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19화 (19/154)

19화 가정 방문(2)

“메이드가 원래 출퇴근제야?”

휘진의 얄팍한 지식으로 따지자면 성이나 저택에 고용된 사용인은 저택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일하는 것이다. 그런데 판타지는 다른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메이드 양이 대답했다.

“슈슈는 가정 사정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어제는 남동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슈슈의 말에 당연하게 성 내에서 방을 얻어서 같이 살고 있다고 넘겨짚었다. 실상은 따로 집을 얻어서 함께 살고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몸이 아프다니…

병문안이라도 가는 게 좋을까?

만약 감기라도 걸렸다면 100% 휘진의 책임이다.

머리에 밀크티를 뒤집어 쓴 채 제대로 씻지도 말리지도 않고, 안 그래도 서늘한 방 안에서 폭풍의 섹스를 하며 체력을 모두 소진 했다. 게다가 목욕이 끝나자마자 이 추운 공기를 해쳐가며 집에 돌아가다가 감기에 걸렸다면 빼박이다.

조그마한 양심 통을 느낀다.

“저기, 메이드 양. 병문안이라도 가려고 하는데 슈슈 양의 집 위치 좀 알려주겠어?”

오늘 하루의 일과를 병문안으로 시작하기 전에 휘진은 먼저 어딘가 들리기로 했다.

◈          ◈          ◈

“좋은 아침.”

아직 안내를 받지도 않은 제 1 연구실로 갈지, 타타라의 집으로 갈지를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갈등조차 귀찮아 원래 알고 있던 타타라의 집으로 향했다.

‘없으면 말고’라고 생각한 방문이지만 상황 좋게도 타타라는 연구에 몰두 중이었다.

어제 보았던 똑같은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한 채, 그리고 어제와 비슷해 보이는 연구 소재들을 가지고.

‘이쪽만 시간이 멈춰진 채 풀리지 않았던가?’휘진이 잠시 그런 생각을 할 정도다.

밤도 꼴딱 새고 이 시간까지 한 가지를 붙잡고 있는 분위기다.

타타라가 다소 경박해 보이지만 그래도 천재 중의 천재인 게 분명하다. 집중력이 무서울 정도이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휘진의 등장에 타타라는 3중으로 렌즈가 달린 보안경을 벗고 환영했다.

“좋은 아침! 아침이라기엔 너무 늦었지만.”

밤을 샜을 텐데도 한 점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 피로의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게 아신이라는 건가, 휘진은 조금 감탄했다. 하지만 익숙하지도 않은 아신이라는 칭호가 이제 와서 가슴 깊게 다가올 리가 없다.

그냥 타타타 타타라는 타타타 타타라다. 예쁘지만 역시 무서운 여자.

독사와 같은 위험함이라기보다는 언제 튀어 오를지 모르는 통 아저씨 같은 위험함을 갖고 있는 변덕쟁이.

“어제 잠깐 연구소에 들렀었지? 핸드폰이 없어져서 조금 놀랐어.”

“아아, 급한 일이 있어서 양해는 못 구했수다.”

“설마 연구에 몰두하는 나한테 귀두에 키스를 시키는 파렴치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반대 손으로는 가슴을 푹푹 찌른다. 손톱 때문에 아프다.

역시 벌써 봤구먼,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라고 했던가. 고양이로 태어났다면 3일을 못 가 죽어버릴 녀석이다.

“그래, 찌푸린 채 집중하는 이마에 불알을 한번 얹어 봤었어.”

“우아아… 역시 상상도 못할 취향이네. 그래서 기분은?”

“…사실 안했어.”

나름 머리 굴려서 제일 싫어할 것 같은 걸 골라 말해줬는데도 눈 하나 깜빡 안하는 거 보소. 심지어 아쉬운 표정도 짓는다.

어제 보았을 때 조금 가라앉아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텐션이 높은 여자다. 아신이 되면 언제나 두개골 안쪽에서 엔도르핀이 분비 되는 걸까.

잡담을 거두고 휘진은 자신이 이곳에 온 원래 목적을 말했다.

“혹시 피임약 같은 것도 만들 수 있는 건가?”

“응 여기.”

갑작스러운 부탁이라 하기 뭐할 정도로 어마 무시한 속도로 품속에서 알약을 꺼낸다.

총알 모양처럼 생긴 하얀 약이 유리병 안에 여러 개 담겨 있었다.

뭐냐 이 준비성은.

“어제 메이드 아이를 데리고 장난 쳤잖아? 슬슬 필요해 할 것 같아서 챙겨놨어. 좌약식으로 된 살정제야.”

그 정도로 행동이 읽히기 쉬운 사람이었던가. 원하는 바를 쉽고 빠르게 손에 넣은 것은 감사할 일이지만 이 정도로 간파당하고 있다는 건 조금 무섭다.

생각해보니 타타라 씨는 천재인데다가 경험까지 많이 쌓은 어쩌면 현자 레벨의 인물이다. 동등한 잣대에서 사고를 예측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모른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있자니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피임약을 주고는 질내사정 한 생식기 안에 투입하면 된다는 말까지 아무렇지 않게 한다.

덤으로 어제의 능욕 영상이 담긴 핸드폰을 자연스럽게 수거해간다.

[크큭, 슈슈 네 꼴을 봐. 돈을 다리를 벌리는 창녀 짓을 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억지로 당한다고 말은 해도 이렇게 음란한 꼴로 얼굴에 애액이 튈 때까지 쾌락을 느끼는 꼴을 말이야.]

마치 오래 전부터 사용했던 것처럼 핸드폰을 조작한 타타라가 대충 동영상 스크롤을 넘기자 연구실에 쩌렁 쩌렁하도록 어제의 대사가 울린다.

에로 망가체로 얘기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부끄럽다.

아무리 변태인 휘진이지만 맨 정신으로 저런 자신의 대사를 듣는 건 거북한 일이다.

타타라는 잠깐 동영상을 멈추고 깔깔거리며 신나게 웃었다.

“뭐야, 이런 취향도 있었던 거야? 언제나 음침하게 ‘킁킁, 이건 타타라의 팬티…’같은 대사나 할 줄 알았는데.”

“시끄럽네. 그리고 네 팬티 따위 관심 없어.”

물론 거짓말이다. 타타라의 팬티라면 매우매우 관심이 깊게 간다. 마스크 안에 팬티를 넣어 둔 채 하루 종일 냄새를 맡으며 생활할 수 있을 정도다.

괜한 허세를 부리는 것은 계속해서 놀림 당하는 것에 대한 조그마한 반항이었다.

아무래도 지배당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니 말이다.

“주인님, 타타라는 이제… 주인님한테 강제로 범해지는 건가요?”

어느 샌가 가련한 목소리와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몸을 살짝 비튼 채 힘없이 말하는 타타라.

흘러내린 연보라색의 머리카락이 요염하게 입가를 가로지른다.

이게 연륜이라는 건가. 그저 연기일 뿐인데도 심장이 순간 요동칠 만큼이나 요염하고, 괴롭히고 싶다. 지금 당장 옷을 찢어발기고 커다란 엉덩이를 보면서 뒤치기를 하고 싶어졌다.

덤으로 엉덩이를 팡팡 때려가면서. 저 새하얀 피부라면 손자국이 아주 잘 남을 듯싶다.

“그럼 이런 게 좋아?”

“물러가라, 요망한 것.”

결국 놀림을 받을 뿐인 건가. 코 한 번 잘못 꿰인 죄로 시간정지 능력을 가졌음에도 장난감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눈물 날 일이다.

아신만 아니었다면 지금 휘진의 아래에서 가장 처참하게 당하고 있는 것은 타타라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 포기한 것도 아니다. 언젠가 굴복시켜서 진짜 이마에 불알을 얹어주지.

타타라는 휘진의 반응에 하이소프라노 톤의 유쾌한 웃음을 짓고는 핸드폰을 일단 덮었다.

어차피 다 볼 거니 큰 차이점은 없겠다만 적어도 면전에서 풀 영상을 보는 건 자제해 줬으면 싶다.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나와 뜨거운 정오의 성관계를 하는 거 어때?”

“티타임 갖자는 말투와 문맥에서 말하지 말아줄래? 내 섬세하고 센티멘털한 동심에 큰 낙담을 주거든?”

“유흥거리라는 점에서 다를 거 없잖아? 남녀가 함께하면 좋다는 것도 같네.”

섹스를 유흥거리로 보는 건가…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정말 흥미가 동하는 제안이지만 일단은 슈슈의 병문안이 우선이다.

타타라의 욕구에 맞춰서 섹스를 했다간 아마도 병문안 일정은 가볍게 잊어버리거나 기억한다고 해도 체력이 없어서 못갈 것 같으니 말이다.

“유감이지만, 지금은 일이 있어서.”

“야한 짓 말고도 당신한테 일이 있어?”

“너도 참 사람 우습게 취급하는 구나.”

문제는 항상 정곡을 찌른다는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마음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잠깐 정도는 괜찮지 않아? 끝에만 조금 넣을게 조금만.”

어느새 입에 가득 고인 침을 츄릅 삼키는 소리를 내며 타타라가 또 집착한다. 눈에 아른 거리는 하트 모양을 보니 이상한 부분에서 트리거를 당겨버린 듯하다.

자꾸 휘진 벨트의 여유분을 당기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려하고 있다.

“오늘 밤에 찾아 올 테니 기다리쇼.”

벗겨지려는 바지를 필사적으로 수호한 채 휘진은 다급하게 연구실을 뛰쳐나왔다.

◈          ◈          ◈

메이드 양이 적어준 설명을 바탕으로 쪽지의 도움을 받으며 도착한 곳은 허름한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의 구석이었다. 그래도 들은 것보다는 잘 사는 것인지 제법 구색이 갖춰진 집이다.

“흠, 그러니까 파란 지붕이라는 얘긴데.”

나름 계획적으로 구성된 단지인지 집이 열에 따라 다른 색의 지붕으로 칠해져 있다. 주소와 명패에 적힌 이름만 알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는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휘진은 이곳의 문자를 읽을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수십 개의 집을 전부 뒤져봐야 할 처지에 놓였다.

난감한 상황이다. 명색이 귀족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데 쪽팔리게 메이드한테 글자를 읽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냥 온 것이 천추의 한이다.

설마 방문 판매원처럼 일일이 돌아봐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한지 1분도 되지 않아. 모든 걱정이 해소 되었다.

“돈이 있으면 갚아야 할 것 아니야!”

“없으면 몸이라도 팔라고!”

“이건 동생 약값이에요, 제발 놓아주세요!!!”

나란히 놓인 집 중 하나에서 두 남자의 고함소리와 소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슈슈의 목소리였다.

호기심이 동해서 마당을 통해 들어가 문 앞에 서서 대화를 엿들었다.

쿵쾅 거리는 소리와 물건들이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어…어떻게, 은화 20장을 빌린 것이 열흘 만에 백금화 2장이 되는 거죠?”

나약한 모습을 보일 줄만 알았던 슈슈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저항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시끄러워! 계약 사항에 그렇게 되었잖아! 나머지 분은 오늘 안에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갚으라고!”

“우리는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 선이자 10개를 떼고 3일에 3할 씩 이자를 붙이기로 했잖아! 오늘 안에 돈을 못주면 집창촌에 넘겨 버릴 줄 알아!”

“그…그런 큰돈을 어떻게 오늘 안에…”

“그럼 지금 당장 따라와!”

“꺄악!!!”

뭐 대충 이런 대화가 오가는 모양이다.

휘진은 문을 열고 슈슈의 집으로 들어섰다.

덩치 큰 두 명의 남자중 한 명은 슈슈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이끌고 있었고, 슈슈는 저항을 해보지만 속절없이 질질 끌려가던 중이었다.

어제 내려서 정리했던 머리카락은 오늘은 전부 묶어 동그랗게 뒤통수에 정리해 놓은 헤어스타일이다.

슈슈 양의 사슴 같은 목덜미가 강조되는 매우 어울리는 스타일이다.

“자자, 그쯤 합시다.”

“넌 뭐야?”

문 열리는 소리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 두 명의 불량배 남자 둘이 꼴에 위협을 한답시고 어깨를 으스댔다.

“휘…휘진 님?”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는 슈슈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