분위기 타서 와락 안고 ‘힘들었지?’라는 대사도 쳤는데 ‘왜 이러니? 너 눈치 없는 애 아니잖아’라며 거절당하면 마음의 상처는 영구불변의 흉터로 남을 것이다.
솔직히 힘들어 하는 여자 위로해주는 경험은 영화와 애니를 기반으로 한 뇌 내 망상 밖에 없는 휘진인 터라 멋쩍게 술잔을 홀짝이는 수밖에 없었다.
“난 뭐가 됐던 대공님 편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이 정도 어설픈 말 정도라면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을 법한데. 대공님은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기쁜 듯한 표정을 지어주었다.
“그대도 내 몸을 원하는 건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 영롱하게 빛나는 무지개 후광이 보이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며 대공님은 쓱 하고 옆머리를 귓가 뒤로 넘겼다.
이거 유혹하는 건가.
대공님의 사슴 같은 목덜미가 드러나고 안 그래도 방어도가 낮은 네글리제의 앞부분이 벌어지며 아랫배가 살짝쿵 드러났다.
“대공님을 원하지 않을 남자는 이 세상에 없을 걸? 나빼고는.”
거짓으로 가득한 뻔뻔한 대꾸에 대공님은 휘진을 만나서 처음으로 간지럼 타는 표정으로 웃었다.
술의 힘이란 정말 대단하다. 그 위엄 넘치는 대공님의 표정이나 말투, 행동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완고함이 아닌, 가볍게 불어도 넘어질 것 같은 가냘픔으로 일렁인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 같았다면 식상한 비유가 되려나.
“가끔씩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설정을 파괴하는 대사가 나왔다. 언제나 ‘하게체’를 쓰던 대공님이 혼잣말로 쓸쓸한 소녀 같은 대사를 한다.
어쩌면 지금까지 과장스러울 정도의 말투 역시 대공님을 감싸던 갑옷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엇, 조심해.”
와인 잔을 들고 몸을 일으키던 대공님이 술기운 탓인지 휘청하며 다시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