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가정 방문(3)
이 상황에서 구원자랍시고 등장한 사람이 못된 성범죄자라서 놀란 건가.
생각해보니 휘진도 슈슈를 핍박하는 가해자중 하나였지.
이렇게 생각하니 뭔가 좀 씁쓸하다.
그나마 안면이 있고 힘이 있는(그녀가 아는 한) 사람이 등장해서인지 슈슈의 창백했던 얼굴에 안도감이 깃들었다.
반면 깡패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저렇게 비리비리 해 보이는 남자 하나를 믿고 저런 표정을 짓다니. 꼬락서니를 보기엔 그저 펜대나 굴리는 공무원이나 장사치 같다.
본때를 보여 주려고 문 근처에 서 있던 깡패가 성큼 성큼 다가섰다.
“어이, 형씨 피 보기 싫으면 꺼지슈?”
그게 그가 마지막으로 휘진과 나눌 수 있었던 대화였다.
마룻바닥이 쪼개졌나 싶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깡패 A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힌 것이다.
휘진이 어느새 짧은 머리카락을 잡고 마룻바닥에 얼굴을 꽂아버린 것이다.
깡패A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자세로 이미 정신이 잃은 깡패의 머리를 들어서 두어 번 더 바닥에 쾅쾅 내리 찍었다.
이가 몽땅 부러지고 입술이 터져버린 것인지 코피가 나는 것인지 바닥이 흥건하게 피로 물들었다.
슈슈도, 깡패 B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순간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낯선 방문객에게 주먹을 꽂아 넣으려던 동료가 눈 한번 깜빡하지 않은 사이에 바닥에 피칠 갑을 하며 누워있는 것이다.
“거 대가리 겁나게 무겁네.”
휘진은 깡패 A의 머리를 들어 눈이 돌아가고 흉하게 짓이겨져 더욱 험악한 인상이 되어버린 모습을 확인하고는 툭 바닥에 놓았다.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뒷골목을 구르며 살아온 인생에서 습득한 경종이 머릿속을 울렸다.
저 사람이랑 싸우면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그래도 깡패한테는 깡패 나름대로의 자존심이 있다. 채무자 앞에서 형편없이 찌그러지는 모습을 보였다간 앞으로 빚을 받아 내는 것도 차질이 생겨버릴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감추며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고 위협한다.
“우…우리가 어디 소속인지는 알아?”
마치 사자 앞에서 으름장 놓는 생쥐를 보는 심정으로 휘진은 조용히 깡패 B를 노려보며 말했다.
“넌 내가 누군지 알아?”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여유롭게 대답하는 휘진.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 있는데 저런 시정잡배한테 질 리 없다.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박력과 자신감에 깡패 B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주춤주춤 슈슈를 놓고는 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건 자존심 챙길 일이 아니다.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야.”
도망치려는 깡패의 뒷덜미를 잡고 바닥에 내던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깡패는 바닥에 누워 땡깡 부리는 개새끼마냥 호들갑을 떨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돈 받아 가야지.”
“아, 넵넵 그럽죠.”
휘진의 말에 깡패 B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운이 나빠서 깽 값도 못 받고 얻어맞을 줄 알았는데 때리지도 않고 돈까지 대신 갚아 준다면 감지덕지다. 친구가 맞기는 했지만 자신이 맞은 건 아니니 말이다.
휘진은 돈이 든 주머니에서 은화 한 장을 깡패 B의 가슴팍에 던졌다.
“잉?”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깡패를 향해 휘진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빚 다 받았지?”
“예?”
“백금화 두 개 모두 상환했으니 된 거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깡패는 뭐 씹은 표정이 되면서 분을 삭였다. 어차피 화낸다고 대화가 될 상대도 아닌 것 같다.
깡패 되고 나서 삥을 뜯겨본 건 처음이겠지.
“니 친구 챙겨서 썩 꺼져.”
저런 무리를 상대할 때 필요한 것은 대화나 이해시키려는 자세가 아닌 순수한 힘의 증명임을 알고 있기에 일은 일사 천리였다.
실은 위기에 빠진 역할을 멋지게 구하고 대사도 멋지게 쳐보고 싶었다.
그래서 타이밍 재다가 급박한 상황에 들어갔잖아.
깡패는 황급히 동료를 일으켜 업고는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슈슈 괜찮아?”
“휘진님…”
깡패가 동료와 함께 퇴장한 이후 휘진은 많이 놀랐을 슈슈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저희 집엔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송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슈슈. 집을 찾아온 것도, 이렇게 좋은 타이밍에 등장하게 된 것도 전부 의외일 것이다.
“슈슈가 아프다고 들어서 병문안 온 거야.”
병문안이라 슈슈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다.
귀족 휘진이 평민이자 시종인 자신의 병문안을 위해서 몸소 집을 찾는다?
적어도 슈슈가 아는 한 들어본 전례 없는 일이다.
하지만 휘진의 손에 들린 과자 상자를 보면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의 집을 들를 때는 빈손으로 가는 게 아니라는 나름의 신조에 따라 오는 길에 제과점에 들러 먹을 만한 간식거리들을 사왔다.
사치품으로 분류되는 것인지 조그마한 상자 두 개에 은화 한 개라는 비정상적인 가격을 지불했다.
그래도 슈슈가 좋아하기만 한다면 딱히 아까울 돈은 아니었지만. 직접 번 돈도 아니고 노동을 대가로 받은 돈도 아니다.
“감사합니다.”
휘진이 과자 상자를 건네자 슈슈는 꾸벅하고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아직은 얼떨떨하고 당황스러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헷갈렸다.
“저 녀석들은 뭐야?”
“아, 돈을 빌려주셨던 분들인데…”
그 뒤로도 말을 듣자하니 예상대로 고리대금업자인 모양이다. 세상물정 모르는 슈슈에게 돈을 빌려준다며 접근해 몸이라도 얻을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미안하지만 이쪽이 한발 빨랐다.
그래도 그렇지 선이자를 3분의 1이나 처먹고 3일에 3할의 이자라… 양아치 놈들이다.
“그럼 일단 안쪽으로 앗…”
주인님을 문 쪽에 오래 세워두는 것도 결례라고 생각한 슈슈가 휘진을 집 안으로 완전히 들이려던 찰나 휘청하고 몸이 흔들렸다.
휘진은 팔을 뻗어 무너지려는 그녀의 자세를 잡아주었다.
몸이 뜨겁다. 어찌나 열이 심하게 나는지 그저 근처에 있는 것뿐인데도 이글거리는 열기가 느껴지는 듯 했다.
“흠, 그럼 일단은 병간호를 해줘야겠는걸.”
휘진으로서는 드물게도 타산 없이 힘이 들어 보이는 슈슈가 딱해서 결심한 순수한 선의였다.
생각해보면 정말 기구한 팔자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하층민으로 태어나, 양친조차 없고 유일한 혈육인 동생마저 앓아 누워있다.
게다가 약값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다가, 나이도 어린데 여기저기 빚이 있고… 결정적으로 휘진에게 걸려버렸다.
이쯤 되면 운명의 여신이 시련을 주기로 작정한 것이 아닐까 싶은 일대기다.
어제처럼 슈슈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올렸다. 열 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운 슈슈는 제대로 된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축 늘어져 휘진에게 달라붙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힘이 빠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네 방은 어디야?”
집은 생각보다 좋다. 방이 2개나 있다는 건 예상외였으니까.
천막까지는 아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통나무 집 정도 예상했건만 이 근방의 집값이 싼 걸까?
휘진은 슈슈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흠, 일단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하긴 했다만 이렇게 저항도 못할 여자 아이를 침대에 눕혀 놓고 나니까 번뇌에 시달리게 된다.
달뜬 숨을 내몰아쉬며 초점이 조금 흐려진 눈에 조그맣게 눈물방울을 맺은 채 침대에 누운 이 순간에도 꼭 하고 휘진의 소매를 붙잡고 있다.
이거 지금 유혹하는 건가?
“동생한테도 인사를 하면 좋겠는 걸?”
“동생은…지금 약을 먹어서…”
듣자하니 동생은 희귀병 약을 먹으면 적어도 3시간 정도는 의식도 완전히 끊겨버린 채로 잠에 빠진다고 한다. 슈슈도 슈슈지만 고생하는 누나를 보면서 슬퍼할 남동생도 참 안타깝다.
“기다려봐 약을 좀 사 올 테니까.”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으셔도 되요.”
생각해보니 감기약이 있는지도 모르고 파는 곳도 모른다.
일단은 슈슈를 일단 눈을 붙이게 한 뒤 거실 구석에 있는 거대한 나무통에서 물을 길러 수건을 적셔왔다.
열을 내리는 데는 이게 직빵이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이상의 치료법은 없었다.
다시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슈슈는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자고 싶으면 자라고까지 말을 했는데 굳이 기다리고 있는걸 보면 귀엽긴 하다.
아까 만난 메이드 양처럼 소쇄함과 거리가 있지만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메이드가 아닐까 싶다.
“일단은 푹 쉬어.”
“감사합니다…휘진님.”
아마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몇 번이나 손사래를 칠 녀석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절할 힘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응석을 부리고 싶은 것인지 가만히 받아들인다.
뭐 마음 같아서는 옷을 전부 벗긴 다음에 땀을 닦는 것도 해주고는 싶다만… 그런 짓을 해버리면 부끄러워 열이 더 올라버릴 지도 몰라서 관두기로 했다.
“그래 어제는 나 때문에 고생했으니 오늘만이라도 편히 쉬어라.”
“휘진님은… 이상한 분이에요.”
“그렇지 뭐.”
휘진은 손수건을 꽉 짜서 대충이나마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주고 슈슈의 머리맡에 앉았다.
이기적이고 타산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어딘가 무서운…
지금까지 휘진에 대한 슈슈의 판단엔 좋은 어감의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억지로 처녀를 빼앗긴데다가 ‘성 처리 메이드, 정액 변기, 좆물 받이, 걸레, 중고보지’ 등등. 태어나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무수히 많은 음어로 농락을 당하고 그의 허리 아래 깔려 허덕거렸던 것이다.
나름대로 정갈한 성의식을 갖고 있는 슈슈에게 마구 심한 짓을 한 휘진에게 다음날이 되어 이렇게 발랄한 간호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제도 섹스가 끝난 뒤에는 조금은 상냥해 지긴 했지만 욕조에서조차 시도 때도 없이 몸을 더듬으려 했으니 말이다.
“휘진님은… 정말 이상한 분이세요. 하지만 나쁜 분은 아닌 것 같아요.”
평소라면 하지도 못할 말들이 열에 들뜬 때문인지 몽롱하게 필터를 뚫고 나온다.
자그맣게 색색 거리며 잠이 든 슈슈를 보고 휘진은 하품을 했다.
잠을 자는 걸 보니 졸리다.
하지만 애초에 볼 일이란 게 병문안이었다. 슈슈가 생각보다 상태가 영 안 좋아서 야한 짓을 하는 것도 무리니 손에 백금화 두 장을 쥐어주고 나왔다.
일단 이거면 급한 빚은 해결하고 당분간 남동생 약값 걱정도 없어질 거다.
원래 병이라는 게 몸보다는 마음의 근심이 없어야 빨리 낫는 법이다.
슈슈의 집에서 나오자 어쩐지 부산스럽다.
“저…저 녀석입니다.”
슈슈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듯 어깨 깡패들, 정확히 17명이 각목이나 칼 같은 것들을 들고 있다.
옆에는 아까 친구를 엎고 도망갔던 깡패가 손가락질로 이쪽을 가리키고 있다.
아까 겪어보고도 쪽수로 어떻게든 해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휘진은 다시 슈슈의 집 안에 잠깐 들어가서 길고 단단한 것을 손에 집히는 대로 집어왔다.
벽난로 옆에 세워져있던 부지깽이다.
도망가려 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마구잡이로 달려들려던 깡패들이 다시 문을 열고 나온 휘진의 모습에 주춤했다.
일단 한 놈도 빠짐없이 바닥에 때려눕히기로 결정했다.
예상보다 더 용서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였던 모양이다.
“대가리 딱 대. 새끼들아.”
참고로 부지깽이의 손맛은 매우 매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