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메이드 맛보기(3)
참으로 강렬하고도 뜨거운 아침의 각성이었다. 권력이란 좋은 것이다. 갑 질의 기쁨에 흠뻑 젖은 휘진이다.
그대로 두면 감기에 걸릴 게 뻔했기에 슈슈를 대충 씻기고 옷까지 챙겨 입혀 일단은 침대에 눕혀 놓았다. 그리고 휘진은 옷을 차려 입고 방문을 나섰다.
“쉬고 싶을 때까지 얼마든 쉬어.”
그가 나갈 때 슈슈는 비몽사몽중이어서 제대로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진심이었으니 나름의 의리는 지켰다고 생각한다.
휘진은 대공님과 아리스에게 절제되었된 성욕을 앞으로는 마음껏 슈슈에게 풀기로 다짐했다.
슈슈가 들었더라면 울음을 터뜨릴지 모르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남의 일까지 신경 써 줄만큼 대인배는 아니니까.
바로 옆이라지만 서로의 집무실이 붙어 있는 대칭 구조이기 때문에 아리스의 침실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이 정도라면 욕실에서의 유희도 들키지 않았을 것이리라 믿는다.
휘진은 아리스의 방문 앞에 있는 종을 흔들었다.
“들어오게나.”
들려오는 것은 아리스의 목소리가 아닌 대공님의 것이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방에 모여 있는 모든 인물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한 떨기의 수선화 같은 섬세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대공님과 공포의 대상인 타타타 타타라, 마지막으로 침대 위에 누운 자세로 공중 부양을 하고 있는 아리스였다.
아리스는 눈을 지그시 감고 파자마를 수술복 같은 흰 옷으로 갈아입은 채 우웅 거리는 뭔가에 둘러싸여 침대의 30cm 정도 위에서 부유하고 있다.
“집중 중이니 방해는 말게나.”
대공님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불꽃과 같은 일렁임이 허공을 춤추며 아리스의 몸에 출입을 반복한다.
타타라는 안경을 쓴 채 차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다시금 느끼지만 마법이란 굉장히 아스트랄하다. 대체 뭘 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데 물어봐도 되려나…
3분 정도의 기다림 끝에 대공님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리스의 몸은 천천히 침대 위로 내려왔다.
한 3M 정도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던 휘진이 대공님께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개인적인 사정인 만큼 아리스에게 직접 듣게나, 그럼 뒷일은 부탁하네.”
“웅!”
대공님의 말에 씩씩하게 응답한 타타라를 뒤로하고 대공님은‘바빠서 먼저 실례 하겠네’라는 말을 남기고는 휭 하고 떠나가 버렸다.
모처럼 재회여서 설렜는데 한마디 인사이후에 가버리다니.
허나 지금 눈앞 이 상황이 더 궁금한 휘진이었다.
아리스의 눈이 천천히 깜빡이더니 이내 에메랄드 같은, 의지를 지닌 눈동자가 천천히 빛을 찾았다.
“못난 꼴을 보였네요.”
쓴 웃음을 지으며 탈력한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아리스에게선 어제보다 확연히 줄어든 거리가 느껴졌다. 밤의 잠꼬대 흉내와 거짓 연기를 좋을 대로 받아 들여 준 걸까.
“아리스 양, 당분간은 절대 안정이니까 이상한 짓하면 안 돼.”
타타라는 안경을 벗어 흰 가운의 앞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보니 메이드 복 대신, 제대로 된 연구자처럼 가운을 걸치고 있다.
저렇게 보니 역시나 이지적인 아름다움이 넘쳐흐르는 타타라 씨이건만…
방금 거하게 한탕 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제 보았던 타타라의 알몸이 덧씌워지듯 아른거렸다.
독사과라도 맛만 좋으면 전혀 개의치 않는 휘진의 심신이었다.
그의 뜨거운 눈동자를 눈치 챈 것인지 타타라는 조용히 휘진에게 다가왔다.
“어제의 미션은 완수 한 거야?”
“윽, 본인 앞에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그거 내놔.”
척 하고 손을 내미는 타타라에게 반쯤 강제로 핸드폰을 뺏겨버린 휘진이 똥 씹은 표정으로 서있다. 타타라는 가운으로 아리스의 시야를 차단한 상태에서 쓰윽 휘진의 아랫도리를 쓰다듬었다.
“젊은 아이를 좋아하는 건 이해하지만 너무 거칠게는 하지 말라고?”
당황하는 휘진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아리스에게 씽긋 인사를 건넨 타타라 씨는 아리스와 휘진을 단 둘이 남겨두고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타타라에겐 방금 전 옆방에서의 유희를 고스란히 들켜 버린 것 같다. 요괴다 요괴.
◈ ◈ ◈
아리스가 옷을 갈아입는 다며 자리를 비켜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 바람에 휘진 역시 타타라에 이어 문밖으로 나왔다.
몸이 좀 좋지 않았던 걸로 보여 휘진은 아리스에게 휴식을 권했다.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며 호감도를 올리겠다는 속내도 없진 않았으나 그녀의 고집으로 같이 양복을 맞추러 나가기로 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까의 흐트러진 모습이 거짓말 같게도 방문을 나온 아리스의 모습은 멀쩡 그 자체였다. 무슨 원기회복 스위치라도 있는 건가?
분명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은, 기운 빠진 모습이었는데 그사이 원래의 컨디션을 회복한 모양이다.
“오늘은 갑옷이 아니네.”
“네, 오늘과 내일은 휴일이기 때문에…”
플레이트 갑옷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가죽 갑옷 정도는 예상했던 휘진의 생각을 뒤엎고 아리스는 굉장히 캐쥬얼한 룩을 하고 있었다.
뭐 어디까지나 이세계 기준으로 캐쥬얼이지 휘진의 눈엔 코스프레 정도로 보일 뿐이다.
발목까지 오는 치렁치렁한 드레스에 산뜻한 머리장식 목을 둘러 어깨까지 덮는 모피망토까지 과연 어제 보았던 대로 높으신 귀족의 영애 모습이다.
“잘 어울리네.”
“당신에게 칭찬 받으려 차려입은 건 아닙니다만.”
어라 분명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는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먼지를 털어 내듯 쌀쌀 맞은 대꾸뿐이다.
“그래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조금은 미소지어주었지만.
생각해보니 아까 그 대사 아리스 대사 번역기에 돌리면 [당신을 위해 차려 입은 건 아닙니다만. ⇒ 그렇게 말해주다니 정말 기뻐] 정도가 아니었을까.
기나긴 복도와 계단을 지나 해자에 걸쳐있는 다리를 건너자 성 주변, 어제 체포당했던 가도에 도착했다.
뒤이어 휘진이 가장 큰 쇼크를 받은 모습은 하늘 위로 두둥실 떠다니는 배들이었다. 마치 하늘 위에 대양을 깔아 놓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돛을 펴고 하늘을 부유한다.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착실히 움직이는 게 과연 판타지의 마법에 경탄을 날리게 했다.
“공선(空船)은 처음 보시나요? 북해 무역의 중점인 베아트레아 령인 만큼 특히나 많이 보시게 될 겁니다.”
놀란 채로 굳어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는 휘진에게 넌지시 설명을 해주는 아리스.
자세히 보니 철판이 배에 덧대어져 있는 철갑선이다. 상업의 용도로 자연스럽게 떠다닐 정도라면 제법 기술력을 보유한 판타지인 것 같다.
비행선처럼 적절한 고도를 확보해 비행하는 것인지, 공중에 떠 있는데도 엄청나게 크고 자세하게 보였다.
배 위로는 선원들이 줄을 당기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하고 있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
휘진이 그 그림자에 한참 동안이나 갇혀 있을 정도로 낮게 떠다닌다. 그 와중에 움직임이 굉장히 느긋해서 위용이 느껴진다.
휘진의 방은 온통 반대편의 설원과 성곽으로만 펼쳐져 있었기에 여태 이런 모습을 전혀 감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몇 차례 보고나니 질리기 마련이다.
굳이 말하자면 저런 공선은 비행선이라는 형태로 이미 지구상에 존재했다가 없어진 존재 아닌가? 그것도 비행기라는 압도적인 유용성을 가진 문명의 이기에 밀려 말이다.
이미 우주에까지 팔을 뻗치는 지구의 거주자였던 그가 저 정도의 원시 과학에 놀랄 필욘 없는 것이다.
아리스는 휘진에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여러 가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예상외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네? 나 첩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었어?”
“대공 저하의 명이 시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첩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악한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어제의 잠꼬대가 나름의 효과가 있던 것일까.
마치 기사도란 단어를 사람으로 의인화한 것 같은 느낌의 아리스에게 동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는 휘진의 연기가 제법 큰 가산점을 얻은 모양이었다.
“가끔 정말 이상한 연극 같은 말투로 말하시긴 하지만요.”
“여기선 그게 표준 아니었어?”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굉장히 부끄럽다.
아리스든 타타라든 대공님이든 오바 떨어대는 말투를 보면서 비웃음을 참고 있었던 것인가.
지켜보던 아리스가 푸훗하고 입가를 가린 채 웃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외의 모습이었다.
멋이나 부려보자고 막질렀던 혼신의 연기가 이 정도의 효과를 거둘 줄이야… 역시 뻘짓도 퀄리티 있게 하고 볼 일이다.
“저기 아리스 양…”
“아리스 경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도 당신을 휘진 경이라고 부를 테니까요.”
금세 돌아온 경계에 잠시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당연하다. 만난 시간으로 치자면 하루밖에 안됐는걸.
어제 이 시간 쯤 그녀의 태도를 생각해보면 장족의 발전이다.
“그럼 아리스 경. 왜 그렇게 갑자기 친근해진 거야? 나 뭔가 한 기억은 없는데. 설마 어제 때린 일 때문이면 억지로 그렇게 할 필요 없어. 그건 99% 타타라의 잘못이었으니까.”
조금 더 원활한 조작을 위해서 바람을 잡았지만 아리스는 잠꼬대를 엿들은 것에 대해서도, 휘진이 이마에 키스를 한 것에 대해서도 언급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도리어 예상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질문으로 답해온다.
“휘진 경은 타타라 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계신가요?”
“겨우 하루 정도 밖에 안 된 인연이라 정확하게는 모르겠어. 굳이 설명하자면 어딘가 머리가 이상한 여자지.”
굉장히 똑똑해 보이기는 한다만, 용의주도하고 철두철미하고 음흉한데다가 음란하기 그지없다.
메드 사이언티스트 캐릭터들을 한 데 모아 바짝 졸이면 나올 것 같은 캐릭터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무서운 여자다.
“타타라 님은 아신(亞神)입니다.”
“아신이 뭔데?”
아무것도 모르는 휘진의 모습이 익숙해 진 것인지 아리스는 설명을 시작했다.
아신이란, 신에 가장 근접한 인간.
필멸자(必滅者)의 굴레를 벗어나 불멸자(不滅者)의 반열에 들어선 초인을 뜻한다고 한다.
어느 분야에서 특출 난,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는 하늘이 내린 시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모두 해결했을 때 늙지도, 각종 병으로 죽지도 않는 몸을 얻게 된다. 이른바 ‘신에게 가장 근접한 초인’이 되는 것이다.
어떤 아신은 인간의 무리에 섞여 살기도 하고, 누군가는 국가의 중책에 앉거나 왕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대로 종적을 감춰버리거나, 누군가는 특정 지역의 신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이건 또 참신한 설정이다.
“그 여자. 내가 아는 신과는 굉장히 대척점에 있는 듯한 인상인데.”
“…뭐 어딘가에는 방종의 신도 필요한 거겠죠.”
아리스도 순순히 동의하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신이 되기 위해서 인성 같은 것은 검사받지 않는 모양이다.
더불어 신성 같은 것도.
“그럼 타타라는 몇 살인거야? 오래 살았어?”
“타타라 씨는 ‘삼계를 가로지르는 푸른 강의 마녀’로 400 년 전 메호메드 왕국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삼계를 가로지르는 푸른 강, 그리고 마녀.
어제 계약을 했을 때 타타라가 읊었던 말들이다.
그나저나 400 년 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