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5)
휘진은 아리스의 속이 훤히 보여 쩝 입맛을 다셨다.
‘남의 눈을 피해 매운 맛을 보여 주겠다?’
이런 건 정직한 사람이나 생각할 법한 정직한 모술이었다.
휘진이었다면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가 뒤통수를 때리고 싸움을 시작했을 것이다.
실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일 수도 있겠다만 그 판단은 치명적인 실수이다.
생전 처음 연습용 검을 손에 쥔 채 아리스와 마주본다.
“먼저 충고 하나 하지. 나랑 싸우려는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아.”
중2병 같은 대사, 언젠가 한번은 써먹어보고 싶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세계에서는 남자의 로망 넘치는 단어를 육성으로 쓰더라도 오글거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꼬리를 말고 도망치겠다는 겁니까? 순순히 보내드리지요. 다시는 대공님 앞에 모습을 들어 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아리스 같은 캐릭터가 단순히 자신의 주인 옆에 또 다른 심복이 생긴다는 것만으로 질투를 하고 견제를 할 것 같진 않다.
그녀는 순수하게 휘진이 가진 변수와 불확실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주인과 수하의 성향이 정반대라는 것은 상호보완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대공님은 불확실성을 즐기는 타입으로 보이니 말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널 위해서야. 난 네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강하니까.”
사실이긴 하지만 입 밖으로 내보내려는 순간 심리적인 거부감이 앞섰다.
차라리 조금 더 자아도취가 잘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걸하고 생각했다.
농담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아리스는 매서운 눈동자를 한 순간도 거두지 않는다.
경비병에게 머리를 밟혀 기절하던 사람이 고작 2시간 만에 기세등등해져서 기어오른다면 우습겠지.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걸 이용해 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네가 이기면 나는 순순히 대공님 앞에서 물러난다. 그렇다면 내가 이기면 난 무엇을 얻지?”
거기서 아리스는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이긴다는 것을 확신 한 상태에서 그 부분까지는 생각해두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부분은 맹하구나.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뭐를?”
“어떤 것이든 저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신다면 손이 닿는 한도 내에서 무엇이든 제공해 드리죠.”
일명 소원하나 들어주겠다는 말이겠지. 나쁘지 않은 소득이다. 그건 그렇고 어지간히 승리에 대해 자신이 있는 모양이다.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었음에도 망설임 없이 소원을 걸었다.
“그럼 갑니다!”
후욱 하고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한다. 연무장에 옅게 깔려있던 눈꽃들이 아리스를 중심으로 일제히 휘날린다.
얄팍한 지식을 통해 보았을 땐 마력이거나 하겠지. 저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판타지에서나 보던 걸 실제로 보게 되니 나름 신기하다.
아리스는 분수를 모르고 기사의 대련에 응한 남자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줄 작정이다.
그러나 저 정도로 호언장담하는 이상 숨겨진 한 수 정도는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휘진의 움직임에서 조금도 시선을 때지 않은 채 아리스는 검을 들고 아래서 위로 베는 참격을 시도했다.
단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쇄도하던 아리스의 눈앞에서 휘진의 모습이 사라진다.
“뭣?”
빠른 속도의 물체를 눈동자가 잠깐 놓친다는 정도의 레벨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소멸해 버린 듯, 지금까지 그의 인형이 허깨비였던 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동시에 어깨에 가해지는 둔탁한 충격, 뒤에서 내려치는 일격이었으므로 위력을 흘리지 못한 아리스의 몸이 휘청거렸다.
“어때… 내가 이겼지?”
손속을 봐준 듯, 타격이랄 만한 위력은 전혀 없었지만 어쨌든 저런 속도에 조금만 힘을 실었다고 해도 연습용 검의 여부에 상관없이 몸이 반 토막 났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의 움직임을 순수한 속력의 산물로 본 아리스의 착각이었지만.
그나저나 말도 안 되는 속도이긴 하다.
적당히 빠른 타이밍에 시간을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아리스는 이미 지척에서 검을 휘두르던 중이었던 것이다.
조금 모골이 송연하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아리스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휘진을 바라보았다.
“다…당신.”
“설명이 늦었어, 고향에서는 ‘신속의 휘진’이라고 불렸던 사내이올시다.”
20분 전에 급조한 별명을 두 번이나 말하게 되나니 겸연쩍다.
사실 시간이 멈춰진 상태로 있었던 이들로서는 경악하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건 속도를 넘어선 속도이다.
만약 시간 정지의 피드백이 이 몸에도 가해지게 되었다면 원자만큼 작은 단위로 쪼개지며 대 폭발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 정도의 중량을 가진 물체가 광속으로 움직인 것이니 말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다행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소원하나 획득이다.
“으으…”
인정하기 싫은 사실 때문인지 결국 휘진을 저지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스는 안절부절 못하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거기에 뭐라고 말하기 직전 연무장에 제 3자가 등장했다.
“멋진데?”
“타타라 님.”
아리스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바로 잡았다.
새로 등장한 인물은 이번에도 여자. 무려 메이드 복을 입고 있다.
정통 메이드 복이라기엔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팬티나 가터벨트의 선정적인 끈이 눈에 띤다.
현실 세계에선 존재 하지 않는 연보라색의 머리. 연한 빛이라 보기 좋긴 하지만 여기가 판타지긴 하구나 하는 감회에 다시금 젖는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은 희한하게도 앞머리 부분만 흰색으로 탈색이 되어있다.
머리 위에 얹은 것은 역시나 메이드 전용템인 프릴이 잔뜩 달린 머리장식.
부분적으로 탈색된 머리 쪽이 다른 머리와 섞이지 않게 잡아주고 있는 듯하다.
검은 색의 오버 니삭스는 가터벨트와 연결이 되어있고 허벅지 옆 부분엔 하트 모양의 구멍이 뚫려있다.
“뭐야 뭐야, 방금 그거 멋지잖아!!!”
처음 본 사람에게 대뜸 소리를 지르는 타타라의 연둣빛 눈동자에 하트모양이 떠오르며 반짝 반짝 빛난다. 실제로 그렇다는 건 아니고 느낌상 그렇다는 거다.
“제가 졌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나중에 뵙죠.”
3소절의 문장을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한 뒤 아리스는 쌩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연무장에서 뛰쳐나갔다.
갑자기 조금 무서운데.
“당신 누구야? 방금 그건 뭐야? 아무런 마력도 사용하지 않고 그런 가속과 감속을 적절히 해내다니. 정말 대단했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타타라는 성큼 성큼 휘진에게 다가온다.
‘뭐야 이 언니 눈이 무서운데.’
그야말로 숨이 거칠어 질 정도의 말을 토해내며 타타라는 휘진의 팔을 잡았다.
당장 악의가 느껴지는 건 아니었으므로 손 정도는 잡게 해 주었다만.
이건 뭐랄까.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의 표정이 아닐 런지.
“험험, 자기소개가 늦었네. 미안해 나정도 되는 아신이라도 이렇게 신기한 일을 보면 정신을 잃어서.”
“그럴 수 있어.”
오버 히트된 하이 텐션을 조금 늦춰주기 위해 휘진도 최대한 침착히 낮은 어조로 응대한다.
“내 이름은 타타타 타타라. Dr.타타타라고 불러도 좋아. 작은 마법 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지.”
낮은 목소리는 전혀 효과가 없다.
이 여자 너무 흥분한 거 아닌가. 폴짝 폴짝 기쁘다는 듯이 타타라가 뛰자 보라색 머리가 나풀나풀 거리며 턱을 쳤다.
그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고 이 여자.
“연구소의 소장이라고? 메이드 복인데?”
“아, 이건 취미.”
취미인건가…
취미가 메이드 복을 입는 여자인 건가.
바람직한 취미이다. 그것도 저런 식으로 과장되게 남성의 욕구를 자극하는 메이드 복을 입는 다는 것은 더더욱.
“내 이름은 휘진이야. 대공님의 명을 받들어 당분간 임시 가신으로 지내기로 했어.”
“멋진 이름이야. 훌륭한 네이밍 센스! 곧 완성 예정인 멋진 발명품에 당신의 이름을 붙여도 괜찮을까?”
“저기, 고맙지만 우리 만난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엄청 들이대는 여자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곳곳에 지뢰를 매장한 위험지대라고 가정할 때, 이 여자는 그 간극을 전력질주로 메워 가고 있다.
“어차피 세상을 스쳐간 영겁의 시간에 비하면 우리가 수십 년을 함께하건, 1분을 함께하건 찰나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빨리 친하게 지내자.”
엄청 사심 가득한 것 같은데 그 사심을 숨기려는 의지조차 없는 듯하다.
단정하기 그지없는 얼굴 위로 입맛을 다시고 있다.
간식 본 강아지처럼 사람을 보는 건 그만둬줬으면 한다.
떨떠름하지만 답했다.
“그래.”
“좋아! 그럼 우리 친해졌으니까. 내 연구에 약소하게나마 보탬이 되어주지 않겠어?”
말과 동시에 그녀가 꺼내든 것은 기묘하게 생긴 주사기였다.
양 옆쪽에 손가락을 넣어 고정할 수 있는 홀더가 있다.
안에는 짙은 초록색의 액체가 들어있고. 흥분해서 덜덜 떨리는 손에 조금 눌린 것인지 푸슉 푸슉하고 액체를 발사 중이다.
“음, 연구라고 하면 그걸 내 몸에 꽂는 건가?”
“당연하지!”
“몸에 넣으면 안될 것 같은 색깔인데.”
“괜찮아, 괜찮아! 안전해!”
실린더 안의 액체는 아무리 봐도 인체에 들어가면 안 되는 색감이다.
아까 아리스의 손을 잡고 같이 도주했어야 했다. 매드 사이언스 캐릭터일까?
휘진의 동공이 흔들린다. 예쁜 여자는 좋지만 실험체는 사절이다.
“아프지 않게 할게! 주사 놓는 건 자신이 있어.”
“아 그래? 미안하지만 거절할게.”
“아 왜에에에!!!”
당장이라도 주사를 삽입하고 싶어서인지, 거절의 말이 나오자마자 주먹 쥔 양손을 등 뒤로 놓고 소리를 지른다.
침 튄다고 이 여자야.
이렇게 된 이상 도망이 답이라고 여겨 시간을 멈추고 아리스가 도망간 쪽으로 도망쳤다.
◈ ◈ ◈
“이봐 저 사람 뭐야, 무서워.”
아리스는 그래도 의리가 있었는지 휘진을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연무장이 내려다보이는 층계참에 있었다.
아리스는 갑자기 나타난 휘진에 흠칫한 아리스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휘진의 신출귀몰이 한번은 마술이어도 그 다음부턴 적응이 되는 법이다.
“당신 그래선 안됐습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아리스는 피곤한 듯 아까처럼 휘진의 앞을 살짝 앞서갔다.
“뭐가?”
“첫 번째로는 Dr.타타라 씨와 말을 섞으면 안됐고. 그 다음으로는 그 엄청난 속도를 다시 그녀가 보게 해선 안됐습니다.”
“역시 실험 같은 걸 좋아하는 여자인가?”
“하나에 열광하면 죽을 때까지 파고드는 분이시죠. 당분간 도망 다니세요. 당신이라면 저보다는 수월하겠네요.”
이미 타타라라면 숱하게 겪어본 적이 있는 것인지, 얼굴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리스의 목소리엔 옅게 공포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