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여신 타타타 타타라(3)
“어딜 가셨던 겁니까?”
더럽게 넓은데다가 외적이 침입해 있을 때를 대비해서인지 성 내부는 무척 복잡했다.
성 내부에 표지판이라도 달아둬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솔직히 어지간한 방들은 문도 다 똑같이 생겼고…
한참 길을 헤매고 있던 중 구원자를 만났다.
밤이 깊어 잘 준비를 끝낸 것인지 촛대를 들고 서 있는 아리스는 잠옷으로 보이는 새하얀 드레스 차림에 망토 하나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묶었던 머리는 풀어 놓았는데 결이 좋고 보기도 좋은 금발이 방금 샤워를 끝내고 말린 것인지 찰랑 찰랑 윤기가 흐른다. 샴푸 광고 모델 급이다.
겨우 묶었던 머리를 풀어 내리고 사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것뿐인데도 완전히 인상이 달라졌다. 어딘가 높으신 귀족님이 애지중지하는 따님이라도 믿을 정도다.
“아 타타라한테 붙잡혀서 여러 가지 실험을 당하고 왔어.”
무려 두 가지의 약물에 절여졌었다.
타타라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아리스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 이름만으로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지?
“괜찮으십니까?”
의외로 굉장히 상냥하게 물어봐주었다. 엄격한 모양새로 올라갔던 눈썹이 조금 쳐진다. 위로 올려다보는 표정이 은근 강아지 상이다. 사람의 옷과 머리가 만들어낸 분위기라는 것이 이렇게나 진실에 다다르는 것을 막고 있던 것인가.
과거 어딘가의 고승이 스스로의 눈을 파내어 버린 것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인간의 시각이란 어찌나 덧없는가…
“완전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 밤늦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늦은 시간까지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 같아서 그 상황에 알맞은 대사를 쳐봤다.
이런 거 좀 로망이었어.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조금 풀렸던 아리스의 눈썹이 다시 올라갔다.
“당신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성 내를 순찰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잠옷차림으로?”
“….”
아리스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니 아차 싶었는지 말을 돌렸다.
“대…대공님의 부탁으로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뿐이니 어서 들어가서 취침하시죠.”
뭐야뭐야뭐야뭐야 귀엽잖아.
대공이 이제 와서 감시를 부탁할리 없고 사실은 그냥 걱정되었던 것뿐인가.
가슴이 뿌듯하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감시 대상이 사라져 버린 게 불안해서 일수도 있지만 그래도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는 것은 기쁜 일이다.
“뭐…뭡니까 그 표정.”
너무 기뻐져서 광대가 제멋대로 승천한다. 표정을 감추는 건 어렵구먼.
“아리스 아니 아리. 너의 마음 그런 식으로 감추려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 쿠헉!!!”
“후욱!!!후욱!!!”
능글거리는 휘진의 명치에 아리스의 주먹이 명중했다. 힘을 준 것은 아니지만 명치라는 데는 몸 중앙에 있는 3대 급소이다. 숨이 턱 막히면서 눈앞이 노래졌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때릴 겁니다!”
이 여자 주먹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말을 하는 타입인가. 그건 데이터에 없었다.
그보다 이미 때린 거 같은데. 설마 이 강철의 기사님에게 이 정도는 타격조차 아닌 건가?
호흡 곤란 오고 있는데.
어쨌든 강한 척을 하는 휘진이었기에 이 정도의 타격엔 아무런 영향이 없는 듯이 행동해야 했다.
일단 쉼 호흡을 하고 태연하게 말한다.
“하하, 겨우 농담가지고우우우웩!!!”
정신을 차리니 서서 토를 하고 있었다. 안녕 오늘의 만찬들아.
아득해져가는 정신 오늘 벌써 세 번째의 기절인가.
‘한 번도 안 해본 걸 하루에 세 번이나 하다니’라는 생각을 끝으로 정신 줄이 끊겼다.
◈ ◈ ◈
그대로 그 자리에서 잠들어버릴 줄 알았건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 추운 성내의 복도에서 얼어붙은 토사물 옆에 쓸쓸히 굳은 시체로 같이 발견될 각오도 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방의 최고급 침대에 누워있었고 옆에는 아리스가 목제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것이다.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서 용케도 균형을 잃지 않고 잠을 자는 아리스. 거기서 휘진은 장난을 좀 쳐보기로 했다.
“으윽…”
이런 거해보고 싶었다. 잠꼬대로 어두운 과거를 암시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
예상대로 완전히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는지 아리스 쪽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 졸음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것인지 비몽사몽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확실히 해야 할 부분은 짚고 넘어가려는 것이 아리스답다.
그리고 휘진의 매소드 연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여기는… 나에게 맡기고 도망쳐…”
의아해하는 아리스의 얼굴이 이쪽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 난 죽어도 상관없어… 너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난 살아갈 이유가… 없어…부탁이야 너라도 살아줘…”
오졌다.
완전히 몰입된 연기 지그시 감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힐 정도로 완벽한 연기였다.
이정도면 좀 멋진 캐릭터로 각인이 박히지 않을까?
아리스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나 잠꼬대를 또박또박 발음하는데 아리스는 그다지 의심하는 것 같지 않다.
얼굴 근처에서 손길이 느껴졌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아리스가 닦아준 것이다.
이건 또 예상 밖인데.
그리고 살짝 이지만 차가워진 손을 잡아준다.
겉으로는 무정해 보여도 역시 속은 따뜻한 마음이 가득 찬 소녀인 것이다!
좀 더 아리스와 손 잡고 있는 순간을 더 만끽할까도 싶었지만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일단 요즘 밀고 있는 ‘신속의 휘진’은 강하다는 설정이니까. 잠을 자고 있어도 얼추 기척을 느껴야한다.
설정에 충실 하는 거 어렵구먼.
“누구냐.”
아리스는 내가 몸을 일으키려하자마자 손을 황급히 놓고 자는 시늉을 했다.
눈이 파르르 떨린다고 이 아가씨야.
게다가 손을 갈 곳을 잃고 어색하게 파자마 자락을 잡고 있다. 저런 자세로 자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어설픈 연기라면 누구라도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점수를 따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휘진은 그윽한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뭐야, 꿈인가?”
조용히 한숨을 쉰다.
“아직도… 이런 꿈을 꾸는군…”
자신의 대사에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기분이 된 휘진.
하지만 이세계 사람들의 감수성은 대충 파악했다. 현실에서야 영화에서나 볼법한 대사들이 이세계에서는 현실적인 것이다.
휘진은 이제야 발견한 것처럼 아리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살짝 실눈을 뜨고 있던 아리스가 황급히 다시 눈을 감는다. 어설프다 어설퍼. 아마도 손을 잡았던 게 뻘쭘해서 자는 척을 하려다가 일어날 타이밍을 못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아리스.”
한없이 경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어두운 과거를 숨기고 있는 멋진 남자 주인공이 앞으로 휘진의 컨셉이다.
“넌… 그녀를 닮았어.”
아리스가 움찔한다.
여기서 그녀는 아까 그 지키겠다는 여자를 암시한다. 아리스도 좀 진중해진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더더욱 깨어나는 척하는 타이밍을 못 재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 강한 척 하기만 하는 녀석이었지. 누구보다 착했지만 실은 누구보다 약한 녀석.”
그럴 듯한 대사를 하며 아리스에게 가까이 가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너에겐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토했는데 입안도 개운하고 옷도 깨끗하고 냄새도 안 난다. 무슨 조치를 취하거나 한 거겠지.
아리스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었다. 정말 생각보다 훨씬 가볍다. 제대로 밥도 안 먹고 있는 것인지… 이런 체구로 그렇게나 강한 척을 하는 것일까 생각하니 정말로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휘진은 아리스를 바로 옆 그녀의 방으로 데려갔다. 방 구조는 거의 흡사하다. 단지 방 전체에서 훨씬 좋은 냄새가 나는 것뿐이다.
아까 샤워를 끝낸 욕실에서 은은하게 좋은 향기가 품어져 나오나 보다.
아리스를 침대에 눕힌 휘진은 침대에 그녀를 내려다 놓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휴대폰을 챙겨서 잽싸게 시간을 멈췄다. 아리스의 침실에 있는 옷장에 숨어들기 위해서였다.
거리는 1M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아리스의 표정이나 그런 것들이 자세히 보인다. 그리고 시간정지를 해제했다.
아리스는 휘진이 완전히 나간 기척을 확인한 것인지 휴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킨다.
“도대체… 알 수 없어요.”
아리스는 잘 들리지 않게 중얼거리며 아까 그가 입을 맞추었던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쓸었다. 굉장히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옷장안의 아리스의 옷에서는 굉장히 좋은 냄새가 난다. 허락만 해준다면 여기를 숙소로 하고 싶다.
한동안 뒤척이던 아리스는 참아왔던 피곤이 몰려왔던 것인지 금세 색색 소리를 내며 잠에 빠졌다.
옷장 안에서 아리스의 속옷 냄새를 맡고 있던 휘진은 그녀가 잠든 것을 대충 확인했다.
아리스가 입던 속옷도 아니고 별다른 체취는 나지 않는다. 섬유 유연제의 향기와 새 옷의 냄새만 났을 뿐이다.
조금은 실망하려던 찰나 타이밍 좋게 아리스가 잠에 빠져 들어 주었기 때문에 휘진은 옷장 안에서 기어 나왔다.
시간을 멈추지 않고 옷장 안에 숨어 있던 것은 혹시 자위를 할지도 모르는 아리스를 기다리던 것이지만 그런 야겜 이벤트 같은 장면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상은 생각한 것만큼 녹록치 않은 법이다.
시간을 정지하는 능력을 얻은 뒤로 잠시 망각했던 혹독한 현실의 벽을 다시금 느낀 휘진.
오랫동안 쭈그린 자세로 앉아있었기에 쥐가 날 것 같은 감각을 스트레칭으로 해소해 준 뒤 새근새근 잠에 빠진 아리스를 내려 보았다.
모든 대화와 친밀감의 상승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야한 장난을 치는 것보다. 면식이 있는 상대에게 하는 것이 더 꼴리는 법이다.
에로스의 정도는 친밀도에 비례한다. 시험에 나올 테니 밑줄을 쳐두도록.
쉽게 말해서 생판 모르는 일본 AV배우는 그냥 AV이지만 조금이라도 면식이 있던 고등학교 동창이 원정녀 시리즈를 냈다면 그건 아마도 인생작이 될 것이다. 아님 말고.
아리스는 옆으로 몸을 뉘어 자는 타입이었다. 도저히 검을 휘두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가느다란 손가락은 머리 옆에 가지런하다. 베개 위로는 금발이 이리저리 흩어져 묘한 색정을 자아냈다.
이렇게 한 결 같이 에로를 추구하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타타라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오로지 흑심 일색.
너무나도 일색이어서 흑심인데도 새하얄 정도로 순수하다.
그저 시간을 멈추는 것보다도 잠을 자고 있는 상대에게 이런 저런 장난을 치는 것에는 스릴이라는 보너스가 붙는다.
걸릴 것 같다면 언제든지 시간을 멈추고 도망치면 된다. 여차하면 옷장으로 도망친 뒤 그 뒤를 이어해도 좋겠지.
휘진은 일단 모든 옷가지를 내려놓고 태어난 그대로의 알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