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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3화 (3/154)

3화 이세계에 넘어가자 시간정지 능력이 생겼다(3)

묘한 감각과 함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 시간정지를 해체한 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정지에 대해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휘진의 입장에서는 여러 시도를 해보아야 했다. 그리고 시간 정지를 한 동안 신체에 가해진 자극에 대한 부분이 궁금하기도 했다.

“읏!”

“히양!!!”

휘진과 마주보고 있었던 대공님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와 동시에 휘진의 옆쪽에 서 있던 아리스 누님의 다리가 휘청하더니 잔뜩 움츠러 들었다.

오호, 예상대로 시간 정지 이후의 감각들이 한 번에 피드백이 되는 것인가. 휘진은 짐짓 놀란 척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낸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히양! 이라니 신음소리가 귀엽다.

“무슨 일인가?”

대공님의 얼굴을 핥은 것은 기분 나쁜 미풍이 스치고 지나간 정도나 기분 탓 정도로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리스에게 가한 클리 애무는 피드백 될 쾌락의 정도를 충분히 쌓아놨을 것이다.

“아…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리스의 얼굴이 시뻘겋다. 내뱉는 거친 호흡에서는 달콤하기까지 한 색기가 우러나왔다.

두 다리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후들거리고 허벅지를 비비며 다리를 배배꼬기까지 한다.

늠름했던 아리스가 이렇게까지 망가져주다니 충분한 성과이다.

“흠… 그런가? 잠시 바람이나 좀 쐬면서 쉬고 오게. 나는 긴히 이자와 할 말이 있으니 말이네.”

그녀의 몸이 좋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대공님은 상냥한 배려의 말로 아리스를 내보냈다.

아리스는 간신히 몸을 굽혀 인사를 하더니 거의 뛰어가는 듯한 기세로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저대로 방에 가서 폭풍자위를 하지 않으려나. 자위 중에 방안에 숨어들어 엿보기라도 시도할까 생각해봤지만 그만뒀다.

“그럼 앉겠나?”

대공님이 손가락을 치켜들고 허공을 긋자 짤랑하는 소리와 함께 수갑이 후두둑 떨어졌다.

헉, 미친… 마법으로 자른 건가.

판타지라고 예상은 했다만 마법이 섞여 있는 판타지였다.

휘진이 어벙벙 한 표정으로 있자 베아트레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소파 쪽으로 먼저 걸어가 앉았다.

이제야 전신 샷을 알현하게 되는구나. 의상은 과연 대공님이 입을 법한 드레스.

그저 화려하기만 한 게 아니라 위엄과 관록을 도움닫기 시키는 청색과 흰색 그리고 검은 색의 조화가 절묘한 드레스다.

일단 휘진도 시키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수상한 사람이라고 의심했던 사람의 수갑을 친히 풀어주다니… 우리 대공님은 어느 정도 마법 실력에 자신 있는 것일까.

사실 외관이 이렇게 초현실적으로 아름다운데다 어리기까지 하니… 클리셰에 충실하자면 이런 절대미모일수록 강한 캐릭터인 게 판타지의 정석이긴 하다.

그렇다면 갑작스런 성적 흥분을 느낀 아리스가 대공과 휘진, 단둘을 남겨두고 폭풍 자위를 위해 뛰어간 것도 이해가 간다. 뭐, 자위는 실제 할지 안할지 모르지만.

소파에 가서 앉자 어쩐지 배에 찬바람이 분다.

“어머, 실수를 했구나.”

대공님은 입가를 가리며 우아하게 놀라며 휘진의 셔츠의 배 부근에 시선을 돌렸다.

휘진도 시선을 따라가 봤더니 입고 있던 셔츠가 날카로운 면도날로 긁은 듯이 찢겨져 있다.

“섬세한 단위까지는 제대로 조절이 안 되어서 말이다.”

“댁이 여태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무서운 건 아쇼?”

아마도 좀 아까 마법을 쓸 때 셔츠 일부분이 수갑과 함께 잘려나가 버린 모양이다.

조금 섬뜩해졌다.

흥분해서 반말이 나왔지만 역시 대인배인 대공님은 지적조차 않는다.

“피부가 잘리지 않아 천만 다행으로 여기네, 조금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다음부턴 제발 하지 않아줬으면 합니다.”

대인배적인 반응을 보아하니 아까까지 얼굴을 핥아졌다는 것을 알아도 용서해줄 것만 같다. 그래도 이 모든 건 휘진의 가정일 뿐, 사실이 아니면 엿 되기 때문에 조용히 있기로 했다.

원래 주인공은 자신을 숨기는 법이다.

시간 정지 능력을 확신하고 이미 자신이 주인공임을 깨달은 휘진이었다.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대공님은 휘진을 앉혀 둔 채 손수 티 포트와 다과를 가져오셨다.

80도의 적정 온도로 우려낸 얼 그레이를 따라주신다.

이런 일을 시종에게 시켜주지 않고 직접 한다는 건 높으신 사람치곤 본받을 만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는 딱히 할 말이 없습니다만.”

“어색한 존대라면 됐네, 편한대로 말하게나.”

테두리를 금으로 마감 처리한 찻잔을 손가락에 건채 대공님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보다 10살은 넘게 어려보이는 소녀에게 존대를 하는 것이 마뜩찮았다. 대공은 생각보다 노련해서 그 부분을 놓치지 않은 듯싶다.

“그럴까?”

어차피 격의 없으신 대공님이시니 갑자기 이걸로 트집을 잡아서 역정을 내거나 하시진 않겠지.

혹여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든 이 자릴 벗어날 방법이라면 차고도 넘친다.

순순히 말을 놓는 휘진에 차를 들이키던 대공님의 눈이 잠깐 놀란 듯 커졌다.

그나저나 저 조그마한 찻잔이 얼굴 절반을 가려버리다니. 조그마한 체구임에도 키가 커 보였던 것은 비율의 탁월함 때문이었던가 싶어 감탄스럽다.

“갑자기 말 바꾸는 건 아니지?”

“우후후, 참으로 친해지기 쉬운 남자로구나.”

“그러면 안됐던 겁니까? 말 놓으라면서요.”

“아니다, 여태 나에게 편하게 말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 이런 참신함은 여흥이로다.”

확실히 국가와 시대에 따라 다르긴 했지만 ‘대공’이란 칭호는 제후국의 대 제후나, 공작 중에서도 높으신 분에게 붙는 칭호로 기억한다.

외관으론 꼬맹이 정도로 보이는 이 소녀가 짊어지기엔 무거운 이름이랄까.

“근데 몇 살이야?”

사실 겉모습으론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한 없이 어려보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그맣기도 하고,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두르고 다니는 관록 같은 부분은 도저히 말을 놓기 힘들 어른으로 보이기도 한다.

“올해 생일을 지나면 성인이 되네.”

“도저히 그렇겐 안 보이는데.”

좀 뜨악 하는 느낌이었다. 음 이런 말하면 좀 이상한 취급받을 것 같긴 한데 초로리, 중로리, 고로리가 있다면 ‘중로리’ 쯤 되어 보이는 생김새인 것이다.

“소녀 적에 병약하여 여러 병마와 싸우는 통에 키가 클 시간은 나지 않더구나.”

두 번 째로 뜨악한 심정이다. 너무 말을 생각 없이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기껏 호기심하나 채우려고 상처를 헤집었을지도 모르는 입장에선 반응하기 너무나도 애매한 답변이었다.

그런 휘진의 모습에 별거 아니라는 듯이 베아트레아 대공 저하가 구제를 해 주셨다.

“그런 표정 말게나, 지나간 일이고. 작은 몸집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온 기억은 없느니라.”

“미안.”

“따라서 그대를 꼬챙이에 끼워 저잣거리에 세워두거나, 불로 태우거나, 선미에 매달아 죽을 때까지 수영을 시키는 일도 없느니라.”

“죄송합니다!”

방금 혹시 삼도천에서 족욕하는 정도의 일을 저질러 버린 건 아닐까 싶어 새삼 등골이 오싹했다.

일단 소파에서 뛰어 내려와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무릎은 예쁘게 모으고 두 손은 양 머리 옆에 여덟 팔 자를 그리게 가지런히 놓는다. 누가 보더라도 진심이 가득담긴 사죄였다.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살짝 고개를 드니, 뜻밖에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다리를 꼰 채 휘진을 내려다보는 대공님의 미소가 보였다.

팬티는 안 보인다.

계획한 바는 아니지만 우연히 굴러 떨어지는 보너스는 획득 실패이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고 한 기억도 없다만.”

“아, 네엡!”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대공님이 말했다.

그나저나 센스가 제법인 대공님이다. ‘기억에 없다’라는 정치인들의 래퍼토리이자, 실제 회화에선 응용이 힘든 문장을 자연스럽게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농담이니라. 고개를 들고 식기 전에 차를 들게.”

휘진은 비척비척 일어나서 홍차를 마셨다.

지금 기분은 매우 좋은 상태이다.

평생 한 번 말이나 섞어 볼까말까 한 미인이랑 오붓한 티타임이라는 상황은 도대체 어떤 신이 준 선물인 건지.

“그대는 할 말이 없다고 하지만, 이 몸은 자네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네.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휘진입니…휘진이야.”

대공님의 카리스마에 존대를 하려는 본능을 간신히 거부하고 편하게 말을 했다.

“휘진… 나무 진액 같은 이름이군. 어디서 온 건가?”

“난 동쪽에서 왔어.”

으레 한국 양판소식 명답을 내어 보았다. 어차피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못 알아먹을 거니 상관없지 않은가.

기왕이면 폼 나게 동쪽 땅의 끝에서 왔다고 할 생각이다.

“동부 제도에서 온 건가?”

“그 보다 더 동쪽에서 왔어.”

“동대륙인가?”

“그 보다 더 동쪽에서 왔어.”

솔직히 뭐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계속 그보다 더 동쪽에서 왔다고 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하자 대공님은 말문이 막힌 듯 잠깐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혹시, 대 균열의 저편 잃어버린 왕국 위그드라실인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땅에서 왔군.”

“아 뭐, 그래 거기서 왔어.”

“대 균열이 생긴 뒤 수백 년간 왕래가 없었던 망국에서 무슨 수로 넘어온 건가?”

큰일이다. 대충 말할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대공님이 깊은 관심을 가져버린 모양이다. 이 세상에 대한 상식도 없고 어떤 대답을 해도 좋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너무 막 지른 건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 성 안이었어. 안 믿기겠지만 정말이야.”

결국, 제대로 된 대답을 해내지 못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희박한 신뢰관계에 빌어 그냥 넘어가길 바랄 뿐이다.

“믿네.”

의외로 순순히 대공님은 짧은 대답을 끝으로 더 캐묻지 않았다.

“어째서?”

“이상한 남자로군, 의심받길 원하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어정쩡한 결론을 너무나도 쉽게 내려 버린다면 오히려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자네의 소지품 안에 있었던 것들은 그 어떤 국가에서도 본 적이 없는 것이네. 게다가 독특한 그 얼굴 생김새만 보아도 그렇지. 더하여 이 몸이라면 적대국에 첩자로 자네 같은 사람은 보내지 않았을 것이야. 이상이네.”

한마디로 동양인이고, 멍청해 보여서 믿는다는 것 같다.

황송하기 그지없는데.

엄격해 보이지만 의외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착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거 고맙네.”

뭔가 불만인 휘진의 반응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대공님.

귀엽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고 싶은가?”

“무슨 말이야?”

“고향에서 갑자기 이곳으로 이동해 온 것이라면 변변한 능력도, 돈도, 자생할 만한 여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터. 이대로 내보내버린다고 해도 한 겨울 쓸쓸하게 굳어가는 시체가 되어서야 이 몸의 마음도 편치 않네.”

“거기까지 신경 써 주는 거야?”

“북해의 겨울을 얕잡아보지 말게나.”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엄격하게 바라보며 훈계하는 대공님.

누나인 척하는 꼬맹이 같다.

“좋아 그럼 내 능력을 살려, 멸사봉대공(滅私捧大公)해주지.”

“호오, 재밌는 말재간이나 부리며 광대를 할 생각이라면 접어두어라. 이 몸은 항상 시간에 쫓기느니라.”

시시하지만 어려운 말장난을 알아차려주니 기쁘다.

만 19살에게 드립이 통하자 신나하는 만 26살의 모습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내겐 무시무시한 전투 능력이 있어.”

“간단한 영창파기 마법도 막아내지 못한 사내의 공언이라 신빙성이 없구나.”

“우리 고향에서 난 이렇게도 불렸지. ‘신속(神速)의 휘진’.”

너무나도 예리한 각도로 들어온 태클을 무시하고 아까부터 생각해두었던 필살기를 대신 말해주었다.

“어디 그럼 얼마나 빠른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흡사 동생의 재롱을 봐주는 누님의 아량으로 휘진을 바라보고 있던 베아트레아의 눈앞에서 그가 그대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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